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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7, 조선어 3의 비율로 전파를 발사하지만 바로 전날 창립한 신간회 소식은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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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만주사변 이후 대륙을 침략한 일제가 1932년 3월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국가를 세운 바로 그 무렵 경성방송국은 조선방송협회로 이름을 바꿔 이전 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식민 지배를 대변하는 방송을 내보낸다. 제1방송은 일본어로 제2방송은 조선어로 방송했지만 제2방송의 설치 목적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심전개발(心田開發-‘마음의 밭’을 개발한다는 뜻으로 즉 피지배 민족으로서의 저항의식을 약화시키고 황민으로서의 마음을 단련해야 한다는 일제의 동화정책의 하나)’, ‘농촌진흥’, ‘부녀교육’ 등 이른 바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 | |||||||
| 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조선방송협회에 전시 특별편성을 지시하여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제2방송에서는 연일 내선일체 강화를 강조하게 되는데 이 때의 임원을 살펴보면 상임이사에는 한상룡, 김연수 등이 상임감사에는 조병상, 김성수, 민대식 등이 그리고 편성과에는 촉탁으로 모윤숙 등이 참여하는 등 당시 유력한 친일인사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1940년 전쟁에 광분한 일제는 물자절약과 불리한 전황보도 금지 차원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하였고, 1942년에는 4월 27일에는 방송전파관제를 실시하여 조선어 제2방송을 중단하기에 이르고 같은 해 12월 27일 조 선방송협회의 조선인 직원들이 VOA(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청취 혐의로 체포되는 V | ||||||
OA단파수신사건이 일어나 조선인 아나운서와 기술자, 라디오 상인 등 150명이 체포되고 이 가운데 10명이 실형을 선고받는다. 이처럼 철저히 일제의 식민지배에 최첨단에 선 조선방송협회의 그림자는 드디어 1947년 9월 3일 한국이 미국 애틀란타시티에서 개최된 국제무선통신회의(ITU)에서 ‘HL’이라는 국가 고유 호출 부호를 할당받음으로 써 사라지는 듯 하였다. 하지만 경성방송국-조선방송협회로 이어지는 식민의 그림자는 여전히 한국방송의 효시로 상전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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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해 해방 후 1948년 국영방송인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재출범했다. 1961년 TV 방송을 시작했으며 1973년 한국방송공사로 공영방송 체제를 갖춰 오늘에 이르고 있다.” (KBS 누리집 중에서) 그런데 이러한 일제 식민지의 그림자는 KBS 뿐 아니라 MBC SBS EBS CBS 등 주요 방송사들의 모임인 한국방송협회에서도 목격된다. 1927년을 연원으로 삼아 한국방송 80년 행사를 준비 중인 한국방송협회는 매년 9월 3일을 방송의 날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도는 1927년을 따르고 월, 일은 1947년 9월 3일에서 따온 것이다. 어정쩡한 타협이 왠지 개운치 않다. 1977년 한국방송 50주년을 주창한 이래 무비판적으로 흘러온 방송계의 역사 찾기를 이번만큼은 제대로 바로 잡았으면 한다. 현재 주요 방송사 사장을 비롯한 대다수 경영진들이야말로 방송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한국근현대사의 오랜 금기영역이었던 친일과 과거사 문제에 정면으로 맞선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기술로서의 방송의 역사는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올해를 ‘방송 80년, 한국방송 60년’으로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삼아주길 희망하며 나아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념할 것인지 반성하고 성찰하는 해로 우리 방송사에 기록되길 바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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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80년’에 남아 있는 식민의 그림자
By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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