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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에서 해방되지 못한 나라, 일본-컬쳐뉴스(0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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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에서 해방되지 못한 나라, 일본 
‘야스쿠니 반대 공동행동’을 다녀와서(3)  
 


           ▲ 도쿄 시내를 행진하는 공동행동 시위대
 


15일 아침부터 도쿄의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습기가 가득했다. 안개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가운데 이른 아침부터 다시 공동행동에 참여한 한국과 일본, 대만의 원정시위대가 도쿄 시내에서 항의 시위를 진행했다. 500, 600여명 정도로 추산되는 시위대는 도쿄 도심을 관통하여 히부야 공원까지 행진하며 같은 날 진행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규탄했다. 히부야 공원에서 정리 집회를 진행한 공동행동 일원은 바로 근처의 변호사회관 10층으로 이동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공동행동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발표했다. 기자회견을 끝으로 야스쿠니 공동행동의 공식 일정은 마무리되었고 일행들은 요코스카로 이동 주일미군기지를 방문했다.

이날 공동행동에 가장 적극적이고 강고한 자세로 참여했던 조직은 공동행동 대만위원회였다. 가오진 쑤메이 대만 입법위원(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는 이들은 15일 당일에도 밤을 세우며 대기하고 있다가 새벽 5시경 야스쿠니 신사 앞으로 몰려가 도로를 점거하고 합사된 대만 원주민의 영혼을 고향으로 불러오는 의식을 치르려다 일본 우익과 충돌을 우려한 경찰들에 의해 제지당했다고 한다.

대만 원주민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강경한 반대의 의지를 갖고 있는 것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대만 원주민들은, 세계적으로도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로 험란한 역사를 겪어온 민족이다. 이는 대만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 구성을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현재 대만 사회는 원주민과 본성인(청조 시대에 건너간 한인), 외성인(장개석 군대와 함께 건너간 한인)  등 세부류의 이질적인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덜란드와 청나라, 일본, 그리고 다시 본토에서 건너간 장개석 군대의 침략을 받는 동안 대만 원주민들은 언제나 피압박 민족으로 수난을 겪어야 했다.


 


            15일 새벽 야스쿠니 신사를 급습했던 대만 원주민 시위대. 



특히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일제 침략기의 수난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인데 식민통치 기간동안 일본은 대만을 본토에 대한 식량 공급기지 및 공산품 소비시장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진행했다. 일본은 식민초기인 1918년까지 기존의 항일세력에 대한 일차적 말살 정책 및 강제적 근대화를 진행했다고 한다. 1918년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는 일본어 교육의 의무화 및 문화 동화정책 실시했고 태평양 전쟁을 전후한 1930년 후반부터 1945년까지는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식 이름 의무화 및 신사참배 강요 등 소위 황국신민화 정책을 폈다. 이 과정에서도 가장 큰 수난의 대상은 대만 원주민이었는데 태평양 전쟁기에 ‘고사의용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용되어 아시아 각지에서 희생되었다.

현재 대만 원주민들은 여전히 대만 사회의 최하층에 머물고 있으며 한족의 동화정책 속에 마치 미국에서 인디언과 같이 민족 정체성 상실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조상들의 넋을 돌려받기 위한 투쟁은 단지 과거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현재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것으로서 그 절심함이 더한 듯 했다.

선박 편으로 참여했던 일행들은 15일 저녁 나라로 이동하였고 필자를 비롯해서 비행기 편으로 참여했던 이들은 숙소에 머물며 바쁜 일정에 지친 심신의 휴식을 취했다. 공식적으로 자리를 마련하지는 않았지만 참석자들은 삼삼오오로 흩어져 저녁 식사를 겸하여 이번 행사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진행하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유래없이 진행된 원정시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지만 체계적인 준비가 부족했고 더 다양한 프로그램과 역량이 참여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아쉬워 하기도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투쟁하신 유족들과 태평양전쟁 피해자 할머님들. 



16일에는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고 숙소를 나섰다. 저녁 비행기여서 시간이 비어있던 터라 일행들은 버스를 타고 야스쿠니 신사 대체시설로 주목받은 ‘지도리 가후치’와 1945년 해방 직후 일본으로부터 한국인들을 태우고 돌아오다 의문의 폭침을 당한 우키시마마루호 피해자들의 유골이 보관된 ‘유텐지’를 방문했다. 1718년 건립된 사찰 유텐지에는 1971년부터 우키시마마루 피해자 1135구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이일만 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사무국장의 설명에 따르면 유골들은 그 전까지 후생성 지하실에 보관중이었다고 한다. 유골함 하나에 14명 몫의 유골이 함께 보관되어 있는데 1년에 한번씩 후생성 관리가 둘러볼 때에만 유일하게 보관함의 문이 열린다고 한다. 현재 유골 반환을 위해 한국과 일본 정부가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협상 결과도 낙관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전몰자 유골 발굴에 연간 80억원의 예산을 쓰는데, 과연 한국 정부가 유골 반환이나 사죄를 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이 사무국장의 발언은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일행은 신주쿠에 잠시 들렀다가 8시 경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며칠만에 보는 한국신문에는 가토 자민당 전 간사장의 자택 방화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었다. 한때 고이즈미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가토는,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에 밝혀온 인물이다. 문득 “1945년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한국, 대만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유일하게 해방되지 못한 나라가 있다. 바로 일본이다.”라는 서승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서야 밝히지만 서 교수는 이번 공동행동의 실질적 발의자이자 기획자다)

이번 공동행동에 참여하며 한가지 분명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야스쿠니 신사로 상징되는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이 결코 역사의 화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일본 내부의 양심적 민주세력을 억누르는 족쇄로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나아가서 일본을 둘러싼 주변국가들의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자리잡고 있다. 즉 야스쿠니의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아니 나아가서 미래의 문제이며,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문제란 것이다. 비록 이번 공동행동의 활동이 고이즈미의 신사참배를 막지는 못했지만 이번 활동을 통해 얻어진 참여자 개개인의 각성이 축적되어 이후 더욱 활발한 행동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 민예총정책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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