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한국독립당 기관지 『한민』 주필 엄항섭 선생이 한국 광복 성립 전례를 뵈옵고 그 진상을 가져 임시정부 봉대에 성충이 가작한 미국, 멕시코, 쿠바 재류 동포에게 뵈어주기 위하여 왜적 비행기의 작격을 피하는 방공호에서 전례 성황을 기록하여 비행 우편으로 본보에 투고하였으므로 본보는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 게재하여 일반동포의 일람을 공급한다. — 신한민보 편집자
쌩— 쌩— 시계 소리에 나는 놀라 깨었다가 한숨에 방문을 열고 보니 컴컴한 하늘에는 별만 반짝거리고 고요한 세상에는 숨소리조차 잠잠해졌다. 이것이 내일의 공작을 위하여 오늘의 피곤한 몸을 쉬는 우주만물의 일상 행사인가 한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와 전등 아래 몸시계를 비춰보니 바로 3시였다. 오늘 7시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를 거행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다른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광의 전례를 준비하기 위하여 연일 바빴다. 그런 까닭에 몸도 상당히 곤하였지만 워낙 잠을 설치고 겸하여 신경이 흥분되었던 관계로 밖에서 울리는 자명종 소리에도 놀라 깬 것이다. 10리 밖에 있는 식장에 가서 외빈을 초대할 책임을 맡은 나는 남보다 먼저 대령할 의무가 있는 관계로 비록 시간이 좀 이르기는 하지만 마음놓고 다시 더 잘 수는 없었다.
나는 소제를 마친 후 옷을 단정히 입고서 깊이 잠든 중경의 밤거리를 밟고 식장을 향하여 나갔다. 이 밤에 이 거리로 걸어 나가는 것은 나 하나뿐이려니 하였더니 수십 리 밖 향촌의 농부들은 벌써 채소를 메고 중경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생만을 위하여 피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항전의 근거지요 항전 중국의 총사령부인 중경의 백만 시민에게 활력을 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공로는 전방 장사에게 지지 않는 것이다. 이 새벽에 이 거리를 걸어보지 아니한 사람은 저들의 공로를 모를 것이다. 신흥 중국이 최후 승리를 자신하는 것도 전선 장사와 후방 인민이 이같이 일치하게 분투하는 까닭이다. 나는 여기서 또 한번 교훈을 얻었다. “승리는 오직 분투하는 자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더욱 심각하게 느꼈다. 자기를 위하는 자도 남을 위하는 자도 오직 분투하는 데서만 성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22년(1940) 9월 17일! 이날은 우리가 손꼽아 기다리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를 거행하는 날이다. 이날은 우리 한국 혁명사상의 가장 정채 있는 또 하나의 단면이다. 원수 일본을 박멸하는 무장행동에 있어서 획기적 신기원을 세우는 첫날이다. 3·1운동의 정통을 이은 임시정부 명의하에서 조직된 한국광복군은 3·1정신 관철의 사자이며 3·1운동 계속의 첫 봉화이며 국제 항일연합전선에 처음 나타나는 생력군이며 무편무당하게 한국 3천만 전체를 대표하여 세계 민주진선에 참가한 용감한 한국 국군이다. 그러므로 만천하 혁명동지와 정의의 인사는 우리 광복군에 대하여 내외국인이 일치하게 열렬히 동정하는 것이다. 중경의 여론계는 중국 공산당의 기관지 『신화일보』에서 비교적 냉담한 외에 한자보, 영자보가 총동원하여 현저한 지위에 큼직한 제목으로 한국광복군에 관한 소식을 다투어 게재한 것이다. 『신한민보』 1941.1.23

소련의 타스사에서도 큰 흥미를 가지고 큰 동정을 표하는 것이다. 그 통신사 사장은 9월 15일에 일부러 국제선전처로 한국독립당 선전부 주임을 방문하고 광복군에 관한 모든 소식을 수집해갔다. 이와 같은 정서 중에서는 왜적의 주구로도 마음속의 감동이 없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한국광복군 성립의 희보가 쇠줄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 퍼질 때에 우리 한국사람 치고는 누구나 기쁨에 겨워 미칠 듯할 것이다. 조국의 반역자도 민족의 패륜아라도 이 시간에는 뉘우칠 것이다. 왜? 그들의 가죽 밑에 흐르는 피만은 우리와 꼭 같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날에 그들의 느낌도 우리와 꼭 같은 까닭이다. 왜적이 우리 강산을 짓밟은 지도 이제 30년이지만 신대한의 새살이 수십 만 선열의 피 가운데서 뭉게뭉게 자라나는 것이다. 최근에도 왜적이 우리 임시정부의 정청(政廳)을 폭탄으로 부수고 한국독립당의 중경 사무소를 연소탄으로 새살은 그 지반 속에서도 뭉게뭉게 자라나는 것이다. 어찌 그뿐이랴. 3천만의 심장 속에서도 자라는 것이다. 한국민족의 이 위대한 발전을 보는 왜적은 실로 큰 공황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환상을 그리며 장래 행복의 큰 장면까지 상상하다가 필경 기쁨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옷깃을 적시게 되었다. 비로소 발을 멈추고 보니 ……가릉빈관(嘉陵賓館) 문앞에 와 섰다. 가릉빈관은 (15줄 판독 불가) 북쪽 허리 대수림이 우거진 곳에 가릉빈관이 가릉강을 굽어보고 앉았다. 뜰에 가득한 기화요초(琪花瑤草)는 바람의 은혜를 입어 향기가 그치지 아니하며 가지 틈으로 전해오는 진금비조(珍禽飛鳥)가 부르는 노래는 우주의 대자연을 찬미하는 듯하다. 아침 해가 치밀어 오를 때에 대지를 덥혀오는 청신한 공기는 인간의 근심을 깨끗하게 씻어내며 석양에 돌아가는 한가한 돛대는 나그네의 허우룩한 심회를 위로하기에 넉넉하다.
각설(却說), 가릉빈관 정문에는 정답게 교차한 한중 양국의 국기가 바람에 펄펄 날린다. 나는 부지불각중에 머리를 숙여 양대 국가를 대표한 그 국기를 향해 만강 일정의 경의를 표한 후에 점원에게 인도되어 객실에서 차를 마시게 되었다. 큼직한 객실에 홀로 앉은 나는 다시 희망의 환상중에서 자기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미구에 오늘 전례에 책임을 가진 동지들 중에 부지런하고 복무심이 강한 노 정력가 차리석 선생이 먼저 당도하고 그 뒤에 이어서 몇 분이 오게 되었다. 『신한민보』 1941.1.30
먼동이 튼다. 가릉빈관 주위에는 호위 책임을 진 중국 경관들이 어느 틈에 벌써 엄밀한 경계망을 드리웠고 이 가운데로 김구 선생은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과 임시정부 국무원, 한국독립당 중앙간부제 선생들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엄숙하고 견결한 태도를 가진 중에도 만면 춘풍을 띄었다. 그 표정은 마치 무한히 기쁜 중에 겸하여 항전 필승, 독립 필성의 강한 신념과 결심을 표하시는 듯 하였다. 그 다음에 군복 입은 수십 명의 총사령부 직원들은 씩씩하고 늠름한 기상으로 보조를 맞춰 식장으로 바로 들어갔다. 아침 5시까지 백여 명 동포는 전부 집중되었다. 내빈 중에는 본 지방 최고장관인 위수총사령 류치[柳琪] 장군이 제일착으로 왔다. 비만한 신체를 가지고 높은 지위에 처한 그로서 남보다 먼저 외국사람의 새벽 예식에 참여하는 것은 신흥 중국의 기상을 말없이 설명하는 것이다. 류치 장군의 뒤를 이어서 중국 각 기관의 대표와 요인이며 각국 신문사와 통신사의 기자들 약 백여 명이 답지하였다. 정의 옹호로서 이름이 천하에 떨친 천주의 사자 우빈(于斌) 주교의 참석은 더욱 의의가 깊은 것이다. 이와 같은 성황 중에 문전의 거마는 장사진을 벌였다. 내빈은 일일이 초대원에게 인도되어 객실로 들어가고 거기서는 우리 요인들과 담소를 교환하였다. 정각이 되매 내빈은 이날의 주인인 김구 선생에게 인도되어 식장으로 들어갔다.

식장은 객실 오른편에 달린 큰 홀인데 그 안은 상당히 화려하고 광대하다.
강대 주벽 중앙에는 한쪽 대형의 태극기를 뚜렷이 걸고 대상에는 좌우 양벽에 수십 기의 홍람색으로 어여쁘게 꾸민 식장 중에는 다 각각 여러 개 소형의 양국 국기가 꽂혔다. 강대 중앙 상위에 있는 두 개의 화병에는 오색 향기로운 꽃이 가득하고 그 상 앞에는 각 방면에서 들어온 화환, 화람이 수북하다. 좌우 기둥에는 항일의 정서가 뜨거운 표어가 많이 붙었는데 그중에는 이제심(李濟深. 광동독군) 장군의 주련도 있다. 이 식장 장식 중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강대 위 천장에 높이 달린 붉은 비단에 흰 글씨로 큼직하게 쓴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의 14자였다. 우리 글자 위에는 한자로 조금 작게 그와 같이 쓰고 우리 글자 아래는 영자로 “The Inaugural Ceremony of the Headquater of Korean Independence Army”라고 썼다. 강대 우편에 배설한 특별석에는 총사령관과 당정 요인이 앉고 그 다음에는 각국 기자들이며 좌편 특별석에는 외국 귀빈들이 앉았다. 강대 앞 전면에는 총사령부 직원과 그 뒤에 동포들이 좌정하고 그 좌우에는 내빈이 가득하였다.
먼저 김구 선생이 개회를 선포코저 장내에는 별안간 사방에서 번개가 번쩍거리고 찰칵찰칵 소리가 들리니 이것은 중국 홀의 중국전형 제편창과 각 신문사 카메라맨들이 공작을 개시한 것이다. 『신한민보』 1941.2.6
순서에 의하여 한중 양국의 국가를 부르고 우리 국기에 최경례를 행한 후에 선열을 추모하여 3분간 정묵하였고 일동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김구 선생이 서서히 입을 열어 엄숙한 어조로 식사(式辭)를 시작하매 사령부 총참모 김학규 동지는 유창한 중국말로 번역하였다. 선생은 먼저 임시정부의 광영스러운 공로와 한중 양국의 나눌 수 없는 이해관계를 말하고, 다음에 중국의 최고 영수가 중국 경내에서 한국광복군의 조직활동을 허락한 데에 대하여 감사한 뜻을 표하였다. 최후에 선생은 우리 광복운동의 정통을 이은 임시정부 기치 아래서 중국에 있는 우리 광복운동자의 총단결인 한국독립당이 창립된 지 미구에 중화민국 전시 수부(首府. 수도인 중경을 말함)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를 거행하게 된 것은 중대한 의의를 가진 것이며, 이것으로써 우리에게는 비로소 승리의 서광이 비치는 것이니 동지 동포들은 독립을 쟁취하고 비로소 중국의 항전을 협조하려는 우리 광복군의 최후 목적을 관철케 하기 위하여 인력 정력 물력을 광복군으로 집중하자고 대성 질호(叱呼)하였다.
개식사가 끝난 후에 홍안백발의 홍진 선생이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훈사를 낭독한바 사의가 참통하고 비장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추연 정금하게 하였다. 그중에는 전체 장사를 면려하는 간곡한 구절은 그들의 심장을 뚫고 들어가 왜적을 무찌를 용기를 더욱 강하게 하였다. 순서를 따라 박학다문한 조소앙 선생이 반이나 넘는 흰 수염을 가장 득의의 태도로 쓰다듬어가며 대상에 올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보고서를 낭독하였다. 이 보고서는 자못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이 길어서 생략한다. 그러나 한문으로 원문을 보내어 독자에게 번역 소개할 기회를 제공하려 한다.
보고가 지난 뒤에 자그마한 조완구 선생이 한국독립당을 대표하여 축사를 진술하였다. 그는 비록 왜소하나 딱 버티고 서니 일부당관 만부막개(一夫當關 萬夫莫開: 한 명의 군사가 관문을 지키면, 만명의 군사도 이를 뚫지 못함)의 형세가 있다. 그는 먼저 우리의 다년 희망하던 광복군이 중국의 용맹스러운 항전으로 인하여 적세가 바야흐로 붕괴되려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에 성립되었으며 광복군의 성립으로 인하여 조국의 광복이 가까워진 것을 축하하고 끝으로 한국독립당에서는 광복군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인력 정력 물력을 임시정부에 공헌하기로 결의한 것을 보고하고 아울러 전지로 향하는 장사들에게 간곡한 말로써 면려하여 기염을 만장이나 북돋웠다.
내빈측에서는 제일 먼저 류치 장군이 축사를 하였는데 그 내용으로 말하면 한중 양국의 관계를 각 방면으로 연구 분석하여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연유를 소상히 설명한 동시에 동아의 영원한 화평과 한중 양국의 완전 독립은 한중 양국이 긴밀히 휴수(携手)하고 왜적을 타도함에서 비로소 성공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류치 장군은 우리 광복운동을 열렬히 원조해준 한국 친구의 하나이다. 그가 하남성 주석으로 있을 때에 적지 아니한 수류탄을 김구 선생에게 보낸 바 이봉창 의사가 왜왕 소화를 때린 폭탄은 그중에 하나였다. 필자는 이 재미있는 사실을 더 주저할 것 없이 독자에게 자유롭게 소개하게 된 것을 비상히 유쾌하게 느낀다. 『신한민보』 1941.2.13
류치 장군의 축사가 끝난 뒤에 중경시당부 대표 왕관지(汪觀之) 선생은 격앙 강개하게, 중소 문화협회 대표 장서만(張西曼) 선생은 침착 견결하게 다 각각 열변을 토하였는데, 그 대의는 류치 장군의 축사와 비슷하였다. 내빈 축사가 지난 후에 민필호 동지의 영양 민영주는 배달청년 미술연구사를 대표하여 한국광복군의 비단기 한 폭을 드린바, 총사령관은 군을 대표하여 이것을 받았는데 기에는 ‘광복조국’ 넉자를 썼다. 헌기(獻旗)를 마치자 총사령관은 늠름한 기상과 장엄한 태도로서 정면을 향하여 다시 축립하였다. 그의 연세는 오십을 넘은 지 수년에 불과하지만 두 뺨이 오무라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것을 보아 삼군을 거느리고 몸소 백번 싸운 전장으로부터 온 노장군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간곡하고도 겸손하며 견결하고도 비장한 어조로 간명한 열변을 토하여 청중을 감동시켰다. 그는 벽두에 한중 양방의 당·정·민 각계의 열렬한 원조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더욱 현명한 장개석 장군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다음에 그는 말하기를 비록 자기의 재능이 중임을 맡기에 부족하나 각개의 호의를 보답하며 군인의 천직을 다하기 위하여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저의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하니 다만 죽은 후에나 그칠 따름이다. 제갈량의 <출사표>에서 나오는 경구)하겠다고 하였다. 비록 그 말은 겸손하지만 그중에 비장한 뜻이 가득 차셨다. 끝으로 그는 중국 각방에 산재한 우리 무장 청년들과 기타 각 방면의 우리 열혈적 혁명청년들이 광복군이 성립되는 소식을 듣고 바람에 구름 밀리듯 일제히 모여드는 중이라고 보고하였다. 동시에 우리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 여부가 전혀 광복군이 목적을 달성하고 못하는데 달렸으니 동지 동포는 인력 정력 물력을 군으로 집중하여 달라고 답사하였다.
답사가 지난 후 김붕준 동지의 영양 김정숙은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 위원회에서 장개석 장군에게 보내는 사례사를 낭독하고 공진원 동지는 우리의 전방 장사를 격려하는 격문을 낭독하였다.

때는 아홉시 반. 이에 주례는 전례식이 완료된 것을 선포하였다. 우리 혁명 진행과정에 있어서 자못 의미심장한 역사적 의의와 찬란한 광명을 가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는 이와 같이 200명의 내외국인의 성대한 회합으로서 가장 격앙 강개하고 동일한 원수에 대한 적개심이 충만한 중에서 각 개인의 머릿속에 큰 기록을 깊이깊이 새겨놓고 원만하고 고요하게 막을 닫았다. 본래 왜적의 심한 공습이 연일 계속되었던 관계로 너무 이른 시간에 손님이 많이 오기 어려운 것을 고려하면서도 꼭두식전에 개식을 하기로 한 것인데 다행히 이날만은 아침 열 시까지 안개가 자욱하여 식의 진행에 장애가 없었으며 열 시 후에도 날은 평시 같이 말 것이지만 왜적의 비행기는 온종일 감히 습격을 못하였다.
우리는 상제(上帝)께 감사하며 조종(祖宗)께 경의를 표하자!
대한의 형제자매여 군의 완미한 성공을 위하여 다 같이 축복하자!
그리고 다 각각 “나는 광복군에 대하여 마땅히 어떠한 의무를 져야 옳은가, 그 의무를 얼마나 이행하였나” 하는 것을 아침저녁으로 자문자답해 보자!
대한민국 22년(1940) 9월 17일 중경에서 『신한민보』 19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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