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민족문제연구소 | |||||
| |||||
| |||||
| |||||
| |||||
| |||||
| |||||
| |||||
| |||||
| |||||
해방 60주년이 지난 지금, 우린 아직까지 일제 잔재와의 싸움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각국 유럽이 친나치 청산에 적극 나서서 과거사 청산을 한 것과는 너무나 비교가 된다. 물론 이들 유럽 각국은 혹 있을 과거사에 대해서도 시효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응징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관련 법안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해야 했으며, 그나마 마련된 법안조차 정치적이해득실에 따라 누더기가 되었다. 또한 법제화 이후 조사결과에 따른 정치적 논쟁이 우리 사회를 한차례 휘몰아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몸짓임을 잊어서는안 된다. 친일 청산의 기회 마련한 임종국 선생 사실 우리가 이렇게 일제 청산을 위한 한 가닥 희망을 갖고 법제화에 성공한 것은 바로 한 사람의 의지에서 비롯한다. 바로 임종국 선생이다. 비록 선생이 살아생전에 한 일은 아니지만 선생의 친일 연구 업적이 단초가 되어 많은 후학들이 친일 연구에 발 벗고 나서는 계기가 되었고, 또 그 뜻이 모여 이렇게친일 청산의 기회로 만든 것이다. 이처럼 『임종국 평전』은 후학 중의 한 사람인 정운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이 친일 연구에서 얻은 자료와 선생의 주변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동감 넘치게 쓴 독특한 평전이다. 저자는 여느 평전에 더해 선생에 대한 비판, 연구 저술에 대한 명확한 해설은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거머리가 무서워 모심기도 못한 소심한 성격, 독서회 사건으로 경성사범학교 중퇴, 어머니와의 불화로 서울음악학원 중퇴, 3년간의 경찰관 근무, 『친일문학론』 집필 동기, 증거 자료 보자며 찾아온 어느친일파 후손 이야기, 『조선』『동아』기자가 앞 다퉈 선생을 찾았던 사연 등)를 통해 선생의 인간적모습과 고뇌, 연구 집필에 대한 단상 등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더불어 저자가 가지고 있던 의문점들은주변 인물들을 통해 추적하고 확인하여 정확성이 보태졌고, 그런 과정이 평전의 엄숙함을 깨면서 읽는재미가 솔솔하다. 또한 가족들과의 인터뷰, 학교 성적 공개 등은 혹 있을 선생의 신화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당시 선생의 숨결을 그대로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다. 이 책에서는 첫 부인과의 두 번 이혼과 재혼 이야기, 화장품 외판원 등 선생의 가정사 역시 민망할 정도로 모두공개됐다. 그리고 뒤에 덧붙인 집필 일기에서는 저자의 소탈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친근감을 느낀다. 『친일문학론』으로 본격 친일 연구 일찍이 문학도이고자 했던 선생은 대학 시절(고려대학교) 시인 이상과 닮은 자신의 자화상을 발견한다.사실 선생은 고시 공부를 통해 판검사가 되고자 했으나 지칠 대로 지친 자신의 몸과 정신에서 좌절과절망에 이르렀고, 결국 고시를 포기하면서 시인 이상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때 펴낸 『이상전집』은 문단에 주목받은 것은 물론 선생이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심지어 이상이 일본서 보낸 편지까지유족들에게 입수해 펴낸 역작이다. 저자는 『이상전집』 이후 출간된 다른 이상 연구 관련 서들과의 비교를 통해 『이상전집』의 성과와 오류들을 하나하나 짚어내고 평가를 시도한다. 이제 문학도의 길을걷게 된 선생은 드디어 『문학예술』에 「비碑」로 등단을 하게 된다. 시인으로서의 선생은 총 10여 편의 시를 남겼으나 별로 주목받지는 못했다. 저자는 선생의 유품 중에 나온 시 몇 편을 이 책을 통해 처음 공개했다.
스승 조지훈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서울신문』의「흘러간 성좌」 연재는 선생의 친일 연구의 단초가된다. 예술계의 기인을 발굴해 연재했던 이 글에서 선생은 각종 자료들을 조사할 수 있었고, 당시 한일회담에서 오는 정치적 난맥상, 『친일파군상』에서 받은 충격으로 『친일문학론』을 펴낼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주변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선생이 남긴 글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설명한다. 『친일문학론』은 천황과 일제를 위해 바친 매국매족의 증거물들을 하나하나 찾아내고 기록한 최초의 친일 문학 연구서였다. 이 책에는 그 당시 우리 문단에서 존경을 받던 인사들이 총 망라됐으며, 심지어 선생의 스승인 고려대 유진오 총장과 부친의 친일마저도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냉대하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때부터 선생의 연구는 고독 그 자체였다. 못다 이룬 친일 연구 후학들이 계승 선생은 친일 연구를 하면서 위토혈을 하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망가져가는 몸을 붙들고 『한국사회풍속야사』『일제침략과 친일파』『밤의 일제침략사』『일제하의 사상탄압』『한국문학의민중사』『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 2』『정신대 실록』『친일논설선집』등을 숨 가쁘게 쏟아냈다. 한편 저자는 선생이 일본인 오오무라(『친일문학론』일본어 번역)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동아공영권’에대한 시각이 잘못됐다며 논거를 통해 비판하고, 미야타 여사(자신의 저서에서 『친일문학론』 언급)에게 편지를 보내 “책에 침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어쩔 수 없었다”며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선생의태도에 분개한 나머지 살아 계시다면 토론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또한 저자는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총론-친일시에 대한 소견」에 대해 친일 문제 연구가 입장에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문덕수 시인의 유치환 옹호 칼럼에 대해서도 친일 문제에 접근하는 자세가 치졸하다며 엄중 비판한다. 선생은 말년에 친일 연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친일파총사』(총10권)를 공동집필하게 되는데, 이책은 선생의 지병이었던 폐기종으로 인해 펜을 놓으면서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이 남긴연구 업적은 고스란히 후학들에게 물려져 민족문제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고, 친일 청산 법제화가 이루어지면서 고독한 연구가 아닌 국가적 과업이 되었다. 이제 우리에겐 “벼락이 떨어져도 내 서재를 떠날 수 없다”던 선생의 말처럼 현재 진행형인 친일 청산의 의지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굳건히 지켜나가는 일만 남았다. | |||||
| |||||
| |||||
| |||||
1988년 무렵부터 친일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기존 성과 탐독과 자료 수집에 전념했다. 1998년 8월 『대한매일』(현 『서울신문』)로 자리를 옮겨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친일파 열전」을 장기간 연재했다. 2002년 1월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초대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2005년 5월까지 근무했으며,그해 6월부터 반민특위의 후신격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로 옮겨 현재 사무처장으로 재직중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주요기사
‘임종국 평전’
By 민족문제연구소 -
369


![img-top-introduce[1]](/wp-content/uploads/2016/02/img-top-news1.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