성명논평

[성명] 피해자들을 통한 속에 돌아가시게 만든 사법부, 법복을 벗어라

1844

0529-3

피해자들을 통한 속에 돌아가시게 만든 사법부, 법복을 벗어라

지난 5월 25일 발표된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보고서를 통하여 헌법을 수호하고 법관의 독립을 지켜야 할 대법원이 오히려 헌법을 위반하고 청와대와 행정부와 담합하여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정의에의 호소’를 무참하게 짓밟았음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특조단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대법원은 상고법원을 설치하기 위하여 청와대에 대한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개인별 맞춤형 접촉, 설득 방안”을 수립하고 이병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최대 관심사가 “한일 우호관계의 복원”에 있다고 파악하면서 특히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사건(대법원 2013[보고서엔 20013으로 되어있음]다61381, 2013다67587)에 대하여 청구기각취지의 파기환송판결 기대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문건을 작성하였다.

이 문건에 따라 해당 재판부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압력이 행사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는 특정한 사건에 대한 판결을 청와대와의 정략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한일 우호관계의 복원”이라는 모호한 명분으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희생시켰음을 명확하게 한 것으로 통탄과 분노를 금치 못하게 한다.

이 문건이 언급하는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사건”이란 것은 해방 전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을 당한 피해자들이 각각 2000년과 2005년에 한국법원에 제기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들에서 대법원은 획기적인 2012년 판결을 통하여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 했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이라고 하고, 이 사건들에 선행하는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 일본법원의 판결들은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후 2013년 7월 부산고등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은 피고 회사 측에 손해배상을 명하는 판결을 내렸고, 이에 대해 일본기업들이 상소함에 따라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되었다.

그러나 이후 5년이 지나도록 최종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고, 다른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들 마저 미쓰비시사건 등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결과를 기다리며 심리가 중지된 상태다. 이와 같이 실질적으로 한국법원을 통한 피해구제의 길이 막힌 가운데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은 수차례에 걸쳐 판결을 촉구하는 집회와 기자회견을 열었다. 2016년 11월에는 원고들과 소송을 지원해온 한‧일시민단체들이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 앞으로 “피해자들의 고통을 헤아려 조속한 판결을 바란다”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판결이 이토록 지연되고 있는 동안 원고들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현재 미쓰비시, 신일철 사건의 원고 9명 가운데 7명이 돌아가셨고, 후속 사건인 후지코시근로정신대 피해사건의 원고도 벌써 다섯 분이 돌아가셨다.

이러한 가운데 위 특조단의 조사보고서를 접하고 재판이 지연된 이유가 오로지 대법원을 장악한 일부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미쓰비시·신일본제철 사건을 장기판의 졸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사법부의 독립이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차원에서는 물론, 대일과거사 피해자들의 ‘정의를 요청하고 피해구제를 받을 권리’를 근본적으로 박탈한 것으로서 해방된 독립국가의 사법부에 의해서조차 권리의 회복이 구조적,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자괴감까지 자아나게 한다.

사법부에 대한 분노는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일본정부가 피고 기업에 압력을 가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고, 일본 내각이 ‘일제의 식민지지배가 불법이 아니’라는,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해도 한국정부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의 과거사문제가 덮어두고 모른 체하면 사라지는 일인가. 나라의 근간인 헌법정신과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지 못하는 정부는 국가를 운영할 정당성이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대법원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되어 있는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에 대하여 헌법뿐만 아니라 국제인권법상 중대한 인권침해피해자들이 가지는 정당한 배상을 받을 권리를 침해해왔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새로운 재판부를 구성하여 신속하고 공정한 심리를 진행하라.

2) 사법부는 관련 문건의 원본을 모두 공개하고, 사법행정권을 남용하여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의 소송을 조직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 ‘사법농단’과 청와대와 외교부 등의 관여에 대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사죄하라.

3) 정부와 국회는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한 수사의뢰, 고발, 탄핵소추 등 구체적인 조취를 취하고, 사법개혁을 통해 재발방지책을 세워라.

이러한 상식적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우리는 대법원의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이며, 유엔 등 국제인권기구에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할 것임을 밝힌다.

2018.5.29
민족문제연구소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