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1일부터 3박 4일 동안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 이희자 선생과 함께 강인창 어르신(강제동원피해자: 86세, 오키나와전 당시 조선인 군부(軍夫))을 모시고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작년 이맘때도 2박 3일간 여정으로 강인창 어르신의 통역을 맡은 적이 있으니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작년보다는 일정에 약간 여유가 있어 작년에 가지 못한 곳도 두루 둘러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구면인 여러분들과 1년 만에 재회의 기쁨도 나누었으며 새로 만난 분들과 친교도 다질 수 있었다.
1945년 6월의 오키나와전은 태평양전쟁 기간 벌어진 가장 처절한 전투 중 하나일 것이다. 방어하는 입장이었던 일본군, 상륙작전을 벌인 미군, 전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주민들이 총 25만 여명이나 죽음을 당했으니 오키나와는 전쟁의 참상을 증언해 주는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오키나와는 오랫동안 류큐(琉球)라는 독립국으로 존속하였으며, 17세기 초에 가고시마(鹿?島)의 영주에게 복속되었고, 명치유신 이후에 본격적으로 일본에 편입된 곳이다. 언어, 풍습, 사람들의 이름과 생김새 등이 일본 본토와는 상이하였으며 지금도 다소의 차이가 있다. 물론 고유 언어를 쓰는 사람은 이제 없는 것 같지만…
강인창 어르신은 바로 이 오키나와전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분이다. 경상북도에서 약 3,000명이 오키나와에 끌려 와서 일본군의 명령으로 군량미나 실탄 같은 장비를 배에서 내려 동굴로 옮기는 노역에 종사했고, 이 분들 중 1,2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작년 6월 강인창 어르신은 자신이 어떻게 오키나와로 끌려왔는지, 전쟁 당시 어떻게 살아남아 일본군의 감시를 뚫고 항복하여 미군 포로 생활을 했는지 약 두 시간 동안 증언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작년은 강인창 어르신의 오랜 소망이 한 가지 실현된 해이기도 하다. 내가 오키나와에 가기 약 한 달 전인 2006년 5월, 오키나와의 요미탄이라는 곳에 ‘한(恨)의 비’가 건립된 것이다. 1997년 7월, 오키나와를 방문한 강인창, 이희자 선생님은 오키나와에서 전쟁에 희생된 조선인 군부들의 한을 풀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오키나와전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 건립 운동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오키나와를 비롯하여 일본 전역에서 모금이 이루어져 우선, 1999년 8월, 강인창 어르신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양에 추모비를 세움으로써 첫 결실을 맺었다. 이렇게 건립을 서두른 것은 강인창 어르신이 뇌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다들 어르신이 돌아가실 것을 걱정해서였다. 다음으로 오키나와에도 비를 세우려 했지만 비용, 토지 구입 등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운동 시작 9년 만에, ‘한의 비 건립추진위원회’는 오키나와에 한의 비를 세우는 어려운 목표를 달성하고야 말았다. 추모비의 이름에는 ‘한’이라는, 일본어에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말이 들어갔다.
한의 비 건립을 추진한 오키나와의 핵심 멤버들은 일찍부터 야스쿠니 위헌 소송, 평화운동, 오키나와 문화 보존 등의 활동을 해왔다. 그런데도 이 분들 말씀에 따르면 한의 비 건립과 강인창 어르신의 증언을 듣는 일은 자신들에게도 ‘성장’의 기회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역사의 피해자로 자신들을 생각해 왔는데, 과연 식민지에서 끌려온 조선인들에게, 혹은 중국인 등 다른 아시아 사람들에게 스스로과연 어떤 존재였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의 비 건립 1주년은 정확하게 말하면 올해 5월이다. 그러나 6월 23일이 오키나와에서는 공휴일인 ‘위령의 날’로 지정되어 모든 현민들이 오키나와전 희생자들을 추도하기 때문에 ‘한의 비 건립 1주년 추도회’도 이 시기에 맞추었고, 강인창, 이희자 선생이 여기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첫날인 21일, 우리는 나하 공항에 내린 뒤 잠시 휴식하고, 오키나와 현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강인창 어르신과 이희자 선생은 일제의 식민 통치와 전쟁의 피해자로서 일본 정부에 대해 격정적으로 항의의 말씀을 토해냈다. 그 다음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
요즘 현안이 되고 있는 ‘집단 자결’에 관한 질문도 있었다.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 상륙과 공습 당시 동굴에서 집단으로 죽어간 것을 일본의 교과서에서는 ‘자결’이라고 설명하였는데, 그러한 죽음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군의 선전과 직간접적인 강요에 있었다는 문제 제기였다. 일본 내의 차별받는 이방인으로서 오키나와인들의 역사왜곡에 대한 분노가 읽혀졌다.
둘째 날, 나는 <한겨레21> 기자와 또 한명의 일본인 기자와 함께 그러한 집단사가 일어난 요미탄의 치비치리 동굴을 견학했다. 1945년 4월, 남녀노소 약 80여명의 주민들이 사망한 곳이다. 사망자의 이름과 나이가 적힌 석비에서 한 살, 네 살짜리들을 보면서 가슴이 저려왔다. |
자고 역설하셨다.
다음 날인 23일은 위령의 날로 아베 총리가 참가하는 정부 차원의 집회에서부터 각종 평화집회까지 다양한 집회들이 평화공원 안에서 열렸다. 우리 일행이 참가한 집회는 <6.23국제반전오키나와집회>였다. 주최측의 타와라 목사는 개회사에서 우리를 청중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전날 타와라 목사 부인으로부터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해상행동에 대해 말씀을 들었다. 바로 그 ‘카누대(카누隊)’, 즉 카누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밤낮으로 해상기지 건설 저지 투쟁을 벌이는 분들도 집회에서 만날 수 있었다. 타와라 목사 부인은 73세인데도 직접 바다에 들어가 어떤 때는 물에 빠지기도 하면서 저지 행동을 하고 자녀들도 공동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수영 못 하는 사람은 수영도 배우고, 노 젓는 법도 배우고, 난폭한 군경들의 진압으로 물속에서 기절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해상구조에 관한 자격증을 따기도 한다. 목사님 부인은 “이것을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키나와의 기지에서 출격하는 미군 폭격기들이 이라크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상황에서, 더 이상 기지를 건설하는 것은 절대로 싫으니까’ 행동하는 것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들의 행동 원칙은 철저하게 ‘비폭력 평화’이다.
물론 오키나와에 이러한 미군기지 반대 운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일행을 위해 3박4일간 운전사 역할을 했던 호탕한 아줌마, 무라야마씨는 자신도 노인복지사로 일하면서 기지 반대 행동에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일터와 생활공간에서 주민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활동에 중점을 둔다고 했다. 또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만난 재일동포, 김현옥 선생님은 35년 전 오키나와에 온 이래 배봉기 할머니 등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등의 운동을 해왔다고 한다. 우연히 평화집회에서 만난 후쿠오카에서 온 30대 초반의 일본인 여성은 ‘안녕사요나라’ 상영회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이희자 선생을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번 오키나와 방문은 강인창 어르신의 악화된 건강 때문에 자칫 성사되지 못할 뻔 했다. 그러나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담배도 끊고 멀리 영양에서 서울에 오셔서 생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이번 행사를 함께 해 주신 그분께 경의를 표한다. 강인창 어르신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실 때는 놀라운 힘을 내신다. 우리 일행을 위해 애써준 오키나와 분들에게도 감사하고,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하나로 모여 앞으로의 활동에 힘을 싣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사는 곳은 다르지만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곳이면 걸어가는 길들은 언젠가는 합쳐지게 되리라는 신념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