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검사가 남긴 생생한 만세운동 탄압 기록’ | ||||||
민족문제연구소 | ||||||
2월 26일, 91주년 3·1절을 앞두고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함경도지역 3·1운동 참여자에 대한 조선총독부 검사의 기소 관련 기록 원본을 일본에서 입수하여 공개했다. 이 기록을 작성하고 소장했던 이시카와 노부시게(石川信重, 1871~?)는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으로 1908년 12월 통감부 검사로 내한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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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사하고,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드는 등 사전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3일 새벽부터 대규모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이근재, 조영신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한명환, 이봉선 등 학생 지도자들이 구속되었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이 있었음에도 예정대로 만세시위는 계속되어 학생과 시민 1천여 명이 연일 거리를 누비며 시위를 벌였다. 당황한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평화적인 시위대에게 총칼과 소방용 갈고리까지 휘둘러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맥래(Duncan M. MacRae)가 이 같은 참상을 목격하고 함흥 경찰서장을 찾아가 폭거에 항의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당시 함흥지방재판소 검사로 있던 이시카와가 1919년 3월 24일 이 사건의 주동자로 이근재, 조영신 등 40명을 기소하였으며, 4월 21일 1심에서 이근재는 2년, 조영신은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7월 3일 2심에서도 이근재 징역 2년, 한영호, 조영신 등 4명 징역 1년 6개월, 조동훈, 이영화 등 4명 징역 1년, 김중석, 최영학 등 11명 징역 8개월, 한명환, 이봉선 등 15명은 태 90을 선고 받고, 김광표, 이진영 등 3명만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같은 해 9월 기각되었다. 그 가운데 조영신은 함흥경찰서에서 받은 고문과 구타로 늑막염에 걸려 복역 10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서대문감옥에서 풀려났으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지 1주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 ||||||
이 자료 마지막에 실려 있는 이구준(李求準) 등의 사건은 함경남도 북청 지역에서 있었던 반일 격문 인쇄 배포와 면사무소 방화 사건이다. 1919년 3월 말경 이구준과 고명철(高明哲)은 주병해(朱秉海)와 한탁렬(韓鐸烈) 등 동지를 포섭하여 고명철이 근무하고 있던 사립 평산보통학교 숙직실에 모여 납세거부·일본식 연호 사용 거부·한인 관공리 퇴직 권고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격문 전단을 등사하여 조선독립단 이름으로 배포했다. 5월 5일에도 같은 장소에서『대한독립신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어 각지 유지들에게 배포했다. 그리고 5월 8일 새벽에 석유통을 가지고 평산면사무소에 들어가 방화하고, 가회면사무소에도 불을 질렀으나 일경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이시카와 검사의 기소로 함흥지방법원에서 1919년 8월 12일 4명 모두 징역 4년의 유죄판결을 받았고,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11월 7일 역시 유죄판결을 받아, 다시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12월 4일 기각되었다. 이들은 함경도 지역 3·1운동 관련 수형자 중 가장 가혹한 형량을 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굴한 이 기소 준비 자료는 일선 일본인 검사가 작성한 상세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일제의 3·1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과 대응을 살펴볼 수 있는 1차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특히 재판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북한 지역에 관한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희소성에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 자료를 면밀히 분석하면, 함흥지방법원에서만 재판을 받고 복심법원에 항소하지 않은 함경도 일대의 3·1운동 주동자들과 투쟁 양상을 밝힐 수 있음은 물론, 지역사의 관점에서 지방의 3·1운동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지방의 3·1운동이 매우 조직적으로 전개되었으며, 평화적 시위 외에도 지하조직 결성·지하신문 발간· 관공서 방화·납세거부·연호 사용 거부·관공리 퇴직권고 등 타협· 비타협적 투쟁방식이 배합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3·1운동의 구체적 실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시각을가지고 있다. 한편 연구소측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자료에는 주동자 외에도 적극 관여자, 그리고 검사가 기소하지 않았던 다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수록된 115건의 주동자 가운데서도 24명만이 국가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예를 들면 ‘강남섭(姜南燮)’의 경우, 함경남도 홍원군 천도교 교구장으로서 홍원군의 삼일운동을 이끌었으나, 관계자 강인택(姜仁澤)이 2009년 애족장을 받은 반면, 강남섭은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이다. 이번에 연구소가 공개한 자료를 통해 추가 서훈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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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자료 속에서 3·1독립선언서 원본도 나왔는데, 보성사에서 인쇄한 2만 1천장 가운데 한 장이다. 선언서 뒷면에는 “巡査拾得ノ紙(순사가 습득한 종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이 선언서는 2월 28일 아침부터 전국에 전달되었는데 함경도 지역 3·1운동 현장에서 일제 순사가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보성사가 인쇄한 원본 선언서는 첫줄에 ‘朝鮮(조선)’이 ‘鮮朝(선조)’로 잘못 인쇄되어 있는데 유일하게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 자료 발굴을 통해 3·1독립선언서가 전국적으로 신속하게 배포되었음을 입증하게 된 것도 이번 자료 발굴의 성과라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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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이시카와 검사의 기소 자료와 함께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재직시 그가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통감부재판소 사법사건 취급령』,『한국형법대전 개정초안』,『태형령(제령안), 태형령시행규칙(부령안)』등도 공개했다. 태형령과 태형령 시행규칙은 1912년 3월에 발포되었으므로, 이들 자료들은 그 이전에 작성된 문서이며, 일제가 이러한 악법들을 제정·발포하면서 일선 검사들에게까지 극비리에 검토케 하였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전근대적인 악법인 태형령은 일제의 무자비한 3·1운동 탄압에 대한 선교사들의 비난과 국제적인 여론 악화로 1920년 3월에 폐지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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