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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합사 철폐소송 일본측 지원단 연구소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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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지난 1월 13일 야스쿠니신사 무단합사철폐 소송(이하 야스쿠니소송)과  관련하여 우치다 마사토시 변호사와 재판지원회의 미소노 코지씨와 야마모토 나오요시씨가 방한했다. 이번 방한은 야스쿠니소송을 위한 사전준비 차원에서 한국측 사무국과의 협의를 진행하고 원고들과 면담을 가지기 위해 이뤄졌다.
 








사무국에서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공동대표와  김은식 사무국장, 민연수 간사  그리고 원고 7명이 참석하였고, 연구실에서는 동선희  연구원이 참석하여 통역을 맡았다. 그 외에도 장완익  공동대표, 김승교 연구소 고문 변호사와  동화작가로  활동하며 작년 8년 촛불공동행동에도 참가했던  김바다 씨가 참석했다.

20여명이 참석한 이날 교류회에서는 이희자 보추협 공동대표가 단체를 대표하여 환영인사를 하였고, 원고를
선정하는 데 있어서 지역별, 유형별 등 여러 가지가 고


려되었음을 일본측에 설명하였다.

야스쿠니소송  담당  변호사 중  한명인 우치다 변호사는 “야스쿠니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며, “일본  젊은 사람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면  야스쿠니가  뭔가 문제가 있긴 한데, 외국에서 항의할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강제연행과야스쿠니 관련한 문제에 대한 소송은 처음인 만큼 그동안 피해자들이 축척해왔던 성과들을  참고해서  이 소송을 준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같이 방한한 재판지원회의 야마모토씨는“야스쿠니문제는  전후보상과는  달리 앞으로  미래세대를 위한 운동이기에 야스쿠니소송이라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번 소송을 지원하게 될 지원회 이름을 소송의 취지를 살려 ‘NO! 합사!’로 정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날 참석한 원고들 중에는  피해자 임복순씨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하며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죽기 전에 남편의 이름을 삭제할 수 있도록 애써달라며  일본 소송지원단에  간곡히 부탁했다.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한  소송은 오는 2월 26일 동경지방 재판소에  제소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으



며,   28일에는  한국에서 재판소송에 대한 보고회와 소송비용 마련을 위한 후원행사를 열 예정이다.(정리: 민연수 간사)


 


 


 


 야스쿠니 원고들과의 만남 – 인터뷰 후기(동선희 선임연구원)


 


  지난 2007년 1월 13일과 14일에 야스쿠니(靖) 원고 지원단 방한 때 원고들(총 10명) 가운데 다섯 분의 인터뷰 통역을 맡았다.

  방한한 분들은 동경 야스쿠니재판지원회의 우치다(변호사), 미소노, 야마모토 씨 등이었다. 나는 13일에 임복순 할머니(85세), 14일에 나경님(65세), 임소운(65세), 윤옥중(67세), 김기호(65세) 씨의 인터뷰를 통역했다.

1. 임복순 할머니 인터뷰는 지난 13일에 있었다.

  할머니는 목소리가 크고 표정이 풍부하셨다. 부평에서 아들 내외와 함께 사는데 며느리가 딸처럼 잘 한다고 자랑이셨고, 오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날 땐 힘들어도 부축해 주는 걸 거부하고 혼자 일어나야 한다고 하셨다.

  할머니 남편은 1944년 두 살배기 아들과 할머니를 놔두고 전쟁터에 끌려간 채로 돌아오지 않았고, 40여년이 지난 뒤에 야스쿠니에 합사된 걸 알게 됐다.

  “그 사람 지금 살아 있다 해도 얼굴도 못 알아볼 거예요. 세월이 그리 지났으니…”

  “내가 죽기 전에 소원이요. 영혼이라도 (야스쿠니에서) 돌려달라고… 이렇게 멀리서 도와주려 오셨으니 얼마나 고마워.”

  “난 딸도 없고 아들 하나밖에 없으니 좋은 사람 보면 아들 같고, 동생 같아… 힘들어도 남편 빼내 올 때까지 살아 있어야지.”

  그리고 할머니는 두 손을 머리에 올려 하트 모양을 하고 ‘사랑해요’ 하면서 웃으셨다.

  너무 귀여운(?) 모습에 영상팀, 지원회 사람들 모두 웃음보를 터뜨렸다. 똑같은 제스쳐를 하면서… 앞으로도 절대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평생 행상 등 장사를 하셨고, 편찮으셔도 아들 내외에게 병원 가잔 말도 잘 못한다면서도 웃는 얼굴이시다. 할머니 필생의 소원이 풀리시길 바란다. 건강하세요.   


2. 나경님 어머니는 멀리 광주에서 와서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집에서 주무시고 다음날 오셨다. 먼 길을 가셔야 하니까 14일 아침 제일 먼저 인터뷰를 했다.

  나경님 님은 태어난 지 불과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아버님이 군대에 끌려가셨다. 전남 장성군에서 대가족을 이룬 유복한 집안이었는데,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아버지는 나경님 님의 언니(당시 4세), 젊은 아내, 갓 태어난 아기(나경님)를 놔두고 빨간 딱지(영장)를 받아 멀리 떠나야 했다.

  아버님은 필시 자기가 전쟁터에서 죽을 것으로 짐작하시고 아들도 없이 혼자 남을 아내를 생각하며 딸(나경님)이 태어나던 날, 집밖 계단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마냥 서 계셨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떠나는 그날까지 애기를 그렇게도 귀여워했다.

  아버지의 생사가 확인이 안 되고 함께 살던 가족이 흩어지면서, 세 모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을 했다. 지금도 예쁜 언니 생각을 하면 눈물부터 나는데, 서른 한 살에 애기들을 남기고 병으로 죽은 언니는 평생 단 한 번도 맛난 음식을 실컷 먹어본 일이 없다.

  1995년 야스쿠니 신사에 어머니와 함께 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합사된 걸 확인하고 빼달라고 항의했고, 그 자리에서 약식 제사를 올렸다. 어머니는 평생 재혼도 안 하고 사셨는데 유족한테 연락도 없이 얼토당토않게 신사에 합사하다니 무슨 말인가.

  아버님 나영기 씨는 1945년 초 동부 뉴기니의 ‘우라우’라는 곳에서 병원에 근무하고 있다가 미군의 식량보급소 폭격과 상륙으로 인해 아사하신 것 같다. 상상만 해도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싶어 맛난 걸 먹을 때도 죄스럽다고 한다.


3. 임서운 어머님은 공주 출생이며 무남독녀로, 아버님이 징용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조모님 등 가족을 고문, 협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징용을 가게 되었다.

  해군 군속으로 부대에서 일하다가 해방이 된 기쁨에 귀국선을 탔고, 우키시마마루(浮島丸)라는 그 배가 마이즈루항(舞鶴港)에 잠시 정박했다가 어뢰를 맞아 침몰하여 사망했다.

  아버님 사망통지서는 받은 것 같으나 서류는 유실했다.

  조부모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재혼했다. 무서운 가난 때문에 임서운님은 초등학교도 다닐 수 없었고 열 한살 때부터 공주 근방의 공장에 다니다가 서울에 올라와서 공장에 취직했다.

  2001년이 되어서야 아버님이 야스쿠니에 합사된 것을 알았다. 군대에서 싸우지도 않은 아버지를 야스쿠니에 합사시킨 것은 잘못이다. 당연히 합사를 취하해야 한다.

  벌써 10여 년 전부터 유족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일에 관계해 왔다.

  재판 때문에 일본에도 다니고 진술서를 읽어야 했는데(지난 번 재판에서는 패소했다) 한글을 잘 모르는 게 얼마나 마음에 걸렸는지 모른다.

  아들에게 배워서 약간은 읽을 줄 알지만 9개월 전부터 국가에서 경영하는 초등학교과정에 등록하여 다니고 있다. 심장이 좋지 않아 무리해서는 안 되고, 차 두 번 갈아타고 학교 다니는 게 힘들지만 조금씩 배우는 게 재미있다고 하신다.

  아버지를 모셔오는 일인데 발 벗고 나서야 하지 않겠나 하시는 임서운 님의 표정이 해맑다.


4. 윤옥중 어머님은 논산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해군 군속으로 근무하시다 돌아가셨다.

  작년(2006년) 8월, 야스쿠니 반대행동으로 동경에 갔었고 부모님 없이 늘 기죽어서 살아야 했던 윤옥중님에게 보추협은 친정 같은 곳이다.

  아버님이 효자였고 몸이 튼튼하고 힘이 셌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아버님의 사망 통지를 받지 못했고 할머니는 아버지가 남양군도에 가셨다는 말만 하셨으므로 늘 언젠가는 살아 돌아오실 걸로 믿고 있었다.

  유족회 일을 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사망을 직접 확인하고 얼마나 통탄스러웠는지.

  아버님이 일본을 위해 싸웠나, 천황을 위해 싸웠나, 일본의 강요로 전쟁터에 갔으니 야스쿠니에 합사시킨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작년 12월에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추정되는 팔라우에 가서 추도식을 하고 왔다. 그때까진 ‘왜 아버진 바보같이 살아오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우릴 그렇게 고생시켰나’ 하고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그 망망한 바다를 보니 바로 이런 데서 도망칠 데도 없이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납득이 간다고…

  팔라우에는 유족들 약 20명이 갔다고 한다. 서로 돕는 유족들의 존재가 위안이 된다.


4. 김기호 아버님은 옥천군 출신이고, 부친은 중학을 마치고 농사를 짓다가 1944년 면사무소의 동원으로 군대에 가셨다.       

  부친이 가신 곳은 타이였고 포로 감시 등의 임무를 맡으신 것 같다.

  1944년 9월 타이의 포로수용소를 출발하여 연합국 포로와 함께 배를 타고 해남도 남방을 지나다가 폭침되는 바람에 사망했다고 생각된다. 그날 포로들을 싣고 가던 두 척의 배 가운데 하나에 포로감시병으로 탑승한 것 같다.

  어릴 때여서 잘 모르지만 당시 사망 사실은 큰아버지에게 전해졌고 그때까지 군속으로 받은 월급도 입금되고 있었다. 부친의 사망 후 친척들의 도움도 끊기고 어머니는 행상을 하여 하나 뿐인 아들(김기호 님)을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켰다.

  나중에 부친의 임금에 대한 미불확인서를 일본 후생성에서 받았지만 미불금 자체는 아직 수령하지 못했다.  

  야스쿠니 영새부(靈璽簿)에 부친 이름이 들어 있다. 왜 일본사람도 아닌 한국 사람을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멋대로 올렸는가. 당장이라도 아버님 영혼을 가족들에게 돌려 달라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고 하셨다.

  곧 야스쿠니합사취하소송이 들어갈 것이다. 보추협이 한국측 사무국으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누가 가족들과 헤어져 죽음의 전장으로, 혹은 전쟁터나 다름없는 사지로 나가고 싶었겠는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전쟁과 노역에 동원하고, 제대로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사망 뒤 제대로 통고하지 않고, 게다가 사망 후 10여년이나 지나서 전혀 유족과 상의 없이 야스쿠니에 합사시킨 것은 누가 보더라도 전적으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이고 종교시설인 야스쿠니의 책임이기도 하다.

  야스쿠니재판의 원고들이 이 재판을 제기한 것이 단순히 ‘피해보상’ 뿐일까? 이 재판은 제국주의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 그야말로 한 사람의 생애와 관련된 문제이고 역사적 진실과 의미에 대한 문제다. 원고님들, 끝까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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