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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노동자 항일의식 고취 운동 매진-부산일보(0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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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노동자 항일의식 고취 운동 매진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절며 불우한 삶 살아
26일 별세 애국지사 이광우 선생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10개월이나 당했던 애국지사 이광우 선생이 26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부산에서 태어난 이씨는 17세 때인 1942년 5월 경남토목건축협회에 근무하던 중 부산진 공립보통학교 6학년 동창생인 여경수씨 등 5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친우회를 조직했다. 일제가 중일전쟁,태평양전쟁 등을 도발하면서 강제 공출,징용 등으로 한국인을 극악하게 탄압하고 있던 때였다.

친우회 총책을 맡은 이씨는 일본군 군수품 제조공장인 부산 범일동 소재 조선방직주식회사(일명 조방)를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일제 군사요지 시설 파괴와 군자금 모집도 계획했다.

친우회는 조방 근로자들을 선동하기 위해 “일본은 망한다. 조선독립만세””우리가 일제에 핍박받고 있을 수 있느냐”는 내용의 항일 전단 200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방직 기숙사와 부산진시장 노점,부관연락선 부두 등지에 뿌리며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던 중 이듬해인 1943년 3월 그를 비롯한 친우회 동지들이 친일 경찰에 체포됐고 고춧가루고문,전기고문 등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 검찰에 회부됐다. 이 과정에서 여씨는 순국했다.

이씨는 1945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광복이 되면서 출옥했다. 이씨는 당대 최고의 고문기술자였던 경남경찰부 고등과 외사주임 하판락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됐다. 석방 후 불편한 몸으로 건설업을 하다 1970년대 몰아닥친 ‘오일파동’을 견디지 못해 사업을 접었고 고문 후유증까지 도져 이씨는 50대 이후 30여년간 어려운 생활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씨의 항일 독립운동 사실은 재판 기록이 소실돼 40년 가까이 인정을 받지 못했다. 차남 상국(47·대우조선 해양㈜근무)씨의 오랜 노력 끝에 친일 고문경찰 하판락을 찾아내 자백을 받아냄으로써 이씨는 지난 2000년 8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됐다(본보 2000년 8월14일자 25면 보도).

상국씨는 “선친은 오랜 세월 동안 독립운동의 행적을 국가가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국가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나섰던 것뿐 대가를 바란 일이 아니었다”며 단 한번도 불평하신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지난 2002년 넘어지면서 왼쪽 다리 골절상을 입은 후 걸을 수 없게 돼 지난 4년여 동안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며 투병 생활을 했다. 상국씨는 “아버지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독도 문제에 가장 관심이 많으셨고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며 늘 안타까워 하셨다”고 전했다.

빈소 부산보훈병원 장례식장 203호. 발인 28일 오전 6시. 장지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 유족으로는 부인 함시복(81) 여사와 2남 4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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