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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정이형을 아십니까? 해방 후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지도자로 활약하다 1950년 북한으로 건너간 박열과 달리 정이형은 남한에서 정부 수립에 참여한다. 정이형이 남한 정치사에서 기록된 것은 친일파 청산의 선봉에 섰다는 사실이다. 그는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회 의원으로서 ‘친일파 숙청법’을 기초하는 한편 백범 김구 등과 함께 남북통일 운동을 전개한다. 이후 정이형은 곧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갔다. 사후 7년 뒤에 정부에서 그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했으나 학계는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면서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과 통일을 강조하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가 크게 부족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한 역사학자의 노력으로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정이형의 행적이 복원됐다. 수원대 박환 교수가 출간한 ‘잊혀진 혁명가-정이형’(국학자료원)은 식민지시대와 해방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민족통일에 앞장 섰던 한 민족지도자의 삶을 새로 발굴한 자료와 함께 꼼꼼하게 보여준다. 20여년간 만주와 러시아 일대의 항일운동사를 연구해온 박교수는 책 서문에서 “정이형의 자료를 접하면서 이토록 강렬한 항일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다”면서 정이형을 만주지역의 대표적 무장독립운동가로 꼽았다. 이 책은 정이형의 회고록(1953년 작) 및 옥중 편지, 가족의 증언, 일제하 재판기록, 해방 이후 정이형 관련 문헌을 토대로 엮은 정이형의 일대기다. 평북 의주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정이형은 항일의식이 투철한 형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전남 장성으로 내려가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는 1920년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 정의부 등에서 무장투쟁을 주도한다. 1925년 3월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으로서 평북 벽동경찰서를 습격해 일본 순사 3명을 살해한 일이 대표적인 성과. 한편 정이형은 1923년 다물청년당을, 1926년에는 고려혁명당을 조직하며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도모한다. 그러나 고려혁명당의 활동은 이듬해 정이형이 일경에 붙잡히면서 종막을 고한다. 이어지는 18년5개월의 수감 생활. 그는 이후 최장기 복역수로 불리게 된다. 정이형의 항일민족의식은 해방과 함께 더욱 꽃을 피운다.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한 그는 ‘부일·반역·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의 제정을 주도하는 등 친일파의 척결을 위해 투쟁했다. 또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통일운동에도 기여했다. 흔히 친일파 청산이 1948년 제헌의회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에 앞서 정이형 등은 1년 전 과도입법의회에서 친일파 숙청법의 초안을 만들었던 것이다. 박교수는 이 책에서 정이형을 “독립투쟁 방략으로 무장투쟁 노선을, 정치이념으로는 진보적 민족주의를 추구한 사상가”로 자리매김했다. 정이형은 60년이 되도록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친일 문제를 선봉에서 해결하려 했던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일제 최장기 복역 독립투사 일대기 출간 일제시대 최장기 복역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친일파 청산과 통일운동을 주도했던 쌍공 정이형(鄭伊衡 1897∼1956) 선생의 일대기가 책으로 출간됐다.
박 교수는 최근 20여 년 간 만주와 러시아 일대의 항일운동사를 연구하면서 수많은 투쟁을 주도했던 쌍공 선생 같은 인물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그동안 수집한 사료들을 근거로 선생의 일대기를 책으로 엮었다고 19일 밝혔다. 선생은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한반도 강점기간에 19년 동안 복역한 최장기수였으며 해방 후에는 친일파 제거를 위한 선봉장 역할을 맡았다는 게 박 교수의 평가다 선생의 일대기를 보면 1920년대 만주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 정의부 등에서 무장투쟁을 주도했고 1925년 3월에는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으로서 벽동(碧潼)경찰서 여해(如海)경찰출장소를 습격해 일본 순사 3명을 살해했다. 선생은 또 정당조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3년 다물청년당을, 1926년에는 만주 지린(吉林)에서 국내외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망라하는 고려혁명당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선생은 1927년 하얼빈(哈爾濱)에서 일경에 붙잡혀 신의주로 압송돼 재판에 회부됐으나 법정에서 독립운동가임을 밝히고 불공정한 재판절차에 강력 항의하는 등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일화로도 유명하다. 1927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린 1차 공판에서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다"라고 밝힌 뒤 자신의 입장을 자세히 공술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심리를 거부하는 등 일제의 법정신문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저항했던 것이다. 선생은 1928년 4월 20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평양과 서대문, 마포, 대전 형무소 등을 전전하며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으로 출옥할 때까지 무려 18년 5개월 17일 동안 투옥돼 일제하 최장기 복역수로 기록됐다. 해방 이후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하며 부일ㆍ반역ㆍ전범ㆍ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의 제정을 주도하는 등 친일파의 척결을 위해 투쟁했으며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통일운동에도 기여했다. 박 교수는 서문에서 "선생은 식민지 시대에는 무장투쟁과 좌우합작을, 해방공간에서는 좌우합작운동과 친일파척결을 통한 민족정신의 회생을 꿈꿨다. 그의 꿈과 이상은 아직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가 추구한 민족정신이 올바로 구현된 통일된 민족국가의 달성은 가까워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또 "선생이 만주 벌판에서, 19년의 영어생활 속에서, 혼란과 무질서의 해방공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내 지켰던 그의 정치적 신념이 하루 빨리 실현되기를 간곡히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hadi@yna.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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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 잊혀진 혁명가 정이형
By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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