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현충원은 대한민국 공동체의 상징
전국 12개 국립묘지에서 일제히 추념식 거행
국립서울현충원 원주인은 선조의 할머니
육군묘지 조성하려다 국군묘지 거쳐 국립묘지
순국선열에 앞선 전몰장병 안장 아쉬움
아직도 묻혀 있는 김창룡 등 친일파 20인
‘허구’에 가까운 육탄 10용사 시비‧묘도 논란

6월 6일은 순국 선열과 호국 영령을 추모하는 현충일이다. 오전 10시 정각, 전국에 추모 사이렌이 울리면 온 국민은 일제히 묵념을 올린다. 같은 시각 국립현충원과 호국원 등 전국 12개 국립묘지에서는 조포 발사를 시작으로 추념식을 거행한다.
현충일이 아니더라도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공직에 취임하거나 공직 선거 출마를 결심하면 으레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조국과 겨레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곤 한다. 외국 국가원수가 내한할 때도 국립서울현충원에 참배해 추모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 관례다.

올해는 1956년 4월 25일 공포된 국방부령에 따라 현충기념일이 제정되고 그해 6월 6일 제1회 추도식을 연 지 70주년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전신인 국군묘지도 1956년 1월 16일 무명용사들을 처음 안장하고 정식으로 문을 연 지 꼬박 70년을 맞았다.
“한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려면 국립묘지에 가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국립묘지의 역사와 현황에 관해 상세히 아는 이가 많지 않을뿐더러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있다. 현충일이 왜 6월 6일로 정해졌는지도 분명치 않고,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자리나 이곳의 안장자 기준 등을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절기 ‘망종’을 현충일로 정했다는 정부 설명 근거 없어
국가보훈부는 “우리 민족이 최대의 수난과 희생을 당한 6·25가 발생한 달에 조상 제사를 지내온 24절기 중 망종을 택해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 현종 5년(1014년) 6월 6일에 조정이 거란 전쟁에서 숨진 병사들의 뼈를 집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가기록원 자료의 설명도 비슷하다.
그러나 당시 국무회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망종(芒種)은 벼와 같은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라는 뜻으로 제사와는 무관한 절기다. 더욱이 1956년 망종은 6월 6일이 아닌 5일이었던 데다 고려 기록에 나오는 날짜는 음력이다. 전몰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6월 가운데 기억하기 좋은 6일을 골랐을 것이라는 추정이 설득력 있다.

서유럽과 캐나다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을 전몰 용사를 위한 추도일로 기리고 있다. 2007년 캐나다 출신 한국전 참전용사 빈센트 커트니의 제안에 따라 전 세계인이 부산 유엔기념공원(유엔군묘지)을 향해 묵념하는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행사도 11월 11일 열리며, 2020년 유엔 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로 제정됐다. 미국은 5월 마지막 주 월요일이 현충일과 같은 메모리얼 데이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는 현충일이 야간 유흥업소 종사자들의 소풍날이었다. 나이트클럽이나 유흥주점 등이 1년 중 유일하게 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방송에서도 오락 프로그램을 줄이고 프로야구나 프로축구 등에서도 요란한 응원을 자제하긴 하지만 예전 같은 엄숙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학생을 동원하는 관제 행사도 많이 열렸다가 거의 사라졌다.
올해 정부가 정한 호국 보훈의 달 주제는 ‘호호훈훈 호국보훈’이다. 국가보훈부는 “그간 국민 다수가 호국 보훈을 무겁고 어렵게 느끼고, 나와 크게 관련 없는 과거의 일로 인식하는 측면이 있었다”면서 “국가유공자 희생과 공헌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평화롭게 웃을 수 있는 일상이 가능함을 기억하고 존경과 감사의 따뜻한 마음을 전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최초의 전몰장병 국가 추모 시설은 장충단
근대 이전에는 국립묘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의 공신전에 공신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을 뿐이다. 1900년 고종이 서울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순국한 군인들을 기리는 장충단(奬忠壇)을 설치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 것이 전몰장병 국가 추모 시설의 시작이다. 그 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희생자도 추가로 배향했다. 시신을 묻은 묘지는 아니어서 이곳을 국립묘지의 기원으로 보기는 어렵다.

일제는 장충단을 허물고 이 자리를 한반도 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1909년 추모대회를 여는가 하면 1932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사찰 박문사(博文寺)를 지었다. 1937년에는 중국 상하이 사변에서 숨진 육탄(肉彈) 3용사 동상을 세워 군국주의 선전장으로 꾸몄다.
해방 후 이국에서 숨진 독립유공자들의 유해를 봉환하면서 장충단 자리가 첫 번째 안장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과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서울 용산의 효창공원이 차선책으로 선택됐다. 이곳에는 정조 맏아들 문효세자 무덤(효창원) 등 왕실 묘역이 있었으나 일제가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서삼릉으로 옮긴 뒤 공원으로 꾸몄다.
김구는 일본의 박열 등과 힘을 합쳐 1946년 6월 16일 일본에서 봉환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三義士) 유골을 태고사(현 조계사)에 임시 안치했다가 7월 7일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의 가묘(假墓)도 함께 조성해놓았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조성환·차리석도 이곳에 묻혔다.

서울현충원에 교회·성당은 없고 절만 있는 까닭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하고도 독립유공자 서훈이나 순국선열 안장에 큰 관심이나 의지가 없었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 후 장충단공원에는 독립유공자 대신 여수·순천 사건으로 숨진 국군 등의 유해를 봉안한 장충사(奬忠祠)가 들어섰다. 이후로도 빨치산 토벌이나 남북한 충돌 과정에서 전사한 군경을 안장하다가 6·25 이후 전몰자가 급증하자 대안을 모색했다.
육군이 먼저 후보지로 경북 대구와 경주를 답사했으나 보류하고 국군묘지 조성으로 방향을 틀었다. 국방부가 여러 곳을 검토한 뒤 서울 우이동을 국군묘지 최적의 후보지로 평가했다. 하지만 북한과 가깝다는 점 때문에 제외되고 최종 낙점된 곳은 한강 남쪽의 동작동이었다.
동작동 국군묘지 터의 원래 주인은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다. 지금도 무덤이 이승만과 김대중 대통령 묘역 사이에 있다. 경내 서쪽 공작봉 기슭에 절이 있는 것도 선조가 원찰(願刹)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름은 화장사(華藏寺)였다가 1983년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바꿨다.

중종의 후궁인 안씨는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생전에는 품계도 낮고 존재감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1549년 사망해 양주군 장흥리에 묻혔다가 이듬해 과천현 동작리로 이장됐다. 중종의 적자(嫡子)인 인종과 명종이 연거푸 후사 없이 붕어하고 아들 덕흥군의 삼남이자 안씨의 손자인 하성군이 1567년 선조로 등극한 덕에 내명부 정1품 빈(嬪)으로 추존됐다.
덩달아 무덤도 동작릉으로 불리며 길지로 소문났다. 선조 이후 역대 조선 왕은 모두 안씨의 후손이다. 풍수의 대가 지창룡이 군용 헬기를 타고 후보지 4곳을 돌아본 뒤 동작동을 추천했다는 말이 전한다. 이승만 자신도 그곳에 묻힐 심산이어서 그에게 명당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는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 지세여서 후손이 발복하는 명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장자 대부분이 후손 없이 요절하고 말았다.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를 지낸 최창조는 호랑이가 숲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뛰쳐나오는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으로 본다. 호랑이가 건너뛰기에는 폭이 너무 넓은 한강이 가로막혀 있어 명당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폈다.
국방부가 1953년 1월 9일 제출한 건의서를 보면 국군묘지 선정 기준으로 교통, 면적, 용지 종별, 토질, 배수, 대민 관계 등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고 풍수에 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동작동이 선정된 결정적 이유는 배수가 잘되는 땅이고 북한과 거리가 떨어진 데다 주변에 민가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국가보훈부 2029년까지 국립효창독립공원 준공 계획
국군묘지는 1953년 9월 29일 이승만의 재가를 거쳐 1954년 3월 1일 착공된 뒤 1956년 개장했다. 1957년 4월 2일에는 신분이 확인된 전몰 용사를 처음으로 안장했고 1964년부터는 애국지사 김재근을 시작으로 독립유공자 묘역을 조성했다.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로 승격된 뒤 그해 7월 21일 순직 경찰관을 최초로 안장했다. 이승만·박정희·김영삼·김대중 대통령과 아웅산 참사 희생자 등 국가유공자들도 묻혔다. 외국인 유공자와 재일학도의용군 무덤도 있다.
대전국립묘지는 1985년 유성구 갑동에 준공됐다. 1996년 1월 동작동 국립묘지는 국립현충원, 대전국립묘지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개명했다가 2006년에는 국립현충원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바꿨다. 경기도 연천군 선서면에도 국립연천현충원을 2027년 준공하기로 하고 지난해 4월 23일 첫 삽을 떴다.
경기도 이천, 경북 영천, 제주, 경남 산청, 전북 임실, 충북 괴산에 국립호국원이 있고 강원도 횡성과 전남 장흥에도 2028년 준공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4·19 민주묘지, 광주시 북구 운정동의 5·18 민주묘지,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의 3·15 민주묘지, 대구시 동구 신암동의 신암선열공원도 국립묘지에 속한다.
효창공원을 국립효창독립공원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안은 지난 4월 발의됐다. 국가보훈부는 2029년까지 준공할 계획이다. 국립묘지에 속하지는 않지만 재외동포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등을 모신 충남 천안의 국립망향의 동산은 보건복지부가 관리하고 있으며,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인 부산의 재한 유엔기념공원은 유엔 산하 국제관리위원회 관할이다.
아사히신문은 75년 만에 ‘육탄 3용사’ 정정 보도…우리 언론은?
국립묘지 역사를 더듬어보면 국가가 나서서 안장하고 예우해야 할 순국선열을 제쳐놓고 전몰장병 무덤을 조성한 것으로 첫 단추를 끼운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지금도 서울 강북구 수유동과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 등지에 숱한 애국지사 묘소가 흩어져 있다.
독립유공자 묘역과 임시정부 요인 묘역 인근에 친일파들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발표 이후 일부는 후손이 파묘해 이장하기도 했으나 12기가 남아 있다. 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의 백낙준, 장군 묘역의 김백일·김홍준·신응균·신태영·이응준·이종찬, 대전현충원 김석범·백선엽·백홍석·송석하·신현준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박정희·정일권·안익태·김창룡 등을 합하면 20명으로 늘어난다.

서울현충원 현충문 오른쪽에 세워진 육탄 10용사 현충비와 바로 뒤 장병 6번 묘역 맨 앞줄의 10용사 묘도 시비의 대상이다. 국방부 전사와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1949년 5월 4일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 11연대 하사관교육대 서부덕 이등상사 등 10명은 박격포탄을 들고 북한 인민군 진지에 뛰어들어 폭파하는 전과를 올리고 산화했다.

성대한 장례식이 열리고 그를 기리는 연극, 군가 등이 만들어졌으나 의문점이 적지 않았다. 중징계를 피하려고 꾸며낸 거짓 보고가 억지 영웅담으로 비화됐다는 증언도 뒤늦게 나왔다. 이들의 활약이 사실이라 해도 가미카제 특공대처럼 자폭을 미화해 전체주의에 이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 같은 시비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군은 지금도 이들을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다.
육탄 10용사의 모델이 된 일본군 육탄 3용사는 1932년 상하이에서 폭약을 안고 적의 진지를 돌파했다고 알려져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불쏘시개가 됐다. 육탄 3용사는 오랫동안 진위 논란을 빚다가 결국 허구로 판명됐다.
최초 보도했던 아사히신문은 75년 만인 2007년 6월 13일 “현장에 가지도 않은 당시 특파원들이 전선에서 돌아온 장교 얘기만 듣고 꾸며낸 미담이었다”고 시인하는 정정 보도를 냈다. 우리 군과 언론은 과거의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과연 있을까?

이희용 줌렌즈
<2026-06-06> 민들레
☞기사원문: ‘호호훈훈 호국보훈’ 70년 맞은 현충일·현충원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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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친일·반민족 행위자에게 국립묘지 웬말, 당장 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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