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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의거’ 주역 강윤국 선생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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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 왼쪽부터 강윤국, 조문기, 유만수 선생(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자료)


‘부민관의거’ 주역이셨던 독립운동가 강윤국(康潤國 본명 강백) 선생이 3일 오전 8시 30분 향년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발인은 5일 서울보훈병원, 장지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4묘역이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오후 7시 경성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 거두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大義黨) 주최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라는 대규모 친일 어용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조선총독, 정무총감,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해 이성근, 김동환, 김은연, 고원훈, 손영목 등 당시 대표적 친일파들과 만주 중국에서 온 대표들도 참가했다.

그러나 국내 비밀 독립운동결사체인 대한애국청년단의 유만수 조문기 강윤국 선생 등은 대회장에 다이너마이트 2개를 설치, 폭파시킴으로써 대회를 무산시켰다. ‘부민관의거’로 불리는 이 날의 거사는 경성 한복판에서 침략원흉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의혈투쟁의 대미를 장식한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강윤국 선생의 명복을 빌며, 부민관의거


당시를 회고한 조문기 선생의 회고록『슬픈 조국의 노래』일부를 발췌한다.


친일 반역자의 거동을 살피던 5월의 어느 날, 나는 애청(대한애국청년단의 줄임말)의 긴급회의 소집 전보를 받았다. 전보를 불태우고 서울로 출발했다.

유만수의 집에는 주요 동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유만수는 내가 들어서자 문을 굳게 닫고 중요한 보고를 했다.

“드디어 박춘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월관에서 대의당을 결성한다고 한다.”

핵심 인원은 박춘금 외 이성근, 김동환, 김은연, 고원훈, 손영목 등 당시 1급 친일반역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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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춘금은 당 결성으로만 끝나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그들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며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유만수는 다이너마이트를 빼내오기 위해 수색 변전소 작업장에 인부로 잠입했다. 일제는 공습을 피해 주요시설물을 옮기기 위한 지하요새를 만들고 있었다. 전문 인부들이 지하로 들어가 폭발물을 장치해 폭파하면 일반 노무자들이 흙을 퍼 날랐다. 화약고는 작업현장에서 떨어진 지하창고에 있었다. 지하 화약창고는 일반 노무자들의 봉쇄된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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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파작업을 맡게 된 유만수는 땅 속에 들어가 설치하는 동안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해 떡처럼 뭉쳐 있는 내용물을 조금씩 떼어냈다. 그것을 찌까다비(일본 운동화) 밑창 속에 이겨 넣어 매일 조금씩 빼돌렸으며 10여일 후에는 뇌관 2개를 반출할 수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하게 되자 애청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사를 앞두고 신중하면서도 의욕적인 기운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유만수의 집에서 모임이 잡힌 어느 날, 어둠이 들 무렵 방으로 들어서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동지들은 두툼한 책 무더기를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죽여 물었다.

“이걸 보게.”

강윤국 동지가 책 무더기 가운데 두껍게 장정이 된 책 한 권을 펼쳤다. 책 속에는 칼로 도려낸 구멍이 있었고 그 속에는 권총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어디서 난 거야?”

강윤국이 들려 준 사연은 이랬다. 국수공장을 하던 강윤국의 집에 자주 찾아오는 헌병 장교가 있었다. 특별히 군부의 지시사항을 전하러 온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부탁도 없었지만, 점심때가 되면 어슬렁어슬렁 들어와 대접을 받고 시시껄렁한 잡담을 두어 시간씩 늘어놓고 갔다. 강윤국의 아버지는 바짝 긴장했다. 공장 돌아가는 형편이나 매출 규모를 봐 두었다가 거액을 기부하라는 요구를 할까봐 전전긍긍했다. 가족들에게 책잡힐 일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헌병장교의 행동은 안하무인이 되어갔다. 3일 전에는 안채까지 들어와 사랑을 차지하고 앉았다. 아버지는 강윤국을 불러 술심부름을 시켰다. 다혈질인 강윤국은 배알이 뒤틀리고 열이 치받쳐 오르는 것을 참으며 나갔다. 걷다가 한 가지 묘안을 짜냈다.

강윤국은 술을 사온 뒤 잔심부름을 자처하며 사랑방을 기웃거렸다. 예상했던 대로 헌병은 거나하게 취해서군복 상의까지 벗어놓고 건들거렸다.

“윤국아, 마당에 세숫물 좀 준비하거라.”

강윤국은 이때다 싶어 마당에 세숫물을 떠놓고 수건을 가지런히 두었다. 아버지와 헌병이 마당으로 나가는때를 노려 재빨리 권총을 훔쳐냈다. 술자리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고 헌병은 만취해서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을 나섰다.

헌병은 술기운에 권총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돌아갔지만 다음 날이면 집안이 발칵 뒤집어질 것이 뻔했다. 밤새 안절부절못하고 숨길 곳을 찾다가 두툼한 책 속을 파내서 총을 숨겼다.

다음날 아침 일찍 예상했던 대로 헌병이 찾아왔다. 얼굴이 노랗게 질려 있었다. 아버지를 불러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아버지와 헌병은 방마다 들어가 여기저기 들추며 총을 찾았다. 이불 속까지 뒤졌지만 수북하게 쌓인 책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헌병은 찾아오지 않았다. 술에 잔뜩 취해 권총이 어디서 없어진 줄도 몰랐던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이리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감시가 있을까봐 어제까지 얌전히 집에 있다가 좀 전에 헌책을 내다 판다고 잔뜩 챙겨서 나왔지.”

강윤국은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마쳤다.

“수고했어. 강동지.”

우리는 그의 대담한 행동에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냈다.

이렇게 해서 다이너마이트와 권총 한 자루가 생겼다. 비록 하잘것없어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무기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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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결과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세 사람이 거사에 직접 나서기로 결정하고 다른 동지들은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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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서울)의 번화가 태평로1번지에 자리 잡은 부민관은 말 그대로 경성부민들의 회관이며 당시 경성에서 가장 큰 행사장으로서 각종 어용집회가 열리는 배족의 광장이었다. 해방 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던 지금의 서울시의회 별관이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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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애청의 첫 거사로 아시아분격대회 분쇄를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곧 계획을 짰다. 72시간을 남겨놓고거사 무기로 시한폭탄을 제작하기로 했다.

그즈음 강윤국 동지가 좀 더 안전한 거사준비를 위해 장사동에 하숙방을 구해놓고 있었다. 이른바 비밀아지트였던 셈이다. 우리 셋은 필요한 모든 물품을 그곳으로 옮기고 시한폭탄 제작에 매달렸다. 한데, 비전문가가 사제 시한폭탄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3일이라는 시간도 너무 촉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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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을 손에 들고 시계를 보니 이미 행사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국민복 상의를 손에 둘러 폭탄을 가렸다. 여름이라 그런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장사동에서 태평로까지 내달렸다. 머릿속에는 대회가 끝나기 전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중간줄임)

대회장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헌병들이 촘촘히 서서 대회장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대중을 모두 통제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미어지는 사람들 틈을 헤집고 관중석 한 가운데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이성근이란 자가 사회를 보고 있었다. 이 자는 구한말 순검으로 있다가 일본군이 상륙해 의병들과 전투를 벌일 때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의병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 공로로 경부자리에 올랐다. 이어 독립군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국경지역인 평안북도 경찰국의 고등계 사찰과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독립운동자를 체포, 학살한 인물이다. 민족을 배신한 공적으로 승승장구하다가 <매일신보> 사장 자리에 있을 때 이광수 최남선 등에게 학도병 지원을 적극 지지하는 글을 쓰게 했고, 창씨개명에도 앞장선 친일 앞잡이다.

무대 위는 참으로 군침 도는 자리였다. 한쪽엔 총독, 정무총감, 군사령관 등 침략원흉들이 거드름을 피며 앉아 있고, 다른 쪽엔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괴수들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몇몇 나라에서 온 친일대표들이 앉아 있었다.

‘저 놈들을 한 방에 다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온 폭탄은 손으로 던지는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시한폭탄이라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단상의 인물들에 넋이 나가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차 싶었다.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모두 영문을 모르고 불려온 조선 사람들뿐이었다. 누구를 위한 항일투쟁인데 누구를 죽인단 말인가? 아무리 시간이 급박해도 이럴 수는 없다. 갑자기 닥친 계획이라 시한폭탄 제작에만 분초를 다투었지 현지답사도 못하고 무조건 한복판으로 뛰어든 무모함이 빚은 결과였다.

나는 강윤국과 유만수에게 눈짓을 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눈짓을 주고받으며 대회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박춘금이 등단해서 열변을 토하고 있을 시간을 맞추려고 했는데 다행히 친일괴수는 아직 등단하기 전이었다. 문 옆에 대문짝만하게 붙은 식순을 보니, 놈은 다음 차례였다. 빨리 폭파 장소를 변경해야만 했다.

복도 한 쪽 소파에 앉아 폭탄 설치 장소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우리는 몸이 달아서 주변에 헌병이 오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떠들고 있었다.

“거기서 뭐하는 거야?”

헌병의 호통에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운이 좋았을까, 우리가 아니었다. 헌병은 소파 바로 옆에 붙은 식순을 만지작거리는 아이에게로 달려가 빰을 후려쳤다. 아이는 놀라서 울기 시작했고 부모는 큰 죄를 짓기라도 한 듯 헌병에게 빌었다.

우리는 폭탄을 들고 앉아서 멍하니 헌병을 보고 있었다. 그때 박춘금의 등장을 알리는 마이크 소리가 복도로 흘러나왔다.

‘이때다. 늦으면 안 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셋은 벌떡 일어나 직감적으로 오른 쪽 옆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안쪽에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폭탄 하나는 계단 밑에, 다른 하나는 무대 밑에 설치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가 폭탄을 설치하는 것을 보고 제지하는 이가 없었다. 아마도 행사 관계자가 무대 관리를 하는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폭탄 두 개를 설치하고 우리는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우리는 길 건너 시청 앞에 서서 시계를 보았다. 심지는 3분 후 폭발하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발각되지 않는다면 천지개벽의 굉음을 울릴 것이다. 9시 9분 50초. 초침은 여느 때와 같이 냉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시계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하다 마지막 순간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꽝! … 콰광!”

벼락 치는 듯한 폭음이 연달아 울리면서 길 건너 부민관에서 아비규환의 비명이 터졌다. 화약연기와 먼지가 뿜어져 나오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성공이다! 완벽한 성공이다!’

대회는 쑥대밭이 되었다.

이 거사를 세간에서는 <부민관폭탄사건>이라 부른다.

이 사건은 우리 민족 반세기에 걸친 항일투쟁사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사건이 되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꺾일 줄 모르는 불퇴전의 민족혼, 독립열의를 내외에 과시한 사건이었으며, 잔혹한 일제의 학살음모를 분쇄하여 수많은 민족지사들을 위기에서 구출한 사건이기도 하다.

후일 알려진 바에 의하면, 7월 24일 분격대회는 여러 차례에 나누어 극비리에 민족지사들을 학살하려던 계획의 신호탄이었다. 이미 각 지역 행동대가 짜여져 있었고 명령만 하달되면 학살극을 벌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데 대회가 폭탄세례를 받자 박춘금은 정보가 이미 흘러나간 것이라 판단하고 계획을 포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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