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창씨개명’을 친일행위로 볼 수 있나요?

6929

0329-52

창씨제도 또는 창씨개명은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관습법으로 존속되어온 한국인의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일본 민법에 따라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상용케 한 것을 말합니다. ‘창씨(創氏)’는 호적상의 성을 씨로 정정하는 것이고, ‘개명(改名)’은 기존의 호적상 이름을 씨에 조화되도록 새로 변경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씨설정계(氏設定屆), 후자는 명변경허가신청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따라서 개명은 씨제도의 종속적 위상이면서 창씨 개념에 배제되는 것이 아니고 창씨에 이름이 모두 수용되는 포괄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식적으로 보면 ‘창씨+씨와 조화되는 개명’=‘창씨개명’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창씨제도는 1936년에 부임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하였습니다.

1937년 4월 사법개정조사위원회 설치로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고 1939년 11월 10일 제령 제19호 「조선민사령 중 개정의 건」과 제령 제20호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의 공포로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한시적’ 명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일제는 시행세칙을 통해 “종래의 성과 본관은 호적상에 그대로 존치한다”고 하여 뿌리 깊은 한국인의 전통을 인정하는 것처럼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호적에서 성과 본관을 삭제하면 일본인과 구별이 어려워 지배정책에 혼돈을 가져올 것을 우려한 꼼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기만적인 정책은 ‘창씨’가 다방면의 한국인들이 생활상의 요구에 따라 차별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한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창씨개명’은 내선일체 실현을 명분으로 한국의 가계전통을 말살하고 정신적 기반을 파괴해 일왕[天皇]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체제에 적합하게 제도를 개조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성(姓)은 남계혈통을 자손에 전하는 것으로, 동성동본의 결혼 불가, 양자는 동성동본이 아니면 금지, 여자는 출가해도 성을 바꾸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무시되어 씨설정, 서양자제(婿養子制: 데릴사위), 이성양자제(異姓養子制) 등 을 강제하였습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5년에 이것이 궁금하다 2 도 사족 이외에 95%는 성이 없었습니다. 한국과 달리 일본의 씨제도는 남계혈통을 이어가는 성이 아니라, 그 집을 이어가는 ‘이에[家]’를 뜻하는 것으로 형편에 따라 씨를 변경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1930년 국세조사 당시 일본의 성은 10만 종으로 보고됨)

일제는 한국인의 자발적인 요청으로 창씨를 시행하는만큼 이를 ‘권고’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경찰부-경찰서-주재소-파출소 등의 경찰 인력, 고위관료 지방 파견, 각종 선전물 배부, 각 부·읍·면에 창씨 상담소 개설, 지방유지의 창씨제도 후원회 조직, 친일단체동원, 친일인사들의 강연회·좌담회 독려 등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자발적인 창씨 외에는 실적이 저조해 5월 중순까지 총호수의 7.6%에 불과했습니다. 지역 유림이나 명문가의 저항도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에 일제는 노골적인 강제에 나서 지역에서는 호적에 제멋대로 창씨를 기재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창씨되거나, 신고하지 않으면 ‘불령선인(不逞鮮人)’, ‘비국민(非國民)’으로 매도해 사찰하는 등 온갖 불이익에 어쩔 수 없이 창씨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성적 부진으로 시한이 연장되어 9월 20일 현재 79.3%, 최종 기한인 1941년 말까지는 81.5%가 창씨한 것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씨설정’이 원래 창씨제도의 취지이므로 ‘개명’만 별도로 한 경우는 없습니다. 다만 일본식 성과 같아 일본말로 읽을 수 있는 유(柳)=야나기, 남(南)=미나미, 임(林)=하야시, 계(桂)=가쓰라 등처럼 굳이 창씨하지 않고 개명만 한 경우는 있었습니다.

일제가 자발성을 강조해 창씨개명을 유도한 만큼 조선귀족, 중추원, 명망가, 지역 유지 등 ‘특권층’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불이익을 받거나 탄압을 받지 않는다는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렇듯 ‘창씨개명’은 일제의 식민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강제된 것인 만큼 ‘친일’을 판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광수처럼 제도가 시행되기도 전인 1940년 1월에 창씨개명(香山光郞)하고 자랑스러워 한 자도 있지만, 반대로 일왕을 빗대 조롱하거나 ‘개자식’[犬子]으로 신고하거나 ‘개같은 놈 똥이나 먹어라’[太糞食衛] 등의 분풀이를 하거나 끝까지 거절하고 자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1946년 10월 23일 미군정법령 제122호 「조선성명복구령」이 공포·시행되어 창씨(제도·개명) 관련 법적 청산이 이루어졌습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