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형 등 친일 매국 세력이 만든 희대의 악법
반민특위 맞서 생존 몸부림…치안유지법 뿌리
여순항쟁 직후 제정, 숙군 종료 직후 1차 개정
87년 6월 항쟁 뒤 일부 수정, 독소조항 그대로
대부분 형법으로 대체 가능…민주주의에 역행
UN인권이사회, 국가인권위 지속적 폐지 권고

해방 직후 당면 과제는 친일 과거사 청산과 자주독립 국가 건설입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친일파 청산을 반대합니다. 실제로 해방 직후 노덕술, 하판락, 안정묵을 비롯해 친일 고등계 경찰들은 쥐새끼처럼 숨어버립니다. 아예 경찰서에 출근하지 않습니다. 1945년 8월 16일~9월 초순 경찰서 출근율이 20%에도 미치질 않았습니다. 1945년 해방 직후인 8월 16일~8월 23일 1주일 동안 전국에 걸쳐 사적으로 경찰을 응징, 처단한 사건이 177건 발생합니다. 그중 111건이 조선인 경찰에 대한 응징, 처단이었습니다.1) 조선인 경찰이 일본인 경찰보다 2배 많았습니다. 조선인 고등계 형사들의 고문 악행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경찰 수사는 곧 고문이기에 다리 관절 꺾기 고문, 화롯불에 달군 쇠젓가락 고문, 비행기 태우기, 통닭구이, 전기고문, 고춧가루 물고문은 기본이었습니다. 주사기로 항일지사의 피를 뽑아 다시 항일지사의 얼굴에 뿌린 착혈 고문를 자행한 자도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배후를 대라며 15살 어린 중학생의 혀를 펜치로 잡아 빼 죽이기도 했습니다.2)

친일 경찰의 고문 기술은 해방 후 1990년대까지 이어져 ‘수사=고문’으로 인식됐습니다. 특히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의 남영동 칠성판 물고문과 관절 뽑기 등으로 지속되었습니다. 이근안은 자백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문 기술을 일종의 ‘예술’이라 칭송했습니다.
미군정 당국은 그런 악질 친일 경찰들조차 다시 경찰로 기용합니다. 맥아더 태평양 미육군 최고사령관은 1945년 9월 7일 포고령 1호를 공표하면서 “종래의 직무에 종사할 것을 명령”합니다(포고령 제2조). 미군을 ‘점령군’으로 표현하면서 “미군에 반항 행동을 할 경우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하겠다”고 발표합니다(포고령 제3조). 그러자 노덕술, 하판락, 안정묵 친일 경찰들이 고개를 쳐들고 들어와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경상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 경기도 광주경찰서장으로 근무합니다. 그러나 1948년 제헌의회 소장파 의원들이 반민족행위 처벌법(약칭 반민법)을 제정해 1948년 9월 22일 자로 시행합니다.
그러자 친일 매국노들은 화들짝 놀라 이튿날 9월 23일 ‘반공 구국 총궐기 국민대회’를 곧바로 개최합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이 대회에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범석, 대법원장 김병로가 참석해 대회를 치하하며 친일 세력들의 준동을 추어올립니다. 친일 반민족 세력은 생존 차원에서 ‘반공’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그들 친일 반민족 세력들은 ‘국론 통일과 화합에 방해된다’며 반민법 시행을 결사반대합니다.

놀랍게도 이 반공 구국 대회를 주도한 친일 매국노가 이종형입니다. 이종형은 해방 직후 한국반공단 단장이자 대한일보사 명예 사장으로 반민특위에 적극 대응하며 가짜뉴스를 양산한 A급 친일파입니다. 실제로 이종형은 <반민법>을 <망민법>이라 비아냥거린 인물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한때 의열단 출신 독립운동가였지만 항일 애국지사 남자현 여사를 밀고해 죽음에 이르게 한 변절자이자 일제 밀정으로 수많은 항일 투사들을 밀고해 죽음에 이르게 한 매국노입니다. 이종형은 해방공간 초기 이승만, 김구의 신임을 얻었으며 홍택희, 최란수,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이 주도한 암살 음모 실행범 백민태와도 가까운 사이였으며 2대 국회의원을 지낸3) 악질 친일파입니다.
실제로 친일 반민족 세력은 사생결단으로 반민법에 맞서 싸웁니다. 그들은 반민법 시행 이틀 전인 1948년 9월 20일에 국가보안법 전 단계인 ‘내란 행위 특별처벌법’을 전격 발의합니다. 대동청년단 출신 국회의원을 앞세워 선수를 칩니다. 그리고 두 달 뒤 ‘내란 행위 특별처벌법’에서 국가보안법으로 명칭을 바꿔 1948년 12월 1일 제정 즉시 바로 그날 시행합니다.
국가보안법은 일제강점기 치안유지법을 모방한 악법입니다. 국가보안법 제정 당시 총 6개 법률 조항은 치안유지법 제정 당시 총 7개 조항을 고스란히 본뜬 것입니다. 치안유지법 제3조 “그 목적이 되는 사항의 실행을 선동한 자는” 이란 표현은 국가보안법 제3조 “그 목적한 사항의 실행을 협의 선동 또는 선전을 한 자는” 이란 문구와 비슷합니다. 1925년 치안유지법 제정 당시 7개 조항은 이후 1941년 개정 당시 총 65개 조항으로 늘어납니다. 마찬가지로 1948년 국가보안법 처음 제정 당시 6개 조항이 13차례 개정 후 총 25개 조항으로 늘어납니다. 정세 변화에 즉자적으로 대응한 후에 다시 정교하게 다듬는 방식 또한 비슷합니다. 특히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베낀 국가보안법 핵심 법조문을 읽다 보면 서늘한 기운마저 느낍니다.
치안유지법 제1조: “지도자의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 (…)에 처하고, 결사에 가입한 자 또는 결사의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국가보안법 제1조: “(생략)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에 처한다.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하여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3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은 사회주의 계열 항일독립운동 탄압과 관련이 깊습니다. 조동호, 조봉암, 홍덕유, 김재봉, 박헌영, 김약수, 주종건, 김찬, 이봉수 등 사회주의 계열 항일 독립투사들이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을 창립합니다. 조봉암을 비롯해 1919년 3·1 시민혁명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들이 20년대 항일독립운동 노선상의 변화를 주도한 사건입니다. 동대문 밖에서 열린 「전조선기자대회」(4/15~17)로 일제 경찰의 감시를 따돌리고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황금정(현 을지로) 고급중화요리집 아서원에서 창당대회를 열었습니다. 허를 찔린 조선총독부는 나흘 뒤 4월 21일 총 7개 조항으로 구성된 치안유지법을 즉각 제정해 탄압에 들어갑니다.

치안유지법은 일제강점기 내내 사회주의-민족주의 계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항일 독립지사들을 탄압하는 최악의 악법으로 작용합니다. 민족 저항시인 윤동주와 송몽규 역시 194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징역 2년 형을 받습니다. 그런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해방 6개월을 앞두고 스물일곱 살의 두 동갑내기 청년은 생체실험 끝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거나 눈을 부릅뜬 채 옥사합니다. 전쟁 말기로 치달을수록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어간 청년들이 64명(1943), 131명(1944), 259명(1945) 등으로 사망률이 급증한 현상은 생체실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4) 더구나 1941년에 개정된 치안유지법 제39조 예방구금 조항으로 형 집행을 마친 항일지사들조차 범죄의 우려가 현저하다는 검사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재차 투옥되었습니다.

친일 반민족 매국 세력을 기반으로 한 이승만 독재정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넉 달도 안 된 1948년 12월 1일에 국가보안법을 제정 즉시 시행합니다. 국가보안법이 시행되던 1948년 12월은 10·19 여순항쟁(1948)을 잔혹하게 짓밟고 여순항쟁으로 촉발된 군대 내 숙군 학살(1948~1949)과 제주 4·3학살이 자행되던 시기였습니다. 군대 내 공산주의자 척결을 외치며 이승만의 절대권력을 등에 업은 김창룡은 숙군 과정에서 무고한 장병들을 처형합니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뒤에 대규모 검거 선풍이 불어 1949년 4월까지 5개월 동안 8만 9700명이 넘는 시민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됩니다. 1949년 한 해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된 사람만 11만 명이 넘을 정도였습니다.5)

특히 제주 4·3 학살이 집중되던 1948년 11월~1949년 1월 와중에 국가보안법이 시행됐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국가보안법 시행과 더불어 우리는 ‘이승만의 양아들’로 불린 방첩부대장 김창룡의 극악한 만행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는 1950년을 전후한 군인 학살과 민간인 학살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의 절대 신임 속에 김창룡은 붉은 고추만 보아도 즉각 처넣고 싶고 여성들의 붉은 치마만 보아도 온 신경을 곤두세워 공산당과 연관시켜6) 볼 정도로 빨간색에 집착이 강렬한 A급 친일 매국노였습니다. 제주 4·3 학살과 숙군 작업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권은 1949년 12월 19일 국가보안법 1차 개정을 단행합니다. 총 6개 조항을 18개 조항으로 늘려 국가보안법을 세밀하게 전부 개정합니다.
1980년 5월 광주 학살 이후 전두환 군부 세력은 국가보안법을 6차 개정한 즉시 그날 시행합니다.(1980. 12. 31) 제2조 반국가단체에 전두환 군부 정권은 “공산 계열의 노선에 따라 활동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도 추가 삽입합니다. 그 결과 60~70년대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 시절도 그랬지만 전두환 군부 독재 시절에도 무수히 많은 간첩 조작 사건을 양산합니다. 모두 군사독재정권이 국가보안법을 뒷배로 활용한 만행들입니다. 중앙정보부, 보안사, 치안본부(오늘날 경찰청) 대공분실, 검찰 안가, 특별조사실 등에서 자행된 고문 조작을 70~80년대 당시 판사들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 시절 공안사건은 꼭두각시 재판이었습니다.7) 당시엔 공안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 사건조차 고문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고문 피해 사실을 폭로해도 대부분 귀를 닫았습니다.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 1991년 8차 국가보안법 개정에서 “공산 계열의 노선에 따라 활동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 조항을 삭제합니다. 나아가 국가보안법을 “해석 적용함에 있어서는 (…)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조항을 제1조에 첨가합니다. 비록 선언적이고 형식적이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일부 진전된 형태입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조항 가운데엔 잠입·탈출(6조), 찬양·고무(7조), 회합·통신(8조) 등 기본권을 침해하는 독소조항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에서 형식적 민주주의 흉내를 취했을 뿐입니다.

국가보안법 처벌 조항은 대한민국 <형법>으로도 충분히 처벌이 가능한 현실입니다. 형법 제87조(내란), 제90조(예비, 음모, 선전, 선동), 제91조(국헌 문란) 제92조(외환 유치), 제98조(간첩), 제99조(일반 이적)로 모두 처벌할 수 있고 국가 보안 또한 굳건히 지킬 수 있습니다.
지난날 국가보안법은 국가안보를 위한 법이기보다 독재정권을 지키기 위한 악법으로 기능해 왔습니다. 지나온 우리 근현대사가 이를 증명해 줍니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투사들을 치안유지법으로 탄압하고 해방 후 치안유지법에서 국가보안법으로 명칭만 바꿨을 뿐입니다. 그 결과 제주 4·3항쟁, 여순 10·19항쟁, 60~70년대 민주화운동, 심지어 80년 광주민주화운동까지 역사 속 불의에 맞서 독립과 정의를 외쳤던 항일독립지사와 민주화운동가, 그리고 평화통일을 지향한 사람들까지 반역자로 몰아 조작했던 악법이 바로 국가보안법입니다.
UN 인권이사회는 34년 전인 1992년에, 그리고 1999년과 2005년에 대한민국 정부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히 권고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도 2004년부터 2020년까지 지속해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해 왔습니다.
21세기 오늘날 K-문화가 전 세계로 전파되고 K-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우는 대한민국입니다. 전 세계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본받고 싶어 끊임없이 오가며 교류하는 오늘날, 언론과 표현의 자유,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옥죄는 국가보안법은 헌법 가치인 기본권과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위헌법률입니다. 무엇보다 창의성을 존중하고 발휘해야 할 21세기에 20세기 냉전 시대 낡은 유물인 국가보안법을 고집하는 것은 고인 물처럼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이재명 정부는 국민주권정부답게 정부 입법 발의로 국가보안법을 즉시 폐기함으로써 국민 모두 자유로운 생각이 흘러넘치는 진정한 자유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길 기원합니다.
<참고문헌>
1.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1986),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216~217쪽.
2. 하성환(2017),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살림터, 224쪽.
3. 김두식(2018),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법률가들』, (주)창비, 378~379쪽.
4. 김수복 외(1999), 『나한테 주어진 길』, 웅동, 196~197쪽.
5. 강정구(1996),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서울:역사비평사, 36쪽.
6. 김혜진(1994), 「김창룡, 일제 관동군 헌병에서 대한민국 특무부대장까지」,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청년사, 187쪽.
7. 박원순(1992), 『국가보안법 연구 2 – 국가보안법 적용사』 서울: 역사비평사, 572~573쪽. 박원순(2006), 『야만시대의 기록 1』, 서울: 역사비평사, 113쪽에서 재인용.
하성환 시민기자
<2026-03-09> 민들레
☞기사원문: K-민주주의 시대, 이재명 정부에서 국보법 끝장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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