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초대석]96세 독립군 김형석 장군
“독립군 잡으러 다니던 사람들 아직도 득세”

중국 인민대회당(우리의 국회에 해당)에서 받은 서호를 들어 보이는 김형석 장군. 그는
“친일행위가 밝혀지면 3대를 멸한 중국과 비교해 우리 사회의 일제 잔재 청산은 정말 형
편없다” 고 비판했다.
“人生如滄海一粟 受盡苦難餘生矣
망망대해에 좁쌀 같은 인생이지만 갖은 고생을 다하고 남은 인생이라
一寸丹心報國 兩行淚爲思親
일편단심 나라를 위하면서도 가족 생각에 눈물로 세월을 보냈네.
一身報國有萬死 雙 向人無再靑
나라를 위해 만 번 죽어도 할말 있나, 백발이 되었으니 다시 젊어질 수 없구나.
人生自古誰無死 留取丹心照汗靑
예부터 누구나 다 죽는다, 영구히 역사에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1912년생, 96세의 독립군은 느리지만 또렷하게 읊조렸다. 유년시절, 식민지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항일전투를 펼치며 살아온 시절, 그 안에서 뿔뿔이 흩어져 여태껏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가족들에 대한 연민이 눈가에 이슬로 맺혔다.
독립군 김형석 장군. 그는 평북 철산(鐵山) 출신으로, 1918년 독립운동에 뜻을 둔 부친을 따라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이주해 봉천성 허용현에서 독립군이 창설한 학교에 다니다가 일본군의 만주 침공을 피해 중국 각지를 전전했다.
“1919년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어 생계를 위해 중국인 집에 저관(猪管, 돼지몰이)으로 들어갈 정도로 어려운 유년시절이었다”는 김 장군은 이후 중국 장개석 휘하의 국부군에서 고급장교로 복무하면서 항일투쟁과 독립군을 지원하였으며 국부군에서 한국인 고 김홍일 장군에 이어 두 번째로 장군에 진급했다. 1944년 대령으로 강소성 제3전구 사령관으로 있을 때는 독립군 제15지 대장을 겸임하면서 독립군을 적극 지원했다.
“가족과 헤어진 후 동전열에서 왜군과 싸우다 이범석 장군, 김창환, 황학수 선배님들과 만나 독립군에 참가했다”는 그는 “1933년 4월 대전자 작전에서 일본군 제72연대를 전멸시키는 과정에서 적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음은 물론 수류탄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며 항일전쟁 당시를 떠올렸다.
1936년 김 장군은 산서대학 법정계를 졸업하고 강소성 보안제6종대 독립제1지대 제4대대 소령대대장으로 임명되어 소원을 풀다시피 ‘赴湯蹈火(부탕도화) 催堅折銳(최견절예) 催鋒陷陣(최봉함진)-위험을 무릅쓰고, 적들의 사기를 격퇴시키며 적 진영을 유린’하였다. 한 번은 중국 농민들이 정보를 제공하여 적군을 산골짜기에 몰아넣고 포위하여 일개소대를 전멸시킨 적도 있다고 밝혔다.
중국 국부군 복무 중 장군 진급
일생을 통한 김 장군의 항일전쟁과 조국독립운동이 단지 무력투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해외 동포들의 송금길이 막혀 임시정부가 막대한 경제난을 당했을 때, 그는 장개석 정부의 통계국장이자 임시정부의 연락 담당자인 주가화에게 말하여 당시 중국도 경제가 곤란할 때인데 경비 500만과 주택비 등 400만, 모두 900만 법폐를 임시정부에 지급케 했다.
또 대한민국 독립의 중요한 분수령이 된 카이로회담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당시 김 장군은 장개석의 오른팔로서 정치를 장악하고 있던 진립부를 통해 대한민국 독립의 당위성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는 장개석의 입을 통해 루스벨트 등 다른 국가의 원수들에게도 전파됐다는 것이다.
부하가 공을 세워 자기를 추월하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장개석 총통이 당시 중공군에 대항해 해남도를 지키려고 분투하던 여한모 장군을 ‘반역’으로 몰아세운 일과, 카이로회담 때 준비 부족으로 “오키나와를 가져가는 것이 어떠냐?”는 루스벨트의 권유를 장개석 총통이 흘려보낸 일도 그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다.
1949년에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어 홍콩으로 망명했다가 1950년에야 그리운 조국 땅을 다시 밟게 된 김 장군. “당시의 벅찬 감동은 망국노의 처지가 되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할 것”이라는 그는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서울의 모습은 6·25전쟁 탓에 파괴와 잔해 등으로 참혹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며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써온 사람으로 볼 때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지고 비통하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김 장군은 태국의 국회의원으로 있는 아난 장군과 협력하여 태국의 우표와 수입인지 등을 한국조폐공사에서 수주하도록 했고, 말레이시아 박람회에 한국을 참가시키는 등 무역업에 종사했다.

2005년 중국에서 열린 ‘항일전쟁승리60주년 기념식’ 에서 김 장군은 한국인으로서는 유
일하게 ‘중국항전탁월공헌장군’ 으로 선정되어 자신의 이름과 손도장을 남겼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그는 4급 수훈자다.
“독립유공 훈급 올려달라” 청원
2005년 8월 15일, 김 장군은 중국에 다녀왔다. 중국 정부가 항일전쟁의 시발점인 흑룡강성 제제합이시에 화평광장을 건립하고 ‘항일전쟁승리60주년기념식’을 거행하면서 김 장군을 초청한 것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중국 최초의 항일투사인 마점산 장군의 동상을 건립하고 둘레에 항일전쟁 장면과 항일전쟁 유공자들의 손바닥 도장을 새겨넣었다. 이 자리에 김 장군은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중국항전탁월공헌장군’으로 선정되어 자신의 이름과 손도장을 남겼다.
“본인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반대로 국민당 소속으로서 서로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이지만 오로지 일본과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영웅 칭호를 받았다”는 김 장군은 “중국에 비해서 조국 대한민국의 평가는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억울한 생각이 들어 지난 7월 10일 훈급을 1급으로 올려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현재 그는 대한민국 독립유공 4급 수훈자(애국장). 공훈록을 보면 1급인 대한민국장에 김구 선생, 김좌진 장군, 윤봉길·안창호·안중근 의사와 이승만 전 대통령 외에 장개석, 송미령, 손문 등 3명의 중국인이 우리의 독립을 지원했다 하여 이름이 올라 있다. 2급 대통령장에도 신돌석 의병장, 이범석 장군, 여운형·이봉창·신채호 선생 등과 당계요, 우빈 추기경 등 8명의 중국인이 등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김 장군은 “1969년도 유공 심사 때 홍콩에 살고 있어서 충분한 자료를 제출하지 못했고 따라
서 본인의 소견도 피력할 기회가 없었다”고 밝혔다. 심사 당시 “김형석은 중국 군대에 있었으니 심사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심사위원 전원이 “김형석을 제외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며 심사를 진행했다고. “한국 광복군도 중국 군사위원회 소속인 사실을 모르던 몰상식한 사람”이라고 지적한 김 장군은 “오히려 중국군에 있었기 때문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며, 애초에 중국군에 몸을 담은 것도 그 이유”라고 강조했다.
광복 후 60여 년을 지내오면서 수차례 독립유공자 심사를 바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 거론하지 않은 김형석 장군. 그가 이번 기회에 강력하게 1급 수훈을 청원하는 것은 내일을 알 수 없는 건강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지병인 관절염으로 3개월여를 병석에 누워 있다 보니 가만히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 같은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만주국 괴뢰정권 장교들이 대통령부터 군 원수까지 해먹고, 그의 자식이며 일가들이 아직도 권력의 최상부에 있는데 과연 이게 독립국이냐”며 목소리를 높인 그는 “현재 몇 명 남지 않은 항일독립운동의 산 증인으로서 일제의 잔혹한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열사들의 발자취를 밝히는 책 ‘항일전쟁’을 집필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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