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두 개의 얼굴-밀정이냐, 독립투사냐?’ – 경기도 경찰부 경부 황옥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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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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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정〉. 황옥의 애매모호함을 지우고 독립운동의 판타지를 그렸다

한 부의 보고서
1919년 4월 29일 상해 주재 일본영사는 한 부의 보고서를 받았다. 상해의 조선인들을 정탐하기 위해 파견된 신임 관리가 작성한 것이었다. 자신을 ‘상해파견원’이라고 밝힌 그는 보고서에서 3·1운동 이후 조선인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고용된 조선인 정보원이 불령선인들의 협박으로 사직하면서 정보 수집에 곤란을 겪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두 명의 밀정을 조선인 사회에 잠입시켜 정보 수집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한 명은 자신이 데려온 밀정 한경순으로, 조선인 청년회에 잠입하여 조선인들의 민적을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완전히 독립운동 동지로 가장하고 상해임시정부 안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고 했다. ‘상해파견원’은 그가 과격론에 편승하여 교묘히 조선인들에게 채용되었다며 조만간 상당한 정보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밀정의 이름은 황옥이었다.최근 영화 〈밀정〉의 개봉으로 일제 식민지시기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달아오르고 있다. 작년 영화 〈암살〉의 성공으로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다는 징크스는 깨지고 이제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졌다. 학창시절 외우기 힘든 온갖 단체들의 등장으로 고통을 주었던 독립운동의 역사가 생생한 영상언어로 치환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일회성이 아닌 새로운 현상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밀정〉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의열단의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 일명 ‘황옥경부사건’이다. 영화 〈암살〉은 가상의 사건을 시나리오로 꾸몄지만 영화 〈밀정〉은 실제 일어난 일을 소재로 삼았기에 구체적 사실관계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걱정이 앞섰다. 의욕이 앞서 본의 아니게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영화 속 상상이 실제 역사로 오해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영화 속 이정출은 황옥을 모티브로 했으나 황옥 그 자체는 아니었고, 김우진은 김시현을 모티브로 했으나 김시현 그 자체는 아니었다.
영화 〈밀정〉은 자신을 실제 역사라고 강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독은 이 영화가 판타지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영화 마지막에 실제 역사에는 없는 이정출의 마지막 거사를 덧붙여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실제 역사 속 인물 황옥이 가진 애매모호함을 지우고, 지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싸움에 나서는 진정한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가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황진미의 글 「‘밀정’, 창피를 모르는 친일파의 궤변 잠재운 깊은 울림」에서 따옴)
이제 우리의 관심은 하나로 모인다. 영화 〈밀정〉과 실제 역사는 얼마나 다를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관심은 일제 경찰이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매모호한 인물 황옥에게 쏠린다. 과연 그는 밀정이었을까, 독립운동가였을까?

 

밀정 황옥
1887년 문경에서 태어난 황옥은 어린 시절 집안에서 운영하던 도천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배움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디에도 그가 그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그런데 일어 공부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미군정기 출세에 뜻이 있다면 영어가 필수였듯이 망국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일어였다. 1909년 황옥은 재판소 서기 겸 통역관보가 되어 평양재판소와 진남포재판소에서 일했다. 능숙한 일본어 덕택이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한 후에도 그는 서기 겸 통역생의 삶을 지속했다. 1912년 그는 해주지방법원 송화지청 검사국으로 자리를 옮겨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했다.
그런데 1919년 4월 황옥은 돌연 중국 상해로 떠난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사무실이 있는 건물 2층에서 기숙하며 임시정부 요인들을 돕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일제 말단 관리였던 그가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한성정부를 주도했던 홍진 덕분으로 알려져 있다. 구한말 판사였던 홍진은 나라가 망한 후 변호사로 일했는데, 재판소 서기이자 통역생이었던 황옥과 자연스레 알게 되어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황옥과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유석현의 증언에 의하면 3·1운동이 일어나자 홍진은 황옥에게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자고 했다고 한다. 증언의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황옥은 상해로 왔고, 홍진, 이명교 등 한성정부 관계자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황옥의 상해 생활은 길지 않았다. 5월 13일 상해 임시의정원 의원들은 충청도의원으로 선출되었던 이명교를 해임했다. 그가 일제의 밀정으로부터 조선총독부가 발급한 국경 통과 여행증을 받아 상해로 왔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행증을 건넨 밀정은 바로 황옥이었다. 이 글 서두에 소개한 ‘상해파견원’의 보고서를 복기해보자. 황옥은 “완전히 독립운동 동지로 가장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잠입”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일제의 밀정으로 상해임시정부의 내밀한 정보를 캐내다가 한 달여 만에 들통이 났던 것이다. 그에게 여행증을 받은 의원은 해임되었고, 목숨에 위협을 느낀 황옥은 급히 상해를 떠나야 했다.

 

10_1경기도 경찰부 경부 황옥. 그는 스스로 자신을 밀정이라 주장했다.

 

조선총독부는 강점 초기부터 중국 각지의 일본 영사관에 사무관, 경부, 통역생 등 총독부 직원들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총독부의 파견원은 수집한 정보를 각각 영사와 조선총독부에 보고했다. 파견원은 총독부에서 파견된 경부나 통역생을 밀정으로 활용하거나 현지에 있는 조선인을 밀정으로 고용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총독부 파견원이나 밀정의 관리는 대개 경무국 보안과에서 했다. 조선총독부와는 별개로 영사관 소속 안동경무서와 영사관경찰서도 별도의 밀정을 고용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황옥은 1916년부터 상해를 오고갔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황옥이 밀정으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은 상해를 오고갔던 그 경험이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조선으로 돌아온 황옥은 1919년 7월 부산재판소 진주지청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20년 3월 조선인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경기도 경찰부 경부로 특별 채용된다. 상해에서 밀정으로 활약하며 상해임시정부의 정보를 정탐했던 공로가 경부로 특채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내지부 간부가 되다
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서초, 이교담을 조선에 파견하여 내지부와 세포단체를 조직했다. 그런데 여기에 황옥의 이름이 또 등장한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황옥은 이즈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서초 등이 조직한 내지부의 간부로 선임됐다. 경기도 경찰부 경부인 그가 무슨 이유로 공산당원이 되었을까?
이는 당시 경무국 보안과장이었던 시라카미(白上佑吉)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황옥은 시라카미가 고려공산당과 곧 개최될 예정이었던 극동민족대회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라고 지시하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접근하여 당원으로 가입했던 것이다. 후일 황옥은 시라카미가 공산당에 직접 가입하라고 한 적은 없지만 그들의 편이 되어야 정보를 알 수 있기에 그리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내지부 간부가 된 황옥은 내지부와 세포단체의 조직,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할 대표자 선임에 관여하면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내밀한 사정을 정탐했다. 황옥은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할 대표로 뽑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당원들에게 조선총독부가 발급한 국경 통과 여행증을 발급해 주는 등 편의를 제공하며 호감을 샀다. 이들 중에 후일 의열단의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을 주도하게 되는 김시현도 들어있었다.
황옥은 밀양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김시현을 서울로 호송하게 된 일을 계기로 김시현과 친해졌다. 그 후 황옥은 김시현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게 도와주고, 조선총독부의 여행증과 총독부로부터 받은 기밀비 50원을 여비로 주어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도록 도와주었다. 김시현은 황옥이 일제 경찰이기는 했지만 독립에 뜻을 품은 인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믿음으로부터 의열단의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 일명 ‘황옥경부사건’이 시작되었다.

 

황옥경부사건
김원봉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장건상과 협의 하에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을 준비했다. 김원봉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당원인 김한과 김시현에게 이 일을 주도해줄 것을 의뢰했다. 하지만 김한이 종로경찰서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면서, 대암살 파괴계획의 책임은 자연히 김시현이 맡게 되었다.

 

11_1김시현. 의열단의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을 주도했다.

김시현은 자신이 굳게 믿고 있던 황옥을 이 계획에 끌어들였다. 그는 김원봉에게 황옥의 참가 여부를 타진했고, 김원봉은 황옥을 직접 만나 그가 신뢰할만한 인물인지 직접 확인하겠다고 했다. 의열단 단원들은 김원봉이 현직 경부를 직접 만나는 것을 반대했지만, 김원봉은 의열단의 계획에 현직 경찰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1923년 2월 8일 황옥은 종로경찰서폭탄사건의 폭탄 출처에 대한 조사를 명목으로 출장 허가를 받아 천진으로 출발했다. 개성경찰서 경부보 하시모토(橋本淸)와 유석현이 동행했다. 유석현은 체포 위기에 몰려 황옥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의열단원이었다. 황옥은 상부에 유석현을 자신의 밀정이라고 보고했다.
2월 11일 천진에 도착한 황옥은 하시모토를 따돌리고 김시현과 함께 은밀히 김원봉을 만났다. 김원봉은 황옥을 충분히 신뢰할만한 인물이라고 판단해, 의열단에 가입시키고 대암살 파괴계획에 참여시켰다.
의열단은 먼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한 후 실행 단원들을 잠입시켜 거사를 시행하기로 했다. 상해에서 천진까지의 운반은 폭탄 전문가 마자알과 현계옥, 의열단 동조자였던 중국인 노파 조노태태 등이 나서 가족처럼 꾸미고 기차로 운반했다. 3월 3일 천진에서 폭탄과 유인물 일체를 인수한 김시현과 황옥은 여행용 가방에 나누어 담아 안동(현 단둥)까지 운반했다. 안동에는 미리 준비한 중계거점이 있었다. 조선일보 안동지국장 홍종우의 집이었다. 홍종우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당원이었다.
3월 8일 홍종우는 자신의 집에서 ‘조선일보 안동지국 설치 축하 연회’를 열었다. 연회를 빌미로 폭탄을 옮기려는 계획이었다. 연회에는 안동영사관 김우영 부영사와 영사 관리, 경무서 경관, 신의주경찰서 최두천 경부 등 일본 관리 10여명과 김시현, 황옥, 신의주 기생 등이 함께했다. 이들은 즐겁게 먹고 마시다 강 건너 신의주에서 2차를 하기로 했다. 일본 관리들은 자동차로 이동했고, 황옥과 김시현은 인력거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폭탄과 유인물은 인력거 뒤에 숨겨져 있었다.
의열단의 폭탄은 국경을 넘었다. 김시현과 황옥은 연회가 끝난 후 비상시에 쓸 폭탄과 유인물만 일부 신의주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경성으로 옮겼다. 이제 폭탄을 던질 실행 단원들의 입국만 기다리면 되었다. 그들이 오면 적당한 시기에 대규모 암살 파괴계획을 실행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의열단의 대암살 파괴계획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3월 14일부터 일제는 의열단 단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17일 유석현이 체포되었고 19일에는 황옥이 체포되었다. 수사망을 뚫고 일시 도주했던 김시현은 3월 30일 체포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밀정인가? 독립운동가인가?
1923년 4월 일제 공안당국은 경기도 경부 황옥이 의열단에 동조하여 대규모 테러를 계획하다 체포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사건은 현직 경찰 간부가 조선의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건으로 세간의 큰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1923년 8월 7일 의열단사건을 심리하는 법정에서 황옥은 정반대의 발언을 쏟아놓았다.

 

12_1법정에 선 김시현과 황옥

황옥은 자신이 의열단의 폭탄 반입을 도운 것은 모두 의열단원을 검거하기 위한 비밀작전이었다고 주장했다. 진실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공적을 둘러싼 평안북도 경찰부·안동경무서와 경기도 경찰부 사이의 알력이 존재했다. 평안북도 경찰부와 안동경무서는 황옥의 의열단 동조와 테러 가담을 의심한 반면, 경기도 경찰부는 황옥과 홍종우가 자신들의 밀정으로 의열단원과 고려공산당원의 체포를 위한 비밀 작전을 수행 중이었음을 주장했다. 경무국도 경기도 경찰부와 뜻을 같이 했다.

그러나 평안북도 경찰부와 안동경무서가 주장을 굽히지 않자 경기도 경찰부는 황옥을 다그쳐 사건을 조기에 수습하려 했다. 문제는 황옥이었다. 황옥은 일망타진의 꿈을 버리지 않고 김시현의 거취 등 중요한 정보를 숨겼다. 이에 경기도 경찰부는 더 이상 황옥을 보호하는 것을 포기하고 황옥을 체포했다.
법정에서 황옥이 스스로 밀정임을 밝혔을 때 대부분의 의열단원들은 분노했다. 방청석에서는 황옥에 대한 비웃음이 쏟아졌다. 단 한사람, 조선일보 안동지국장 홍종우만 달랐다. 그는 황옥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고려공산당원과 의열단원 체포에 협력한 밀정이라고 주장했다.
황옥의 법정 진술로 공안당국은 곤욕스런 처지에 빠졌다. 황옥으로 인해 공안당국의 수사행태가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내외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잡기 위해 조선인 고등경찰을 적극 활용했고, 그들이 독립운동진영에 침투해 공작 수사를 펼치는 것을 당연한 관행처럼 여겼다. 이러한 공안당국의 수사 행태는 식민통치기간 동안 수많은 밀정과 끄나풀의 양산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범죄자를 잡기 위해서는 어떠한 불법적 행동도 허용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이 ‘국체’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운동이나 조선의 독립운동이어도 용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 신문이 일제의 공안당국은 조선의 독립운동기관이냐고 비꼬았던 것은 이러한 당국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었다.
일본의 유명 인권변호사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는데 힘썼던 후세 다쯔지(布施辰治)는 황옥경부사건의 본질이 공안당국이 조선인의 독립운동사상을 이용하여 벌인 ‘스파이 연극’의 폭로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도 공안당국의 밀정공작수사를 비판하면서 ‘경찰관리가 범인을 제조하고 체포한 혐의’가 확실한 만큼, 공작수사에 의해 체포된 용의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주장했다.
일제 당국이 여론 악화를 극복하고 사건을 수습할 유일한 방법은 황옥의 진술을 끝까지 부정하는 것이었다. 당국은 한때 고등경찰로 목숨을 걸고 고려공산당과 의열단에 접촉해 공산당원 및 의열단원의 검거에 큰 공을 세운 황옥을 조선의 독립운동가로 몰아붙였다.
의열단은 이번 사건이 황옥의 간계로 발각되고 실패한 만큼 황옥이 무사 방면되더라도 극히 엄중한 처벌로 징계하겠다고 밝혔다. 황옥에게 기만당한 당사자 김시현의 반응은 두 가지 버전이 남아있다. 하나는 예심조서에 기록된 증언으로 언제인지 정확한 시점은 밝히지 않았지만 “자신은 황옥 때문에 체포를 면했고 동지들도 그에게 많은 편익을 얻어 동지 중 한명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 증언이다. 다른 하나는 법정에서의 증언으로 “경성에 들어온 직후 황옥이 폭탄의 일부를 경기도 경찰부에 압수시키면 어떠하냐고 물어 그제야 황옥이 우리의 적인줄 알았다”고 한 증언이다. 예심조서의 증언은 일제 당국의 논지에 맞춘 강압적 증언일 수 있다. 반면 법정의 진술은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의 진술이다. 아마 후자가 좀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13_1의열단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호외

 

반면 사건 직후부터 황옥을 동정하는 여론도 있었다. 동정론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일부 언론은 일제가 독립운동가로 규정한 황옥을 진짜 독립운동가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10여년이 흐른 후 전언이긴 하지만 김원봉도 황옥을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경부이나 과거 의열단원으로 활동했으며 불행히 관헌에 체포된 애련한 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이러한 평가가 더욱 강해졌다. 구보 박태원이 김원봉과의 면담 후 저술한 ????약산과 의열단????에는 황옥이 밀정이라고 털어놓아 세상의 비난을 자초한 것은 의열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변호하고 있다. 김시현이 1961년 남긴 회고록과 유석현이 1983년에 남긴 회고에도 그들은 황옥을 진정한 독립운동가라고 재평가했다.
해방 후 황옥에 대한 평가가 이렇듯 후한 것은 사건 이후 황옥의 삶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싶다. 감옥에서 나온 후 황옥은 경찰조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경무국장까지 사표를 제출할 정도로 물의를 일으킨 데다 경찰은 그를 독립운동가라 규정했으니 그의 복귀는 양쪽 모두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황옥은 독립운동도 하지 않았다. 김시현은 감옥에서 나온 직후 곧바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황옥은 별다른 활동 없이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다만 그는 과거에 연을 맺었던 의열단원이나 애국지사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이것이 해방 후 그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바꾼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황옥의 삶에는 여전히 짙은 회색빛 안개가 드리워져 있다. 밀정과 독립운동가, 그가 지닌 두 가지 면모는 그의 이름 앞에서 영원히 평행선을 그릴 가능성이 높다. 영화 〈밀정〉에서 정채산이 말한다. “사람은 이름을 어느 쪽에 올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온다. 당신은 어느 쪽에 이름을 올릴 것이냐?” 안타깝게도 황옥은 어느 쪽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 조한성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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