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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한국인을 치의학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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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치과의사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뒤늦게 사학 박사과정을 졸업한 현직 치과 의사가 한국근대치의학의 기원과 발전의 역사를 다룬 [한국근대치의학사](저자 신재의 / 발행처 참윤 퍼블리싱)를 펴냈다.




이 저서는 일제에 의해 이식된 근대 치의학을 단순히 기능적 측면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접근한 점이 이채롭다.




여러 가지 자료와 문헌들을 찾아내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동화 정책 수행이라는 보편적인 배경 속에서 근대 치의학 분야의 특수한 사례를 밀도 있게 접근한 이 책은, 최근 우리 사회 전반에 일고 있는‘친일청산과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정리’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더욱 확산시켜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일제의 조선침략과 지배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이뤄져 온 만큼 이번 저서와 같이 각 분야에서 자기 반성적 성찰 노력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특히,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1)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전통치의학의 임상적 경험이 빛을 보지 못하였고, (2)‘충치예방의 날’행사도 치과의사회보다 조선총독부와 치약회사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여, 심지어 충치 예방 활동도 ‘시국 정세’의 영향으로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협력하여 이뤄져 군대의 교련을 이 닦기에 도입한 치마(齒磨)교련이었다. (3)치과치료용 금을 허가제로 통제하며 치과재료를 배급제로 제한하였으며, (4)심지어 한국인을 대상으로 검증되지 않은 치의학 약품 등을 사용하는 일도 벌어졌다. (5)끝으로,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핍박한 조선치과의사회(일본인의 의해 일본인 의사를 위해 설립된 단체)를 현재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원으로 두고 있는 현실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내용 등이다.


 


<다음>은 이 책의 소결 중 한 부분이다.


일제에 의한 치의학의 도입은 재한 일본인을 치료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1893년 치과의사 野田應治가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개업하였고, 1905년 9월 일본군을 따라 치과의사 楢崎東陽가 오게 된 것이다. 특히 일제는 일본에서 폐지된 입치사 제도를 한국으로 이전하였다. 1902년 小森가 충무로에서 입치업을 개업하였다. 이 입치사는 1920년 중반까지 수적인 우위를 점하였다. 한국인 입치사는 1907년 최승룡이 종로에서 개업한 것이 최초였다.


  치과의사에 대한 제도인 입치영업취체규칙이나 치과의사규칙은 치과의사의 개업과 의료행위까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게 만들었다. 1914년 2월 5일 최초의 한국인 치과의사 함석태가 최초로 치과의사면허 제1호로 등록했다.


  치과 교육기관은 柳樂達見에 의하여 일제의 식민지 경영에 기여하는 한국인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경성치과의학교는 일제의 도움 가운데 성장 발전되었다. 그러나 1929년 1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하면서 한국인보다는 일본인을 더 많이 졸업시키는 일본인 학교가 되었다.


  조선치과의사회는 楢崎東陽 등에 의하여 설립되어, 식민지 통치에 호응하는 일본인 치과의사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한국인만의 치과의사회의 필요성을 공감하여 한성치과의사회가 설립되었다.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명목으로 한성치과의사회를 경성치과의사회와 강제로 통합하여 한국인 치과의사는 단체활동을 할 수 없게 하기도 했다. ‘충치예방의 날’ 행사에서도 일제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고, 치과치료용 금을 허가제로 통제하며 치과재료를 배급제로 제한하였다.


  1919년 10월 朝鮮齒科醫學會는 학술 목적으로 柳樂達見 등이 주도로 결성한 단체다. 경성치과의학회는 1932년 10월 30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배경으로 柳樂達見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경성치과의학회의 설립은 조선치과의학회를 장악한 生田信保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였다. 회의 운영임원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조선치과의학회에서 발표한 한국인은 27명이며, 486개의 연제 중에서 약 15%인 75개를 발표하였고, 경성치과의학회에서 발표한 사람은 16명이며 481개중의 연제 중 약 11 %가 되는 52개를 발표하였다.


  치과의학회의 활동으로 인해 치과치료에 대한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을 실험대상으로 한 면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로는 柳樂達見의 실험적 치통 야기 방법, 인체에 유해한 물질인 수은 납 아비산, 발암성인 약품 벤졸 등의 사용, 예후가 불확실한 것으로 식민지에서 실험적으로 행한 치료 등 이었다. 심지어 인종 사이에 차별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치아의 배열은 인종과 민족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어 비교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약을 사용하기도 했다. 치통의 제거에 비알카로이드성 진통진정약의 연구 개발되기도 했으나, 습관성 부작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약인 모르핀이나 헤로인 등의 과다 사용으로 습관성 부작용은 흔한 일이었다. 또한 새로운 재료와 검증되지 않은 재료를 널리 사용하도록 권장하였다. 특히 금대용 합금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러한 일에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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