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저항에서 친일로 – 일진회 회장 이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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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9
김덕영 선임연구원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 1912년 일본 스마(須磨)에서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는 병문안을 온 일본의 우익낭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에게 이 말을 남기고, 얼마 후 병환으로 사망합니다. 1905년 일본에 외교권 위임을 청원한 「일진회 선언서」를 1909년 「한일합방청원서」를 주도한 친일파의 거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치고는 회한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이용구는 186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명(初名)은 우필(愚弼)이었으나 후에 상옥(祥玉)으로 개명했고, 청일전쟁 이후에 다시 만식(萬植)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용구는 1904년 진보회(進步會) 결성 직전에 개명한 이름입니다.

 이용구

▲이용구, 『일한합방비사』상권(1930)

동학에 투신하다
이용구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13세에 아버지를 여의였으니, 당연히 형편이 허락하질 않았습니다. 농사로 근근이 삶을 이어나가던 이용구는 동학(東學)을 만나게 됩니다. 1890년 그가 23살 때의 일입니다. 이런 그에게 동학은 희망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열심히 일했음에도 논리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고단한 삶을 사는 이에게 종교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동학은 조선말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해 불안한 사회상 속에서 태동한 종교였습니다. 동학이라는 이름도 서교(西敎) 즉 천주교를 대신해 동쪽 나라인 조선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으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이 대단히 강한 종교였습니다.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가 내세운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에 이어 이용구가 입도할 당시인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事人如天)”를 비롯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자연의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한울이 내재해 있다(物物天事事天)” 등 범천론적인 사상으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봉건적 신분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분평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런 교리는 대단히 선명하고 파격적입니다. 이런 사상은 봉건 지배권력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도전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가 사도난정(邪道亂正)을 이유로 처형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조선 말기 난세에 동학의 이와 같은 선명함은 이용구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손병희 등과 함께 최시형의 고제(高弟, 제자들 가운데서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가 됐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접계통으로 경기도 이천에서 농민군 수천 명을 모아 봉기하여 관아를 습격했으며, 남북접이 연합하여 공주전투를 벌일 때는 손병희의 참모장으로 참여합니다. 이때 그는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최시형을 따라 강원도로 도주했는데, 그 와중에도 최시형의 지시로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지로 다니며 동학포덕에 열중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는 당시 동학의 확연함에 끝까지 함께 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898년 최시형이 잡혀 교수형에 처해진 뒤 이용구도 경기도 이천에서 잡혀 다리가 부러지는 고문을 당하며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동학교도 수십 명이 감옥을 습격해서 그를 구출해냈다는 것은 그가 동학 내에서 갖고 있는 위상과 위치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1900년 도통을 이어받아 3대 교주가 된 손병희(孫秉熙)도 이용구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최시형의 처형이후 국내 활동에 어려움을 느낀 손병희는 이용구 등과 함께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일본 망명 중에도 동학의 재건을 위해 한국 내 민회(民會) 설립을 주도하는데, 그 결과 중 하나였던 중립회(中立會)가 진보회로 바뀌기 전까지 이용구는 ‘만식’이란 이름을 썼습니다. 손병희는 그에게 ‘용구(容九)’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먼저 귀국하여 진보회에 관한 것을 일임하며 이를 주간하게 합니다. 용구(容九)라는 이름에서 ‘九’는 1대 교주 최제우가 한글로 지은 포교 가사집이자 동경대전과 함께 동학의 기본경전인 「용담유사(龍膽遺嗣)」의 9편 가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9편 가사를 담고있는 사람. 의미심장한 이름이자 이용구에 대한 손병희의 평가와 믿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학농민전쟁의 패배, 그들이 흩어질 때
조선 말 동학농민전쟁이 사회에 던진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민란인 ‘홍경래의 난’ 이후 가장 큰 민중 항쟁 이었고, 여기에 외세까지 가세하여 청일전쟁을 발발시키는 국제적인 소용돌이를 일으켰으며, 가렴주구의 수탈에 저항했던 전쟁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로 상징되는 반외세투쟁으로까지 확산됩니다. 종래는 관군뿐만 아니라 일본군과도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 전개 됩니다. 특히 봉건지배층의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충격은 컸습니다. 일본군과 연합하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농민군을 사실상 학살하고,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를 부대시참(不待時斬)으로 처벌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한 탄압으로 대처합니다. 이 탄압은 대한제국 시기에도 계속됩니다. 지방에서는 동학당이라는 혐의만으로 재산을 빼앗기도 하고, 또 지방 사족층은 동학농민전쟁의 성과물 중 하나인 신분차별완화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동학세력을 탄압했습니다. 동학은 그 자체로 양반지배체제를 위협하는 일종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전쟁에서 살아남은 동학도들은 각지에 흩어져 숨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이념으로 뭉쳤던 무리가 타의에 의해 흩어질 때, 그들을 함께 하게 했던 이념과 공동체의 울타리가 깨지면서 다른 선택이 주어지게 됩니다. 변화한 상황에 따라, 때론 가혹한 전제가 억누를지라도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선택을 하든, 동학농민전쟁을 통해 그들만의 세상과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했던 동학도는 이제 다시는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조선의 봉건지배층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동학의 지도부는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망명을 선택합니다. 1901년 3대교주 손병희와 동생 손병흠 그리고 이용구 등은 일본으로 망명을 합니다. 하지만 함께 망명했던 그들조차, 그토록 믿었던 그들 사이에서도 선택은 엇갈립니다.

동학지도부의 새로운 선택
조선말, 구한국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과 그에 근거한 근대지상주의, 동양평화론, 대동합방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은 청일전쟁 이후 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끈데 이어서, 조선에서는 아관파천 무렵 처음 수입된 「대동합방론」 1천부가 하루만에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책을 구입한 사람들은 개화파 뿐만 아니라 봉건적인 유생들도 상당 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대동합방론」은 황성신문과 독립신문 조차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대동합방론」은 “동양의 쇠운을 만회하고 흥아(興亞)의 대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동아(東亞)의 여러 나라가 대동아연맹을 결성해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중국과는 동맹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사상은 이후 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사상적 기초인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집니다. 이 말은 「대동합방론」이 일본의 아시아 제국(諸國)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얘기입니다.

일본 망명 중에 손병희와 이용구는 역시 일본에 망명중인 개화파 인사를 비롯해 일본 내 여러 유력인사와 교류하면서 위의 사상, 이른바 ‘문명개화론’을 흡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이용구의 경우 「대동합방론」에 경도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 보면 대단히 극단적인 변화이자 선택입니다. ‘척왜양창의’를 내걸고 일본과 결사항전을 벌였던 동학이기 때문입니다. 손병희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경도부(京都府)를 통해 일본 군부에 군사비 1만원을 헌금하고, 일본 적십자사에 3천원을 기부하는 행위 등은 비록 동학 포교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의도를 바탕에 깔고 있다 하더라도 일본 정부 및 군부와 제휴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변화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동학이라는 단일한 경전과 단일한 이념으로 뭉쳐있던 이들이 다양한 생각과 사상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 사이에 ‘차이’의 발생을 필연적으로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용구의 선택과 변화

송병준과 이용구

▲ 송병준과 이용구, 『경성부사』2권

손병희의 선택과 변화는 그의 망명시절 저작인 <明理傳>(1903), <三戰論>(1903), <準備時代>(1905)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근대국민국가를 지향하며 ‘실력양성’과 돈독한 ‘국제외교’ 등으로 국가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그 틀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손병희는 일본 망명 중에도 동학을 재건하기 위해 민회설립운동을 펼쳤는데, 이는 그의 변화된 생각의 반영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1904년 대동회를 설립했으며 그 명칭은 몇 달 사이로 중립회와 진보회로 변경됩니다.

그러나 「대동합방론」에 경도된 이용구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대동합방론」의 이론인 한국과 일본이 일방(一邦)으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이런 길을 선택한 이유는 한국정부의 무능력과 정치․경제적 혼란, 동학에 여전히 자행되는 탄압과 대비해 러시아를 상대로 연일 승전하는 일본을 동양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자 신뢰할 대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친일파의 거두 송병준과의 잦은 교류 역시 크게 한 몫을 했습니다.

송병준은 함경남도 장진 출생으로 탁월한 처세술로 부귀영화를 누린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공작자금을 받고 오타니 기쿠조(大谷喜久藏) 병참감의 통역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와 친일단체의 결성, 유력인사 포섭 등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송병준은 이를 위해 1904년 8월 유신회를 조직하고 그 이름을 다시 일진회로 변경합니다.

그때 진보회와 이용구는 송병준의 공작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진보회가 갖고 있는 전국적인 조직망은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장점이었습니다.

그 무렵 이용구가 전권을 위임받은 진보회는 동학이란 이유만으로 탄압받고 있었습니다. 진보회 설립 당시 의정부 참정이었던 신기선은 진보회의 탄압이유에 대해, “진보회는 동학도이니, 어찌 선량한 민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동학도라는 것 자체를 탄압의 이유로 제시하며, “비록 지방수령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무지한 민이 서로 모이면 반드시 난을 일으키게 되어있고, 그 해산을 거부하는 것은 난민일 뿐이다. 토벌하지 않으면 결국 커다란 화근이 될 것이니 갑오동학의 난을 금일에 반복할 수 없다”라고 하여 조기토벌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진보회 지부회원이 상부훈령이란 명목 하에 사살되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유사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이 때 송병준의 접근은 달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내에서의 공격으로 생존자체가 위협받는 상황 즉 한국사회의 지배층과 적대적 관계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원호를 받는다는 것은 이용구로서는 진보회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로 판단했습니다. 손병희도 이런 이유 때문에 진보회와 일진회가 합동하는 것을 용인하게 됩니다.

그 결과 1904년 12월 진보회와 일진회는 ‘(합동)일진회’로 통합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용구는 일진회의 13도 총회장으로 취임합니다. 이후 이용구는 적극적으로 친일행위에 나서게 됩니다. 1905년 6월부터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돕기 위한 북진수송대를 조직하고, 함경도 지방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러시아군을 정탐하며 일본군 이동을 위한 철도부설 등에 동학교도들을 동원했습니다. 총 11만 4,500여명이 동원된 북진수송대는 각종 경비는 19만원을 초과하였는데, 임금 영수액은 겨우 6만 3,530원이었고, 회원 부담액은 13만 4,230원으로 총 실비 중 일군은 실비의 1/3에도 미달한 급여를 지불했습니다.

일진회가 동학교도들의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적극적인 친일행위에 나선 이유는 러일전쟁의 승기가 이미 일본으로 기울었으며, 1905년 1월 친러내각인 신기선 내각이 붕괴한 후, 1905년 6월 심상훈 내각으로부터 ‘관민합동통치’의 약속을 받아낸 ‘관민협조방침’을 발효했기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로 공격적인 탄압을 가했던 대한제국 정권과 이정도의 타협을 이끌어 낸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습니다다. 실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12월부터 일진회원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관민협조방침’을 발효한 이후에도 일진회에 대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일진회의 노골적인 친일 활동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추종의 개화세력으로 여기지는 분위기 속에서 비록 손병희의 허락을 받기는 했지만, 회장 이하 임원 전원이 단발을 하고, 아예 회원 전원의 복색으로 단발과 흑의를 규정하자, 일제침략의 앞잡이로서 집중공격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용구가 「일진회 청원서」에 참여한 이유도 보호국이라는 주권분할 상황이 아니면 정치적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공격은 일진회가 보호조약에 찬성하고 이를 공격하는 의병 등과 충돌함에 따라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이용구의 선택은 상황을 계속 악화시켰습니다. 결국 교주 손병희는 결단을 내립니다. 1905년 12월 이용구를 비롯해 친일에 앞장섰던 동학교도 62명을 출교처분하고, 동학의 교명을 천도교(天道敎)라 개칭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공표하여 동학을 근대적 체계를 갖춘 종교로 정비하고, 이후 민족종교로 변모하는데 성공합니다.

이용구는 출교후 함께 출교된 잔당을 끌어모아 천도교의 대도주(大道主)로 있던 김연국(金演局)을 대례사(大禮師)로 삼아 시천교(侍天敎)를 만듭니다. 잔당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세력은 만만치 않았고, 주로 이북지역의 동학교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최후의 승부수, 만주(滿洲)이주

이용구 부고기사

▲『신한민보』1912년 6월 17일 이용구 부고기사. “일진회 괴수 이용구는 폐병으로 일본 슈마에서 치료하다가 5월 22일 지옥으로 들어갔는데 · · · “라며 그의 죽음을 기뻐하고 있다.

을사늑약 이후, 일진회는 방치됩니다. 비록 일진회 회원이 지방군수 나아가 관찰사까지 진출하고 있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일진회에 대한 공격과 사회적 고립은 심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협조하는 대가로 일진회가 중앙권력에 진출하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연히 그들의 고립을 타개할 만한 정치권력이 부여되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습니다. 오히려 일진회에 대한 실제적인 지원이 끊겨 일진회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일본이 중앙권력을 나눠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 이미 어리석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이후 일진회의 조약 지지활동이 무색하게, 이완용 내각은 일진회 출신 관찰사의 절반을 축출하고, 일진회와 선을 그었습니다. 송병준만이 유일하게 농상공부대신으로 발탁되었는데, 송병준은 철저하게 자신의 안위와 영달에만 관심이 있었고, 일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용구와 일진회는 지속적으로 의병의 주요 공격대상이 됐으며, 정미의병에 의한 일진회 공격은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일진회는 붕괴 위기까지 몰리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용구 등 일진회 간부들에게는 대안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용구가 생각한 대안은 아예 한국사회를 떠나 일진회 회원만의 새로운 집단적 정착지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진회는 일찍부터 만주에 지회를 설치하고 조직적 기반을 뿌리내리려 하고 있었는데, 정권장악이 여의치 않게 되자 아예 집단 이주를 염두에 두고 자치재단을 설립하려 했습니다. 1907년 일본에 건너간 이용구가 이토 히로부미와 집중적으로 검토한 것도 바로 일본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자치재단을 설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일진회의 독자화를 염려한 통감부가 자금지원을 머뭇거리고 경쟁세력인 이완용에게 자금집행권을 넘기려 함에 따라 좌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용구는 다시 가쓰라 다로(桂太郞)수상에 접근해 이른바 ‘한일합방’이 성사되도록 협조하면 만주이주와 그에 필요한 3백만 원을 지급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가쓰라는 “3백만 원은 물론 1천만 원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했고, 이용구는 이 말을 믿고 더욱 반민족적 행동에 앞장섰습니다. 결국 1909년 12월 “한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한일양국은 합방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합방청원서」를 작성하여 순종을 비롯해 통감부와 내각에 상주(上奏)하는 한편 전국에 선언서를 배포했습니다. 이후 일진회와 이에 동조하는 단체를 동원하여 ‘합방청원운동’을 벌입니다.

그러나 1910년 합병 후, 그가 받은 것은 일진회의 해산 명령과 해산비 5,000원 은사금 15만원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토사구팽’ 당한 것입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만주이주의 꿈마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결국 이용구는 그 충격으로 합방이 된 후 1년도 못되어 지병인 결핵이 도져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1912년 5월 44살의 나이로 일본 스마에서 숨을 거둡니다.

일본은 이용구가 죽자 거의 국장이나 다름없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왕으로부터 ‘훈1등서보장’을 받았습니다. 살아있는 이용구는 협조를 대가로 항상 권력의 분담 혹은 자치를 요구한 다소 귀찮은 존재였고, 그로 인해 합방 후 버림받았지만. 죽은 이용구는 친일파의 귀감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이용구는 죽는 순간까지 일본에게 이용당한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일진회를 지키려는 선택을 할수록 이용구와 일진회는 스스로 고립됐습니다. 어쩌면 그 역은 고립을 피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에 답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선택은 항상 그랬습니다. 그의 마지막 선택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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