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원 사성을 지낸 친일파 박제봉과 부천을 빛낸 박제환
부천시청 1층 로비 한켠에는 ‘부천을 빛낸 분’이라는 코너가 있다. 부천의 근현대사에서 사회에 이바지한 업적이 뚜렷하고 시민들의 모범이 되는 6인을 부천시 차원에서 알리고 있다.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 부천대학교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한항길 지사, 민족시인 변영로 선생, 풀무원 공동체 창시자인 원경선 선생, 사회봉사에 이바지한 최희섭 선생과 함께 박제환 선생이 소개되어 있다. 박제환 선생은 해방이 된 이듬해 소유하고 있던 땅을 매각하여 부천농업중학교 설립하여 부천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박제환 선생은 부천 역곡안동네로 불리는 ‘벌응절리(伐應節里) 출신으로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죽산박씨가 뿌리를 내려 대대로 살던 곳이다. 시민들은 박제환 선생을 국회의원(2대, 5대)과 농림부장관을 했던 고위관료로 알고 있지만, 경학원 사성을 지냈던 박제봉과 형제라는 것은 잘 모르고 있다.
2016년 홍종욱(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이 발행한 논문 <교토 유학생 박제환의 삶과 실천 -문학청년, 사회주의자, 식민지관료>엔 “박제환의 삶에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피해갈 수 없었던 근원적인 문제인 친일과 반일, 혹은 저항과 타협의 문제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총독부 관료이자 친일 지식인이었던 형 박제봉의 존재에 유의하였다”라고 두 사람이 형제지간이었음이 언급돼 있다. 이외에도 부천 춘덕산(역곡동)에 두 사람의 무덤이 나란히 위치해 있기도 하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이지만 둘의 인생과 사후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고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삶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 박제봉
박제봉(1892~1964)의 인생은 교육자와 촉탁 그리고 유림(儒林)으로 요약할 수 있다. 1892년에 태어난 박제봉은 1916년 10월 경성의 수하동공립보통학교 부훈도가 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된 것이다. 1918년에는 경성 매동공립간이실업학교 훈도 겸 매동공립보통학교 부훈도를 지냈으며, 여러 학교를 거치며 1927년 경성상업학교와 경성 수하동상업보습학교 교유를 끝으로 교육자를 그만두었다.
1928년 직업을 바꾼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과 촉탁이 된 것이다.박제봉은 촉탁 재직 당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7년 8월에 조선총독부 학무국 문서과에 국방헌금으로 1000원을 헌납하였다. 이러한 국방헌금 미담은 매일신보, 동아일보, 경성일보 등에 보도되었으며, 박제봉이 받는 월 수당이 95원이었는데, 무려 1000원을 헌납하였다.

1939년 11월에는 학무국 촉탁을 그만두고,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참사를 맡았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유림의 친일단체로 조선총독부를 지원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연합하여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위한 정신운동에 나섰다.
1941년과 1942년에는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經學院)의 사성(司成)을 맡았다. 경학원은 조선총독부 직속기관으로 성균관을 대체하여 만들었으며, 식민지배 정책과 이념을 홍보하는데 활용하였다. 경학원 사성으로 있으면서 조선유림성지순배단의 간사로 1941년 10월 일본의 이세(伊勢)신궁과 메이지(明治)신궁을 비롯한 성지순례를 다녀왔으며, 1942년에는 총독 미나미(南次郞)와 정무총감 오노(大野)를 위해 전별시를 지었다. 특히 총독 미나미를 ‘살아있는 부처(活佛)’라고 칭송하였다.
경학원 사성은 자발적 친일을 하지 않으면 오를 수 없는 직책으로 그 자체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박제봉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국회의원과 농림부장관을 역임한 박제환
박제환선생(1905~1995)의 인생은 일제강점기에는 문학청년과 사회주의자 그리고 식민지 관료, 해방이후에는 고위 관료로 요약할 수 있다.
선생은 어린나이에는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 동몽선습 등을 배웠으며, 열세 살이된 1917년에 서울의 서울의 수하동(水下洞)공립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행렬에 참여한 후 학교에서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로 인해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이 취소되었으며, 대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을까? 선생은 휘문고보에서 정지용, 이선근, 박팔양 등과 교류하며 문학활동을 하였다.
휘문고보 졸업 후에는 1923년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유학을 하는 동안 1927년 6월에는 신간회(新幹會) 교토지회 서무부 소속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28년 4월 8일 조선청년총동맹 재일본조선청년동맹 경도지부창립대회에 참여하여 임시의장을 맡은 후 유진화, 이홍연과 함께 경제부 신임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8년 10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입회가 밝혀져 수배가 내려졌으며 동년 11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후 12월 수배가 해제되었다.
이후 귀국하였으며 식민지 관료의 삶을 살았다. 1931년 1월 24일 매일신문에 의하면 ‘농촌의 도박을 근절하고, 빈농의 경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제승기 27대를 구입하였으며, 더 나아가 재료와 연료까지 무상으로 제공했다.’고 전하고 있다.
1932년 말에는 경기도 ‘地方社會主事(富川郡在勤)’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경기도 내무부 지방과 산업서기, 경기도 산업부 농촌진흥과 산업서기 등을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경기도 식량과장을 맡았으며, 1946년 2월 군정청을 그만 둔 후 한강(漢江)수리조합장이 되었다. 특히 1949년에는 전 재산인 13만5천여평을 기부하여 부천농업중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현재 부천중학교의 모태가 된다. 이 기부로 박제환 선생의 이름이 부천에 크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선생의 호인 ‘지봉’을 모체로 하여 가톨릭대학교 부근에 ‘지봉로’가 설치되었다.

1950년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와 1960년에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으며, 장면낸각의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형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동시대를 살았지만 후대에 인식되는 이미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형은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로, 동생은 3.1운동에 참여한 후 식민지 관료를 지냈지만 해방 이후 재산을 기부하여 부천의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지역의 어른으로 인식되고 있다.
나라와 공동체에 위기가 왔을 때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할 것인가?’를 죽산박씨 두 형제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박종선 기자
<2026-01-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죽산박씨 두 형제의 ‘한시대 다른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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