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국내 유일 의열단 전문 연구자’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

“테러리즘은 원래 권력자나 국가 같은 강자가 누군가를 발밑에 두고 지배하려고 공포심을 불어넣는 전략입니다. 테러란 말의 본래 뜻이 공포심이잖아요. 테러는 약자의 전략이 될 수 없어요.”
1980년대부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한 갈래인 의열투쟁을 연구해온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의 말이다. 의열투쟁은 일제 식민 통치에 맞서 개인이나 소집단 비밀결사가 뜻을 모아 일제 관공서에 폭탄을 던지거나 일제 고관을 암살하는 방식의 독립운동을 말한다. 약산 김원봉(1898~1958) 등이 1919년 11월 만주에서 결성한 ‘의열단’이 대표적인 의열투쟁 단체이다.
1994년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의열단의 민족운동에 관한 사회사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국내 유일의 의열단 전문 학자’이다. 의열단의 처음과 끝을 정리한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1997)을 비롯해 ‘의열투쟁 1-1920년대’(2009), ‘혁명과 의열: 한국독립운동의 내면’(2010) 등 의열단 관련 여러 저서를 냈다.
“2001년 알카에다가 저지른 9·11 이후 우리 사회에 테러란 말이 일상화하면서 모든 폭력을 다 테러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저항운동 세력의 폭력도요. 9·11 이후 학계에서도 의열투쟁 대신 테러투쟁, 테러활동이라는 용어로 기술하는 논저가 보입니다. 연구자들도 자기 세대의 일반적인 생각이나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의열투쟁을 테러리즘과 등치시킬 수 없다고 했다.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한 게 아니잖아요.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도 아니고요. 의열투쟁은 약자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면서 항의하고 분노를 표출한 행위이죠.”
최근 ‘독립운동의 역사사회학’(선인), ‘독립운동으로 보는 근대인의 초상’(경인문화사) 두권을 한꺼번에 출간한 김 교수를 지난 22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독립운동의 역사사회학’은 의열단 결성 초기의 비사와 의열단계 중심으로 1938년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인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중국 공산당 팔로군 지역으로 북상한 경위와 3·1운동의 성격 등을 고찰한 논문 12편을 모았다. ‘독립운동으로 보는 근대인의 초상’은 황상규, 최수봉, 박시목, 김교삼, 현정건, 현계옥 등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영남 지역 독립운동가의 족적을 새로 밝히는 글로 채웠다.
앞의 책에선 애초 알려진 의열단 창립 단원 13명 중 3명(한봉인·배동선·권준)이 창립 단원이 될 수 없음을 논증했고 1920년 초 의열단의 1차 국내 거사(밀양 폭탄사건)가 실패한 데는 당시 경기도경 경부였던 ‘친일파’ 김태석과 연결된 일제 협력자(구영필)의 영향이 있었음을 일제 경찰 사료 등을 토대로 고찰했다.
지금껏 의열단 창립단원 통설은 13명이었다. 소설가 박태원이 김원봉 회고담에 근거해 1947년 펴낸 책 ‘약산과 의열단’에 따른 것이다. ‘창립단원 10명설’에 대한 학계 반응을 묻자 그는 “반박이 없어요. 의열단을 연구하는 사람이 저 말고 없으니까요”라며 연구 결과를 일부 소개했다. “한봉인은 의열단 창립 전후로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전혀 없더군요. 그가 김원봉을 재정적으로 많이 후원해 김원봉이 박태원에게 구술할 때 창립단원으로 넣어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3·1운동을 다룬 논문에는 이 운동이 초기엔 비폭력 평화적 시위였다는 통설과 달리 초기부터 일제의 지방통치기구를 향한 폭력적 행동이 터져 나와 전국적 현상이 되어갔음을 짚었다. 그는 당시 문헌자료를 살핀 결과 “비폭력과 폭력 시위가 61대 39 정도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3·1운동 비폭력 신화’는 어떻게 생겼을까? “해방 직후부터 좌·우는 별도로 3·1운동 기념식을 했는데요. 1946년 기념식을 앞두고 동아일보에는 이승만이 3·1운동은 무혈 비폭력 시위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게 나옵니다. 그는 이 운동이 인도보다 앞서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비폭력 운동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해요. 이런 인식이 남한 사회에 영향을 미쳤죠. 기독교에 뿌리를 둔 이승만은 인도주의를 강조하면서 독립운동 노선도 무력이나 폭력, 전쟁을 극력 배격하고 외교를 통해 독립을 얻어낼 수 있다고 봤죠. 반면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3·1운동을 무력투쟁으로까지 규정하고 이 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지도할 중심이 없어서라고 했죠. 3·1운동은 폭력과 비폭력이 섞였음에도 좌·우는 한쪽으로만 보려 했죠.”
그는 초기 의열투쟁이 일어난 곳 대부분이 평안도와 경상도라고 했다. 이 말은 의열투쟁 주체 대부분이 이 지역 출신이라는 의미다. ‘독립운동으로 보는 근대인의 초상’에도 밀양의 황상규·최수봉, 부산의 박재혁 등 영남 출신 의열투쟁 주체들이 여럿 나온다.
그 연유를 묻자 김 교수는 “의열단 창단 8개월 전에 일어난 3·1운동과도 연결된다”며 말을 이었다. “3·1운동에서 격렬한 폭력 투쟁이 많이 나오는 곳이 바로 평안남도와 황해도 그리고 경남북입니다. 기독교가 많이 퍼진 평안북도는 조금 덜해요. 이런 현상에는 동학 문제가 있어요. 동학 포교가 처음 많이 된 곳은 호남과 충청이지만 동학 전쟁 때 일본군에 의해 궤멸합니다. 이 지역의 남은 동학도들은 평안도 등 북으로 도피합니다. 경상도는 3·1운동 때 지역유림이 지도해 관공서를 습격하고 일제 관리들을 공격했어요. 동학 전쟁 때 부모나 할아버지가 일본군에 의해 죽은 걸 본 동학도들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컸죠.”
사회비평가가 되려 1974년 사회학과에 들어간 그는 1987년 독립기념관 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 스승 신용하 교수로부터 연구소 합류를 권유받고 독립운동 연구의 길로 들어섰단다. 그에 앞서 석사 논문은 판소리가 일종의 담론으로서 민중의 저항의식 형성에 끼친 영향을 주제로 썼다. 연구소에서 그는 광복군(1940년 결성) 연구로 첫 독립운동사 논문을 쓴 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연구 주제를 확장하다 최종적으로 의열단을 중심 연구 주제로 삼았다.
그는 35년 넘는 세월을 의열단 조직과 이념 연구에 쏟았다. 가장 큰 연구 성과를 묻자 “제가 조금 내세울 수 있다면 김원봉 의열단 계열이 우리 독립운동 내부에서 우파인 김구와 급진 좌파인 공산당 세력을 매개해 아교처럼 붙여주려고 노력한 것을 밝힌 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국민의힘의 한 중진 의원은 김원봉을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 했지만 제 생각에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입니다. 좌우 가림 없이 크게 통합하고 진보적 지향으로 나아가려 한 민족주의자였죠. 김원봉은 공산당과 관련된 사람들도 다 받아들이고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로 들어가려고 했어요. 일제 후반부로 갈수록 통합 노력을 더 합니다. 하지만 김구는 의열단계를 다 빨갱이로 봤어요. 백범일지에 그렇게 단정적으로 써놓았죠. 임정이 의열단계를 안 받아주자 보다 못한 중국 국민당 쪽에서 같이 하길 종용해서 결국 통합했죠.”
그는 “김원봉은 ‘용공’이었다”고도 했다. “용공의 용은 세 가지 뜻이 섞였어요. 받아들일 용과 녹일 용, 이용할 용이죠. 용공 하면 지금도 굉장히 위험하게 보지만 김원봉은 공산주의자를 받아들여 이들의 아주 급진적 성향을 살짝 깎아내고 녹여낸 뒤 써먹었어요.”
그는 김원봉과 의열단계가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뭐냐는 질문에는 “의열투쟁은 일제에 식민통치를 포기하라는 경고를 보내고 국내 민중에게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짚은 뒤 답을 이었다. “의열단이 총 쏘고 폭탄 던지는 과격 단체로만 알려졌지만 사실 우리 독립운동의 이념을 진보적이고 전향적으로 견인한 중요한 주체 중 하나입니다. 김원봉 요청으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1923)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 선언은 조선의 기존 불합리한 모든 요소를 다 제거하고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이상적 조선을 만들겠다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의열단 강령 역시 진정한 민주공화국 건립을 과제로 제시하죠. 지금 우리 헌법에 담긴 내용과 같아요. 결사와 집회, 신체의 자유와 남녀평등, 노동자·농민·빈민 보호를 이야기해요. 당시로선 굉장히 선진적이었어요.”

의열투쟁은 식민 시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정신사적 의미도 크다고 했다. “일제 통치가 길어지니 변절자도 많이 생기고 민족정기가 막 흐려졌잖아요. 이럴 때 의열투쟁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거사자들이 체포된 뒤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이렇게 의로움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모습은 조선 민중에게 올바름에 대한 지향을 보여주면서 정의를 환기시켰죠. 꺾이지 않는 불요불굴의 정신을 동족에게 보여준 거죠.”
그는 ‘독립운동으로 보는 근대인의 초상’ 서문에서 ‘책에 영남 출신 독립운동가들만 소개한 데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경종 비슷한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의도도 있었다’고 썼다.
뭔 말일까? “대구를 보면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주로 국채보상운동이나 임시정부 활동을 한, 안전한 분들만 기념합니다. 이번 책에서 다룬 현정건도 대구 사람인데 지역 사람들이 잘 몰라요. 좌파나 진보적인 독립운동가들은 지역에서 철저히 외면당해요. 유일한 예외가 이육사이죠. 육사는 사회주의자라고 단언해도 될 만큼 급진적인 성향이었지만 전국적으로 알려진 문인이라 지역에서 굉장히 내세웁니다.”
소설가 현진건의 셋째 형인 현정건은 중국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돼 4년 이상 옥고를 치렀다. 석방 6개월 만에 급성 질환으로 세상을 뜰 때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이번 책에는 현정건과 그의 부인 윤덕경, 그리고 현정건의 정인이면서 동지였던 기생 출신 의열단 독립운동가 현계옥의 생애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가 보기에 김원봉은 김구와 쌍벽을 이룰 만큼 최고의 독립운동가이지만 북한 초기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아직도 미서훈이다.
김원봉 서훈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는 “우선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 상훈법에서 서훈 대상을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지요. 독립유공자라도 1948년 정부수립을 기준으로 삼는 ‘건국’에 기여했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조금이라도 건국에 반하는 기미가 있었다고 하면 서훈이 되질 않아요. 심지어 미군정 포고령 위반만 있어도 배제 대상이죠. 미군정은 우리 국가가 아닌데도요. 월북자라면 원천적으로 배제되고요. 저는 1945년 8월15일 이전에 독립운동을 한 이는 6·25전쟁 때 북한 쪽에 서서 전쟁 수행에 적극 참여했다든지 그 후의 남북대결에 앞장선 경우가 아니라면 서훈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봅니다. 명칭도 ‘독립훈장’으로 바꿔야겠고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2025-07-27> 한겨레
☞기사원문: “독립운동가들의 의열투쟁은 테러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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