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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일제 ‘귀신부대’ 갇힌 우리 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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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7일 오전 10시, 일본 총리 고이즈미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일본의 양식 있는 사람들의 거센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날에 예고한대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게다가 이어서 다음날 자민당 간사장 다케베를 비롯한 101명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무더기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감행했다.


일제의 아시아 침략의 과거를 뉘우치기는커녕 비판의 목소리를 ‘내정간섭’이라고 도리어 화내는 적반하장의 뻔뻔스러운 처사라고 하겠다.

이는 군국주의를 흠모하는 고이즈미의 소신이기도 하나, 일본 정치풍토에 깊이 뿌리내린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야스쿠니 이면에는 보상금 지급의 ‘물질적 이해’ 가

즉 야스쿠니가 널리 일본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는 ‘나라(천황)’를 위하여 침략전쟁에 몸바쳐야 비로소 전몰자 및 전상자 보상법에서 규정하는 보상금의 지급대상자가 된다는 물질적인 이해관계가 깔려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관계를 배경으로 자민당 최대의 표밭인 ‘일본 유족회’가 구성돼 있으며, 고이즈미는 아버지 부터 2대에 걸쳐 그 회장직을 맡고 있다.

고이즈미의 막무가내 행동에 대해 우리나라나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자민당 내부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중국은 예정돼 있었던 외무장관 회담의 취소를 표명했으며, 한국도 올 연말로 예정돼 있는 한일 정상회담의 실행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표명했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죄는 없다’ ‘나라를 위해서 희생된 영령을 모시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느냐’ 라는 정서가 지배적인 일본 사회에서 비판여론은 미미하다. 기껏해야 총리의 참배가 일본과 아시아의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경제적인 국익을 손상시키는 것을 우려하는 수준이고, 야스쿠니 신사의 본질에 다가서는 비판은 흔하지 않다.

한·중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의 주된 이유는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동경재판은 무효다’ 또는 ‘A급 전범은 전승국의 일반적인 단죄에 의해 희생된 분들이며, 전쟁 범죄자는 아니다’ 라고 주장하며, 일본의 군국주의 청산을 맹세했던 샌프란시스코 조약마저도 부정하려 하고 있다.

A급 전범의 합사를 반대함으로써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심판을 확고히 하려는 한국과 중국의 의도는 당연한 일이다.






종교 시설 아니라 전쟁 박물관…일본 정부 완전한 공모

그러나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야스쿠니 신사는 군국 일본의 육군성과 해군성이 관할했던 군사시설이며,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전쟁박물관이니 어떤 종교 시설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제 패망 후 미점령군 사령부의 일본군국주의 해체 방침에 따라 한때 폐쇄됐었지만 곧 민간종교법인으로 부활했으며, 후생성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될 사람들의 명단을 지속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완전한 공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군국주의의 망령이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범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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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쿠니, 무엇이 문제인가?(오마이뉴스, 05.11.28)


한반도와의 관계를 보면, 첫번째 합사자가 1875년 운요호가 강화도를 불법침략했던 ‘강화도 사건’ 때 사망한 일본인이라니 야스쿠니와 우리나라는 참으로 끈질긴 악연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9월30일 오사카 고등재판소는 고이즈미의 신사참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판결에서, 원고의 배상청구는 기각했으나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종교분리원칙을 위배하는 위헌 행위’라는 헌법판단을 내렸다.

고이즈미는 이러한 판단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어떤 전력의 소지와 무력의 발동도 금하고 있는 일본 헌법 9조를 무시하고 버젓이 ‘자위대’라는 이름의 군대를 이라크에 파병한 것과 아울러, 일본의 입헌주의의 허구성을 다시금 드러냈다.

정교분리원칙의 문제는 일본의 입헌주의와 종교의 자유라는 면에서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나, 야스쿠니 신사 문제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침략전쟁에 희생된 조선인들, 죽어서도 일제 ‘귀신부대’에 편입

우리에게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야스쿠니 신사가 동아시아의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전쟁원흉들이 묻혀 있는 곳인 동시에 350만명에 달하는 일본인 사이에 2만2천명 가량의 조선인들과 2만8천명 가량의 대만인들이 함께 갇혀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에 내몰려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신사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행군할 것을 강요받고 있는 ‘귀신부대’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한국인과 대만인 합사자 유족의 일부는 자기들의 조상을 야스쿠니 신사에서 빼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소송까지 걸고 있지만 야스쿠니 신사측은 막무가내다.

그 논리는 ‘천황의 뜻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것을 백성의 뜻으로 빼낼 수는 없다’, ‘지금은 한국사람일지 모르나 죽었을 당시에는 일본사람이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오면 그 영혼은 하나가 돼서 그 일부를 떼어낼 수 없다’, ‘유족은 빼내 줄 것을 요구할지 모르나 본인은 그것을 바라고 있지 않다’ 라는 황당무계한 것이다.

이것은 전쟁에 강제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까지 본인과 그 가족을 욕되게 하는 이중의 가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중대한 사실에 대하여 거의 모르거나 무관심한 상태이다.

일본군국주의가 패망하고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원혼들은 일제의 ‘죽음의 수용소’인 야스쿠니 신사에 갇혀 지내온 것이다.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바라볼 때 무엇보다도 이 문제의 해결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반대는 물론이나 최우선적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갇혀 있는 이 원혼들을 해방시켜줄 것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때마침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야스쿠니 신사 반대운동을 주제로 한 다큐멘타리 영화 ‘안녕 사요나라’가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대만 일본 미국 등지에서 개봉될 것이라고 한다.

나치 전범자의 위령 시설에 독일 총리가 참배했다면 세계 여론이 가만히 있겠는가? 왜 세계는 일본과 야스쿠니에게 너그러운가?

이번 고이즈미 참배를 계기로 온 세계에 야스쿠니 신사 반대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일본군국주의 부활의 싹을 잘라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코리아포커스, 05.10.19>


 











서승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코리아연구센터 소장

1945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1968년 도쿄 교육대학 졸업 후에 한국에 유학하였다. 1971년 ‘재일교포 학생학원침투 간첩단사건’으로 육군보안사령부에 연행돼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년 동안 비전향정치범으로 옥살이를 했다. 1990년 2월 석방되어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사회학과 객원연구원을 거쳐, 1998년부터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법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첫 걸음을 내딛을 때>(일본평론사, 1995) <서승의 옥중 19년>(역사비평사, 1999) 등이 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 이희자 대표 “야스쿠니 합사는 민족적 비극”





 







“일본정부가 합사사실을 유족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들의 신으로 만들어 받든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같은 동아시아 국가 국민들이 합사철회가 이뤄지도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협의회) 이희자(62) 공동대표가 최근 대만·일본의 합사자 유족들과 함께 부산을 찾았다.

지난 18일 낮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 쥬디스태화 앞에서 열린 대일 과거사 청산대회에서 이 대표는 APEC을 과거 일본의 대동아공영 논리에 빗대면서 야스쿠니 합사철회를 부르짖었다.

이에 앞서 17일 오후 부산 동구 정발 장군 동상 앞에서도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저지와 야스쿠니 신사참배 반대 규탄대회를 갖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3국 유족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합사철회 소송 △UN 인권위 진정 △각국 정부·의회에 공동조사단 구성 청원 등을 공동추진키로 했다.

지난 2001년 국내 야스쿠니 합사자 유족 55명을 포함한 399명의 원고인단이 제기한 합사철회 소송은 내년 2월 15일께 결심공판이 열린다.

하지만 결과를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이 대표는 “공판이 열리더라도 실제 판결이 어떻게 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3개국 유족이 힘을 모아 사전 대책으로 이런 준비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대표는 그 자신도 야스쿠니 합사자 유족이다.

아버지는 1944년 일본에 끌려간 뒤 숨져 야스쿠니에 합사됐다.

유일한 혈육인 이 대표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넘긴 유수명부를 보고 1993년 아버지의 합사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이때부터 8·15 광복절에 만세를 외치지 않는다고 한다.

아픈 과거가 청산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광복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연들이 알려지면서 이 대표는 최근 합사자 유족들의 얘기를 다룬 한·일 공동 제작 다큐멘터리 ‘안녕,사요나라’의 한국 측 주인공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최근 들어 이 문제에 공감하는 유족들이 많아져 같이 활동하는 사람이 150명 정도로 늘었다”며 “야스! 쿠니 합사철회는 민족 전체의 문제인 만큼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일보, 05.11.22>


















 


親日 대만의 反日 여배우


 


 


지난 6월 일본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항의 집회를 이끌고 있는 가오진쑤메이.


 대만은 일본에 대한 향수가 유난히 강하다. 동남아에서 가장 친일적인 정권이 존재하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다.


일본이 대만을 동맹국 정도로 인식하고 국제 사회에서 대만편을 드는 경우가 은근히 적지 않은 데에는 다 까닭이 있다. 중국에서는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을 비롯한 골수 친일파들이 득실대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친일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우익 지향적 정치 성향을 비판하고 매서운 일침을 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중 최근 가장 주목을 모으는 인물은 단연 대만 원주민 출신에 영화배우 이력을 가진 여성 입법위원인 가오진쑤메이(高金素? ? 41).

치와스 알리가 본명인 그녀는 원래 영화배우로 유명했다. 20대 후반에서부터 30대 초반까지 리안(李安)감독의 결혼피로연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에 출연, 화려한 명성을 쌓았다.

이후의 그녀 행보는 더욱 극적이었다. 20세기말 과감하게 정치인으로 변신, 의회에 처음 진출하는가 싶더니 정치 초년병임에도 처음부터 대만 원주민 문제를 정치 이슈화시켰다. 2차 대전 당시 강제 징용돼 희생된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3만여명의 대만 원주민들의 합사 취소 운동을 전개한 것.

이후 그녀는 이같은 입장을 계속 천명하다 지난 6월에는 일본에


직접 날아가 과감하게 일본 우익에 도전장을 던졌다.

지난 21일 한국으로까지 날아가 서울의 일본 대사관에서 일본 규탄 집회를 거행한 그녀는 앞으로 유엔에까지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대만 원주민들과 동남아의 뜻 있는 인사들을 모아 강제 징용자, 위안부 문제에 미온적인 일본을 규탄하겠다는 것. 이 계획이 과연 성공할지 지금 일본과 대만의 우익들은 숨죽이면서 그녀의 차후 행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베이징=전순기특파원<아시아경제, 05.11.23>









“살인자 부시, 범죄자 고이즈미 외치러 왔다”
<결혼피로연>등 출연 유명 영화배우
대만 첫 원주민 국회의원으로… 카오친 스메이 현장 인터뷰
안진걸 기자 , 2005-11-18 오후 4:17:16  


















 


 




11월18일 오후 12시30분, ‘일본의 과거전쟁범죄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한-중-일 3국 공동집회’에 참여한 대만의 입법의원(우리나라의 국회의원)인 카오친 스메이(41, 2선, 무소속)를 만났다.

그녀는 대만의 50년 정치 역사상 첫 원주민 출신 입법의원으로 자신의 원주민 언어 이름은 ‘치와스 아리’라 소개했다. 대만에는 모두 12족의 원주민 부락이 있는데, 카오친 스메이는 그 중 ‘타이얄’족 출신이다.

카오친 스메이는 저명한 영화배우 출신으로(이안 감독 ‘결혼피로연’ 주연배우) 이번에 한-중-일 3국 공동행동과 안티아펙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지난 16일 저녁 부산으로 왔다. 대만의 저명한 정치인인 그의 활동은 한-중-일 언론의 집중 취재 대상이 되고 있다.

카오친 스메이는 특히 “전쟁범죄에 대한 참회도 없는 고이즈미 수상이 헌법과 자국 법원의 판결까지 무시하면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분노를 표시했다.

그는 또 “부시와 아펙은 부자를 더욱 부자로, 가난한 자를 더욱 가난한 자로 만들 뿐”이라며 아펙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 그는 전경들 수백명이 포위하고 있는 와중에도 “고이즈미와 부시는 집으로 가라” “동북아시아에 평화를” “고이즈미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단” “미-일 군국주의 반대”를 힘껏 외쳤다.

다음은 카오친 스메이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 어떻게 부산까지 오게 됐는가.

“첫째는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반대하기 위해 왔다. 9월30일 일본 법원이 총리의 신사참배가 위헌이라고 밝혔는데도, 고이즈미는 17일 후 또 참배를 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수상이 자국의 헌법과 법원 판결을 무시하면서까지 행할 수 있는가. 그는 자국 헌법과 법원을 무시하는 범죄자이다.

일본은 예전 대만을 침략해서 원주민들을 참혹하게 학살했다. 한국민들도 마찬가지의 피해를 입었다. 대만에서 여기까! 지 오기 힘들었지만, 일본정부는 결코 평화의 정부가 아니라는 점을 알리고, 고이즈미의 한국 방문을 한국 국민들과 함께 항의하기 위해서 왔다.

둘째는 부시도 한국에 왔는데, 부시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의 군사확장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애쓰는 부시같은 살인자가 한국에 온 것에 분노를 느낀다. 또 아펙이 말하는 경제협력과 경제발전은 결국 노동자, 농민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것이다.

왜 저기 모여 있는 정상들은 ‘빈부격차 해결’을 얘기하지 않는가. 착취받는 사람들은 단결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 국민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오게 된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단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평화, 반전, 인권이다.

하나 더 이야기 하자면 야스쿠니 신사는 말도 안되는 것이다. 어떻게 한국과 대만의 조상들을 강제로 끌고가 전쟁에 참여시키고는 사망자들을 자기들 맘대로 합사해서 신으로 모실 수 있는가. 그것은 마치 히틀러와 유태인을 합사시키고 기리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는 대만과 한국의 조상들의 위패는 당장 분리해야 한다.”

– 언제까지 한국에 있게 되는가.

“아펙반대 부시반대 범국민대회에 참여한 후 서울로 올라가서 한국의 국회를 방문해 국회의원들 몇몇을 만나고, 일본 대사관에도 항의 방문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을 둘러본 후 21일 대만으로 출국할 예정이다.”

– 얼마전 농민대회에서도 큰 경찰폭력이 있었다. 범국민대회도 충돌이 예상되는데.

“농민대회의 경찰폭력은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다. 범국민대회의 충돌도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한국만큼은 아니어도 대만에서도 종종 있는 상황이다.(웃음)”

– 어제 아펙반대 부시반대 문화제에 참여했는데, 전체적인 한국의 운동에 대한 인상은?

“매우 감동적이다. 나이 많은 분들도 꽤 참여한 것을 보고 놀랐다. 보통 이런 행사들은 젊은 사람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나이 많은 사람, 젊은 사람들이 다같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노동운동도 꽤 잘 되고 있다고 느꼈다.”














 


 



– 대만에도 반미운동이나 반세계화운동이 활발한가.


“한국처럼은 활발하지 않지만, 대만에도 그런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지금 대만정부에게 6천만 대만달러어치의 무기를 사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반대하는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양안간의 평화는 군사무기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기판매라는 것은 어떤 나라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경제적 수입루트이다. 바로 부시 정부가 전세계에서 가장 큰 무기판매상이다.”

– 대만에도 좌파정당이 있는가. 노동단체는?

“대만에도 노동자를 위한 여러 단체가 있고, 나도 그런 단체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대만에는 제대로 된 좌파정당이 없다. 다만, 노동자를 위한 법안을 추진할 때 도와주는 의원들은 있다. 노동단체도 한국보다는 많이 약하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국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대만에도 이주노동자들이 꽤 들어와 있는데,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대만과 한국의 노동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세계화에 맞서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어떻게 영화배우에서 입법의원이 됐는가.

“연예계 활동을 18년 하다가 이안 감독의〈결혼피로연〉이라는 영화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그러다 6년전 간암을 앓다가 퇴원한 후 그때 대만에서 제일 큰 지진이 발생했는데, 텔레비전 화면에서 대만 원주민들의 재난 피해를 접하게 됐다.

그래서 자원봉사단체에 참여해 원주민 부락에서 피해복구 활동을 하게 됐고, 그러다 원주민들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입법의원이 돼줄 것을 희망해, 한번도 정치활동 경험이 없는 내가 입법의원 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그때가 2002년 2월이다. 대만 50년 정치역사상 원주민 출신 입법의원이 탄생한 게 그때가 처음이다. 대만의 입법의원들은 임기가 3년이고 지금은 재선의원으로 활동중이다.”

– 입법의회 활동에서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입법의원들이 된 후 원주민들의 희망대로 계속 원주민 부락을 순회하고 있다. 나도 원주민 출신이지만 원주민의 역사와 상황을 배우지 못했다. 그것은 일본군국주의 치하에서 원주민들의 역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1895년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대만에 들어와서 조상들을 해치고 그 자식들에게는 황국신민으로 세뇌교육을 시켰다.
원주민 스스로 원주민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도록 가르쳤다. 일본이 패전 후에는 국민당 정부가 들어와서 똑 같은 짓을 했다.

지금 민진당 정부가 들어섰어도 원주민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다. 그래서 지금 원주민들은 원주민들의 문화, 언어를 되찾아야 한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이것이 입법의원으로서 가장 주력하는 활동이다.

우리 원주민들은 원래 대만 섬의 주인이었으나 착취당하고 변두리화되고 고립화돼 있다. 우리 원주민 젊은 세대들이 원주민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 이어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대만 원주민들의 삶이 많이 열악한가.

“대만 원주민들은 대부분 노동자, 농민 등 무산자 계급이다. 무척 어렵게 살고 있? ? 그것은 대만 원주민들에 대한 교육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빈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원주민들에게는 교육지원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교육이 부실하다보니 대물려서 또 원주민들이 무산자 계급이 되어 있다. 우리 원주민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정한 기회의 제공이다.”

– 원주민 NGO를 소개한다면?

“지난 9월 원주민 인권과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단을 호소하기 위해 UN에도 갔다 왔는데, 그때 같이 간 NGO가 ‘조령지방(祖靈之邦)’이라는 NGO이다. ‘조령지방’은 ‘조상들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만에도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NGO활동이 있다.” <코리아포커스, 05.11.18>

– 리츠메이칸대 교수,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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