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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고발’이 아닌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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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변호사


ㆍ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의 문제를 대할 때마다 나 역시 두려움에 떨며 ‘내가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살았다면 독립운동에 참여했을까 일제의 주구가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고백컨대 자신이 없다.

“일제 말 때 27세의 젊은 나이로 하동군수를 지내면서 저 자신의 출세와 보신에 눈이 어두워 (군민들을) 죽창으로 위협까지 했던 저를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아주신 하동 군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원로 법학자 이항녕 교수는 1991년 7월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 초청 강연회에서 또다시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빌었다. 이 교수의 친일 반성문은 이미 1970년대 중등 교과서에 실려 있던 터였다.

일제 치하에서 당시 국민학교 교사로 일했던 김남식 선생이 있다. 광복 이후부터 지금까지 선생은 “왜정 때 학생들에게 일본말 쓰기를 시킨 것에 대해 벌을 받는 의미”로 하루도 빠짐없이 동대문구 주변의 쓰레기를 주웠다.

충남 광공부장으로 일한 현석호 선생의 회고록이다.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일과 출세를 위해 힘쓴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해방과 독립이 일본의 패망과 미국의 승리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궁극적 원인이 조선 민족의 독립을 위해 3·1운동을 비롯한 국내외의 투쟁에서 뼈를 갈고 피를 뿌린 수많은 순국선열의 공로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 같은 사람은 참으로 죄스럽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광복 후 대검차장을 지낸 엄상섭 등 8명의 검사는 1948년 8월 “왜제하(倭制下)의 검사, 즉 고관(高官)을 지냈다는 것만은 한없이 후회되는 일입니다. 왜제통치(倭制統治)에 협력을 하였다는 것만은 아무리 사과를 하여도 모자랄 것입니다”라며 사표를 제출했다. 이 모두는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내용이다. 사전이 ‘고발’이 아닌 ‘교훈’인 이유다. 물론 끝내 친일을 부정하며 일생을 마친 이도 많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친일행각을 은폐하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후손들까지 나서서 은폐를 시도하는 이들도 있다. 정반대로 역사의 법정 앞에 ‘따뜻한’ 교훈을 남긴 이도 많다.

친일 문제를 대할 때마다 나 역시 두려움에 떨며 ‘내가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살았다면 독립운동에 참여했을까 일제의 주구가 됐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고백컨대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친일에 대해 비판할 권리를 가져서는 아니 될까?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조국 광복 운동에 손가락 하나 담근 적이 없는 정체불명의 인사들이 그때(반민특위·광복회)보다 6배나 많은 사람을 친일 인사로 사전에 실어놓은 것”이라 했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있다. 이를 두고 숭실대 김선욱 교수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를 뜻한다고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친일은 ‘개인 책임’이 아닌 ‘집단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반공’이 아니면 ‘친일’을 입에 올리지 말고, ‘반공’으로서 이미 ‘친일’을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면 ‘친일파’를 비난할 권리조차 없다는 이들까지 있다.

할아버지가 일제 치하에서 관료로 일했던 이윤 선생이 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의 순서로 2005년 9월에 수록대상자 선정 절차가 있었다. 그때도 일부 언론은 난리였다. 이 선생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로 편지를 보냈다. “이제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에 앞서 일차적으로 단순히 그에 수록될 명단만을 발표했을 뿐인데도 세상은 왜 이리도 소란스러운지? 붓을 놀려 살고 있는 소위 ‘조·중·동’을 필두로 하여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속죄하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새삼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일개 무명교사일망정 내 자신부터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서 이런 어두운 과거를 규명하고 그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전폭적인 성원을 보냅니다.” 탓하는 게 아니라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앞의 의무다.<2009 11/24   위클리경향 8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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