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유스호스텔 진입로서 하야시 동상 판석 발견 조선통감 관저 터 증명…일대 체계적 조사 벌여야 | |
![]() | 전진식 기자 이유주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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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에 통감 관저가 있었음은 길 건너편의 400년 된 은행나무에서도 확인됐다. 1919년 만선출판협회가 펴낸 <선철연선 명소사적 미술대관>에 실린 당시 사진을 보면, 이 나무는 통감 관저 바로 앞 들머리에 서 있다. 이 위원은 “사진과 지도 등을 검토해 보면 이 은행나무와 받침대 판석이 발견된 길 위쪽의 농구장이 통감 관저 건물터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통감 관저가 경술국치의 장소라는 기록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34년 경성부에서 펴낸 <경성부사> 2권 154쪽을 보면 “양국 전권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과 이완용 총리대신은 총독(합병 전 통감) 관저의 한 방에서 병합조약에 조인했다”고 나온다. 광복 뒤 이 건물은 1946년 민족박물관, 1953년 국립박물관, 6·25 전쟁 뒤 1954년 연합참모본부 등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1972년 이 일대가 당시 중앙정보부의 관할로 들어가면서 건물에 대한 기록이나 사라진 시기 등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 1996년 이 일대를 국가안전기획부로부터 넘겨받은 서울시도 지금까지 이 일대에 대한 유물·유적 조사를 벌이지 않았다. 이순우 연구원은 “을사늑약의 체결 장소가 덕수궁 중명전임은 널리 알졌으나, 정작 합병 조약의 체결 위치는 잊혀졌다”며 “치욕스런 역사를 똑똑히 기억해야 다시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중앙정부나 서울시가 이 일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벌일 것을 제안했다. 이에 김수정 서울시 문화재과 학예사는 “1923년 만들어진 경성부 지도와 현재 지도를 비교해 보면 이 위원이 추정하는 위치와 지도상 통감 관저 사이에 150m 가량 차이가 있다”며 “정확한 위치는 발굴조사를 벌여야 확인할 수 있으므로 문화재위원들의 현장 확인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전진식 이유주현 기자 seek16@hani.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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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