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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학신문 이성진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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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교육 위한 자료집·박물관 건립 등 강력 추진 최근 한 언론사에서 시민단체를 총망라한 적이 있었다. 100여개를 넘는 시민단체 목록 중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포함되지 않았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를 두고 전문 학술기관으로 분류하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시민단체도 아니고 전문 학술단체도 아니라면 민족문제연구소는 어느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일본 동경 민족문제연구소 지부의 한 회원은 말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두 바퀴로 굴러가는 자전거와 같습니다. 전문가라는 앞바퀴와 대중회원이라는 뒷바퀴가 함께 불가분의 관계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연구소는 40명의 전문연구자들과 5000명의 대중회원을 확보. 시민운동으로서의 면모와 전문 학술기관으로서의 연구실적을 달성하기도 한다.
전문가와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시민단체와 전문학술단체의 성격이 통일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고 하는데… 국내외 20여개의 지부를 두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문제전문연구기관의 성격을 다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가장 잘 알려진 사업은 친일인명사전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 국권침탈과 강압적 식민통치, 반인류적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인물의 행적을 조사하고 정리함으로써 역사를 공정하게 기록하고 평가하는데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엄정한 반성을 통해서만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될 것이며, 나아가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과 평화의 미래를 위한 기반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며 말했다. 친일인명사전이 당사자와 그 후손들의 인권침해와 프라이버시 문제가 될 거라는 지적에 “친일인명사전은 비난을 위한 살생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먼저 반성하고 화해와 단결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라며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연구소의 취지를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제작과 더불어 일제협력단체와 조선총독부기구도 함께 정리하고 있다. 또한, 일제에 의한 징병, 징용,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에도 앞장서고 있으며, 국제적인 연대활동으로는 안티야스쿠니참배운동을 전개.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민족문제연구소의 사업은 진행중이다. 연구소는 2001년 일제침략역사왜곡전을 시작으로 매년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친일음악과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전 등 기획전시를 개최해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친일인사들의 활동상을 생생히 알려나가고 있다. 특히 일제 침략 역사 왜곡전은 북한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여, 민간연구소로는 최초로 평양을 비롯한 북한 주요도시에서 순회 전시를 개최하였고, 전시 패널을 북한에 영구 기증하였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요즘 너무나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10년까지 후세교육을 위한 자료집과 박물관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터무니없는 일본의 식민지 미화론, 이러한 내용이 그대로 역사왜곡이 되어 교과서로 제작되어 일본학생들이 배우고, 역사왜곡이 반복되는 우려되는 상황 속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전문가들은 손을 걷고 나섰다. 국내의 학술단체와 전문가들의 도움 아래 일본의 식민지 연구보고서를 만들어, 일본제국주의의 실상을 밝히고 진실을 알려서 많은 시민단체와 학계에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박물관 건립은 식민지지배하에 민중의 생활을 보여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엿볼 수 있는 기념관은 많지만 일제치하 아래 고달팠던 민중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은 거의 없는 상태.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의 식민지 연구자료집과 더불어 박물관 건립을 2010년에 함께 마무리하려고 한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많은 연구소와 시민단체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는데, 민족연구소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외환위기 당시 1000명이 넘는 회원 수를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회원이 증가하는 추세 속에서 1998년 8월 회원 수가 200명선으로 급감한 것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불씨가 다시 살아난 것은 1999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대해 수사회가 1만인지지 선언을 발표하였고, 동시에 김활란 상 제정저지운동, 독도수호운동 등을 펼치면서 조직의 활기를 되찼았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3년과 1994년 연이어 출간한 ‘친일파 99인’과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면서였다. 이때 국내 모 재벌은 설립자가 친일기업인 편에 실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고위직 임원을 연구소로 보내 백지수표를 제시하며 원고삭제를 요청했지만 연구소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닛폰 스타일이다. 일본애니메이션이다 하면서 어느샌가 일본문화는 대한민국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겨울연가는 일본 내에 최고의 인기를 기록하면서 한류열풍의 주역이 되기도 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 한일간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한 지금. 대학생들이 일본문화를 바라보는 바람직한 시각에 대해서 조언을 구하자 박한용 연구실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미꽃도 있고 개나리도 있고. 국화도 있고. 여러 가지 꽃이 있어야 꽃밭이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장미만 있거나 국화만 있다면 그건 꽃밭이 아니라 재배단지가 되겠죠.”라고 말한다. 일방적인 문화소통이 아니라 타국의 문화와 교류하면서 글로벌시대에 자랑스런 한국문화를 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박한용 연구실장의 목소리가 힘차 보였다. 고 임종국선생의 뜻에 의해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 이제 민족문제연구소는 수많은 매스미디어와 시민들이 주목하는 단체가 되었다. 경제적 정치적 어려움을 딛고 끝없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위해 노력하는 그들. 민족문제연구소의 미래를 밝게 점쳐본다.<전교학신문, 07.0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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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주의 실상 알려 역사왜곡 막는다
By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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