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회원마당]
서울시의회에 울려 퍼진 외침, “친일파를 청산하라”
광복 직전 마지막 의열투쟁, 부민관 폭파 의거 80주년 기념식 열려
이정윤 독립운동가 백기환 선생 후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광화문에 위치한 서울특별시의회 앞을 무심히 지나친다. 마치 친일 청산의 숙제를 잊은 듯. 하지만 80년 전 이곳에서 총독부와 친일파를 겨냥해 다이너마이트를 던졌던 청년들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하고 있다.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무심해선 안 된다.”
바로 이곳, 서울시의회 건물 안에서 개최된 부민관 폭파 의거 80주년 기념식에서 이와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친일파를 청산하라! 대한민국 만세!”
7월 24일 오후, 서울특별시의회 본관에서 열린 이 기념식은 민족문제연구소와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의 공동 주최, 광복회 화성시지회의 후원으로 진행되었으며, 시민 100여 명이 함께했다.
조선 청년 3인, 친일파에 맞서다
부민관 의거를 주도한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세 청년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본 가와사키 군수업체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 훈련공으로 자원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현장에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혹독한 차별과 강제 동원 실태를 직접 겪고, 함께 파업을 주도한 뒤 일본 경찰에 지명수배되면서 귀국하게 된다.
1945년 초 귀국한 이들은 조직적인 무장 항일 투쟁을 준비하며 비밀결사인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했다. 이들의 목표는 총독부와 친일 인사들을 응징하고, 전쟁 말기 조선 청년들을 전장으로 몰아넣는 친일 선전활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애초에는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 거두 암살과 총독부 폭파 등의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 가능성과 피해 최소화를 고려해 7월 24일 부민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아세아민족분격대회’ 저지 작전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 남겨진 우리의 몫
당시 폭파의 표적이 되었던 ‘아세아민족분격대회’의 핵심 기획자는 박춘금이었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유일하게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을 세 차례나 역임한 인물로, 조선 청년들에게 전쟁 동원을 선동하고 ‘내선일체’를 고취한 대표적인 친일 정치가였다.
일제 말기에는 ‘대의당’이라는 친일단체의 당수로 활동하며 “조선은 천황에 충성해야 한다”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자”는 취지의 대중 강연과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아세아민족분격대회는 바로 그 대의당이 주최한 ‘친일 정점의 정치 이벤트’였다.
광복 후 그는 반민특위 1급 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었지만, 처벌받기는커녕 일본으로 도피해 끝내 귀국조차 하지 않은 채 1973년 도쿄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이 아무 죗값 없이 생을 마감한 사례로 남았다.
그를 겨냥한 부민관 폭파 의거는, 단지 일본제국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식민권력에 빌붙어 민족을 팔아넘긴 내부 권력자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리고 광복 80년이 지난 지금, 박춘금처럼 죄를 묻지 못한 자들의 후손과 그 구조는 여전히 이 사회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래서 이날 서울시의회에 울려 퍼진 “친일파를 청산하라”는 외침은 역사를 향한 분노이자, 현재를 향한 경고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부민관 폭파 의거에 참여했던 조문기 선생이 해방 후 평생을 ‘친일파 청산’이라는 과업에 매달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뜻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조문기 선생의 고향인 화성시에 위치한 ‘화성독립운동기념관’에 가면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라는 그의 신념이 담긴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
명예보다 사명으로 살았던 독립운동가들
이날 기념식에는 부민관 폭파 의거에 참여했던 유만수 선생의 아들, 유민 광복회 기조실장이 참석해 아버지의 생전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아버지가 서훈 신청 권유에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거절했다고 전했다. 당시 누구나 그런 마음으로 싸웠기 때문에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 부친의 생각이었다고 덧붙였다. 유 실장은 부친이 평생을 ‘독립운동가’라고 말한 적이 없었으며,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이너마이트를 어떻게 제조했고, 어떤 방식으로 의거를 실행했는지를 자세히 들려주었다고 회고했다. 유만수 선생을 비롯한 부민관 폭파 의거자들은 1990년에야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의거 당시 일제의 언론 통제로 사건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해방 이후에도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이들의 이름은 오랫동안 기억되지 못했다.
사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다. 본인의 안위나 영달보다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투쟁에 임했고, 해방 후에도 조용히 생을 마쳤다. 반면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협력한 이들은 단죄되지 않은 채, 오히려 부와 권력을 세습하며 한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숨겨졌던 헌신이 뒤늦게서야 드러나는 현실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아픈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과거사 청산이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는 오늘날,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현재를 향한 질문이자 미래를 위한 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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