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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항일지사 박태서 옹 “내가 내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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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생활뉴스 권석렬 기자


 


일본 강점시대에 풍찬노숙하며 항일운동을 줄기차게 했으면서도  보훈처에 등록을 사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박태서(83, 朴台緖) 옹이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았던  후배와 유지(有志) 들이  그러한 안타까운 사정을 알고 박 옹의 고향마을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가묘와 기사비를  세웠고 본인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보훈청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다. 비록 입증자료  부족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3.1절을  앞둔 이 시점에서 민족과 국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있어 주위의 감동을 주고 있다.










 기사비가 있는 곳은  경북 영주시 문수면 권선리  일명 고랑골이다.  영주시 적서동 노벨리스코리아 앞에서 문수 쪽으로 강둑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문수면 권선리라는 입석 이정표가  크게 서있다. 그길로 농공단지 터  닦아둔 곳을 돌아 고랑골 표지가 있는  길로 조금 들어가면 권선리 박 옹의 선조들이  대대로 살았던 마을, 전성기  때는 90여 호 가까이 살았지만 지금은 쇄락해  20여  호  정도  살아가는  마을이 200년 된 큰 느티나무와 함께 나타난다. 마을에 들어서면서 오른쪽 비탈진 언덕에박태서 옹의 가묘가 있다.


▲ 박태서 옹 내외



“항일민주지사춘고박태서의기사비(抗日民主志士春高朴台緖의紀事碑)”라고  적혀있다.  독립유공자 박태서의 가묘는  1998년 유도회 경상북도본부회장  서병극(徐丙極,작고),  권오걸(權五杰),  김한중(金漢中), 김동인(金東仁), 백기팔(白基八),  홍종호(洪鍾鎬),  유호규(柳灝珪), 정흥주(鄭興周), 임위우(林違佑), 허발(許潑), 김제안(金濟安), 홍신유(洪信裕),  장남진(張南鎭), 박일서(朴逸緖) 등 친구 또는 유지들이 힘을 합쳐 세운 것이다.


 









또 2006년 4월에는 윤주갑, 박대양, 김원영, 박대서, 김동인, 권연환, 장인덕씨 등 후배 또는 마을주민 7명은  안동보훈청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였으나 증거자료 부족으로 인정되지는 못했다.

안동농림 2년 후배로 영주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윤주갑(81, 尹柱甲)옹은  “일제  침략말기인 1940년대 유일한 항일지사 박태서 본인이 유공신청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항일운동자의 불명예로 생각하고 50년간이나 신청을 거부하는데 대하여 한스럽게 생각하고 동문으로서  어렵게 자료를 모아 신청서를  제출



   ▲ 박태서 옹 기사비


했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 신청이유에 대해서 윤 옹은 “1940년대  처절한 국내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총독부는 전시체제총비상동원령을 선포하니 대표적인 반일조직체였던 조선인문인협회가 이광수(李光洙), 최남선(崔南善), 방인근(方仁根) 등의  친일 그룹과 이기영(李箕永),  박태준(朴泰俊),  심훈(沈勳), 황달주(黃達周) 등의 민족파로 양분되고, 국내에서는  항일운동이 잠복하고 친일파는 학도지원병의 권유와 전쟁완수에 협력할 그 때에  일본기관원 및 친일파들과  정면충돌하면서 민족성을 고무 앙양한 유일한 최후의 연소한 국내의 활동가였다.  이 사실이 항일역사의  이면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로 우리사회의 진실성과 정의감의 상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고 만시지탄이 있으나 신청서를 제출 했다”고 했다.

박 옹은 1924년 영주시 문수면 권선리에서 태어났다.

1938년 당시 5년제인 안동농림학교에 입학해서 졸업을  4개월 남겨두고 퇴학당했다.  1940년 9월(3학년 2학기)에 하곡공출을 강력 독려하는  일본인 주재소장 지하(池下)가 마을 노인 2명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시비가 붙어서 학교 일본인 담임교사 미원(梶原)에게 무수히 두둘겨 맞았는데 이때에 앞니가 1개 부러졌고 무기정학을 당했다. 박 옹의 항일 저항의식은 이때부터 나타나고 있다.

민족파로 양분되어 있을 때  민족파인 심훈 등과 서적과 서신으로 연락하고 학교에 국화인 무궁화를 재배했다는 것이 사건이 되어 졸업을 4개월 남겨두고 42년 9월에 퇴학을 당했다.

또 43년 3월에는 문수초등학교에서 일본인 교장이 문맹화교육을 한다고 논박을 하다가 불온청년이라는명목으로 징용장을 받아 북해도로 끌려가기 직전 탈출하여 중국 빈강성 아성현 옥천으로 피신했다.  귀국한 이후에도 44년에는 면내 유지였던 박윤서(朴允緖), 박상현(朴相鉉), 지수룡(池秀龍), 민정식(閔正植),  전응명(全應明)씨 등과 문수면장 김태현(金台鉉)과  주재소장 지하(池下)의 파면운동을 추진하다가 유지들은 체포되고, 박 옹은 2차 중국으로 피신했다.  중국 빈강성에서도  교포가 운영하는 초등학교에 강사로 채용되어 한글과 국사를 가르치며 애국심을 함양했다.


 









45년 1월에는 귀국하다가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 뒤로 신체가  극도로 허약해서 폐병요양이란 이유로 석방되었으나  요주의 시찰인 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등의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마을 종손인 박시우(76)씨는  “당시 어린 박태서 씨는 일본인을 논두렁에 처박기도 하고 참 대담하게  싸웠지요. 그래서  모진 고난의 세월을 살았고요”라는 말로 박 옹의 지난날을 회상했다.

해방된 후에는  안동초등학교, 단산초등학교 등에서  교사생활도 하고 농업 에 종사했다. 또 유도회영주지부부회장(儒道會榮州支部副會長), 도본부부회장,  소수서원의  집례(執禮) 축헌관(祝獻官), 성균관전의(成均館典儀) 등을 역임했다.

 후손이 없는 박태서 옹 (83)은 현재 영주시 가흥동 7평짜리 주공임대아파트에 부인 권옥련(77)씨와  함께 살고 있다. 부인 권씨는 재생불량성빈혈과 당뇨, 류마치스 관절염 등을 20년째 앓고 있다. 박 옹은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시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살고 있다.



  ▲ 박태서 옹 기사비


 


박 옹은 “내가 내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인데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는가”라면서 드러내기를 사양했다. 박 옹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말의 논리가 정연하고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기자는 느꼈다. 젊은 날의 그 의기를 짐작하게 했다. 평생을 이미 다 살아버린 이 분에게 국가 유공자로 인정을 받는  것이 무슨 도움이 얼마나 되겠는가마는 우리의 후세와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 공을 인정하고 존경하고 물질적으로 좀 편히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으로 보인다.


 


참고 : 영주생활뉴스 160호(2007.2.21) 1면기사
영주생활뉴스는 매월 2째, 4째 주 수요일 월 2회 매호 8000부 영주 봉화지역으로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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