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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시는 ‘코무덤’, 사천시는 ‘耳塚’…통탄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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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옥·김영조

코와 귀가 같은가? 분명 이 두 개의 이름은 다르다. 풍신수길이 정유재란 때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만든 교토 무덤은 분명히 코무덤이다. 이것은 이미 앞서 세편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지난 8월 15일 광복절 64돌 전후의 언론은 모두 귀무덤으로 표현했다. 분명한 코무덤임에도 귀무덤이라 부르면서 아무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재일교포들은 책을 쓰고 학술토론회까지 열었다. 그 열의와 지대한 관심에 고개가 절로 수그러든다. 이분들은 ‘귀무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모임까지 하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모임 이름부터 코무덤이 아니다. 하야시 라잔이 잔인해서 바꾸자 한 귀무덤 이름을 그대로 수용해주고 있으니 진정한 의미에서는 ‘코무덤 모임’은 아닌 것이다.

“현재 사람들이 ‘귀무덤’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따지면 귀무덤이 아니고 코무덤이다. 풍신수길의 명령은 코를 베라는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수길·귀무덤·400년』이란 책 96쪽에서 일본인 학자 나카오 히로시(仲尾宏)교수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잘라 말했다. 그런데 왜 자꾸 귀무덤이라 하는가?

분명히 우리는 보았다. 일본 교토 코무덤 앞에 세워진 교토시의 설명판에 귀무덤(코무덤)   이라고 쓰인 것을 말이다. 일본 안에서의 경과를 보면, ‘코무덤 → 귀무덤 → 귀무덤(코무덤)’이라고 바뀌어온 것이다. 원래는 코무덤이었지만 그것이 너무 야만스럽다며 에도시대(1603년~1867년)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한데서 귀무덤 왜곡이 시작되었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러던 것이 2009년 7월 현재는 교토시 스스로 귀무덤 옆에 코무덤이라고 같이 써주고 있다.  

하지만, 교토 코무덤의 흙을 한 줌 가져다 묻은 사천시 선진리에는 아직도 귀무덤이다. 그것도 한자로 耳塚(이총)이라고만 써놓았다.

사천시 선진리의 이총은 <조명군총:朝明軍塚> 곧 임진왜란 당시 죽은 조선과 명나라 군인의 시신을 묻은 거대한 무덤 옆에 작은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세워놓은 것이다. 이총 표지판에는 그 누구도 주시하지 않을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전리품으로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베어낸 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승전의 표시로 교토 토요쿠니 신사 앞에 묻고 이총(耳塚)이라 칭하였다. 1992년 4월 사천문화원과 삼중스님이 합심하여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을 달래고자 이 총의 흙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 와서 제를 지내고 조명군총 옆에 안치하였다. 2007년 다시 뜻을 모아 사천군청의 후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 안치하고 비를 세워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삼고자 한다.”

표지판이란 그 기념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만일 이 기념비가 한일 간 역사적인 사건과 관계된 것이라면 일본의 시각이 아닌 우리 조선인의 정신과 철학으로 써야 한다.

우선 이 표지판의 왜곡부분을 보자.

1. 풍신수길이 전리품으로 조선인의 귀와 코를 잘랐다.
   →풍신수길은 코만 베라 명했다. 이 명령에 귀는 없다.

2. 승전의 표시로 교토 토요쿠니 신사 앞에 묻고 이총이라 칭했다.
   →에도시대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코무덤은 너무 잔인하다며 귀무덤으로 부르자고 해서 이때부터 이렇게 불리었으므로 초기에는 코무덤이었다.

3. 귀무덤이냐 코무덤이냐는 잔학성의 문제이기에 매우 중요한데도 귀든 코든 무슨 문제냐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표지판의 시각은 현재 한국인이 갖는 한일간의 역사인식 부족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 표지판을 보면 이 글을 왜, 누구를 위해 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안내판은 아래와 같이 바꿔 쓰면 어떨까?

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은 정유재란 때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조선병사뿐만 아니라 부녀자, 갓 태어난 아기까지 가차없이 죽여 그 코를 베게하였다. 그리하여 소금통에 절여 오사카로 보낸 뒤 교토까지는 육로로 베어진 코를 실어 나르며 자신의 전공 (戰功)을 자랑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는 교토시에 커다란 코무덤을 만들어 봉분 위에는 무거운 돌덩어리를 눌러 놓았다. 죄 없는 조선인의 영혼들은 지금도 먼 이역 땅에서 고통스럽게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고 있다. 임진, 정유재란이 끝난 뒤 400여년이 넘었다. 어떻게 하든 이 통한의 코무덤 그 주인공들을 서둘러 귀국하도록 하여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못해 우선 안타까운 마음으로 코무덤의 흙 한 줌을 파다가 이곳에 묻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풍신수길의 잔학성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토 코무덤을 반드시 이곳에 모시고 돌아와야 한다고 믿는다. 그 길만이 풍신수길이 죽어서도 공적을 자랑하려는 저의를 깨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을 위로하는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 영혼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 코무덤 비석은 슬픔의 징표로만 잠시 세워두는 바이다. 삼가 숨진 영령들에게 깊이 가슴 조아리며 처절한 역사의 현장을 우리 후손들에게 보여야 하는 현실이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한다.   2009.8.20

왜곡된 귀무덤 비석에 대해 사천시문화원에 전화로 질문을 해보았다. 하지만, 충분한 설명을 들은 뒤에도 “나는 전임자로부터 이총으로 넘겨받았기에 다른 이름으로 바꿀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실을 확인할 이유도 없으며, 그저 이총이면 된다.”라며 사천문화원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투로 전화를 끊어 나는 더는 할 말을 잃었다.역사의 현장으로 사용하려면 무엇보다도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 명백한 코무덤을 한글도 아닌 ‘耳塚’이라 써 놓으면 이곳을 찾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은 어찌 그 슬픈 뜻을 이해할 것이며 어른인들 그 통한의 역사를 실감할 것이던가!

코무덤에 대한 국내 연구는 일천하다. 가해자인 일본은 많은 논문과 책을 발표하고 있는데 견주어 국내의 코무덤 연구는 없다시피 하다. 국내 학자 중에는 부산외대 김문길 교수가 유일하게 코무덤의 일부를 다룬 책『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를 내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교토시 코무덤을 귀무덤으로 소개하고 있어 아쉽다. 이 무덤은 풍신수길의 잔학성이 드러나는 무덤이며 분명한 코베기 명령이 있고 코영수증만이 나온 현 상황에서 코무덤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리고 일본에는 코무덤이나 귀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무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지만 풍신수길 당시 기록과 문헌에 비춰 볼 때 이런 무덤들의 신빙성에 의심이 가며 이것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 조사가 필요하다. 이런 무덤들은 풍신수길이 베어 오라는 코를 일개 장수가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빼돌려서 묻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믿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 교토 코무덤에는 큰 돌비석이 누르고 있어 조선인의 원혼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또 분명히 귀가 아닌 코를 잘리고도 귀로 둔갑하여 한 번 더 억울한 원혼이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흙 일부를 모셔와 안치하고 비를 세우는 일 그리고 무덤 앞에서 살풀이춤을 추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통한의 원혼이 모두 용서하고 잠들 수는 없을 것이다.

코무덤 왜곡 사실을 밝힌 책『다시 쓰는 임진왜란사』을 쓴 고 조중화 씨와 일본 구석구석을 함께 발로 뛴 그의 부인 하선자 씨는 아직도 귀무덤이라고 부르는 현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남편이 평생을 바쳐 노력한 일이 물거품이 되고 있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는 임진·정유재란 시에 무수히 많은 고통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온 겨레는 엄청난 고통 속에 신음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직전 왜에 조선통신사 부사로 다녀왔던 김성일이 일본에 전쟁준비 사실만 왜곡시키지 않았어도 통한의 전쟁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전쟁 대비를 하지 않은 죄. 그 죄로 말미암아 무고한 양민들이 죽고 목이 잘리고 코를 베이게 된 전쟁의 후유증인 코무덤!

일본인조차도 잔인하니까 완화된 말인 귀무덤으로 부르자는 것을 우리 스스로 완화하다 못해 물러터진 귀무덤으로 부르는 것은 역사에 눈을 감는 행위다. 진실을 왜곡하고자 하는 일본에 힘을 실어 주는 꼴이다.

과거의 굴절 되고 왜곡된 역사를 낱낱이 파헤치고 바로잡지 않은 민족은 역사라는 큰 무대 위에 서지 못하고 뒤안길로 스러질 수밖에 없다. 후손들을 위해서도 교토시 코무덤은 절대 귀무덤으로 불러서는 안 되며 기록과 문헌이 증명하듯 코무덤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 그동안 <통한의 코무덤> 1,2,3,4 편을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어서, 제2부로 이어집니다. 제2부는, 일본 광륭사 미륵상의 비밀을 캔 <일본 국보 1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성형수술하다(1편) –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앞에서 감동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라!>로 시작합니다. 이 글은 연합뉴스 9월 18일자에 그 내용의 일부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참고문헌】
1.『다시쓰는 임진왜란사』조중화,학민사,1996
2.『바로잡은 임진왜란사』조중화, 삶과 꿈,1998
3.『秀吉,耳塚李,四百年』 김홍규, 일본 웅산각, 1998
4.『남원과 정유재란』 최규진, 신영출판사, 1997
5.『간양록,조선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강항, 김찬순 옮김, 2006
6.『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김문길, 혜안 1995
7. 『교토 다이부츠덴 앞의 무덤은 코무덤이요 귀무덤은 아니다』 호시노 박사 논문 <四溟大師와 護國佛敎의 理念>, 四溟大師硏究論叢刊行委員會 [編], 玉蓮禪院, 2000
8.『사명대사와 호국불교의 이념』 玉蓮禪院, 2000
9.『임진왜란 종군기』 케이넨 저, 신용태 역주. 경서원 1997
10.『太閤征韓秘錄』 松本愛重, 成歡社, 1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