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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스트레이트] 광복 80년,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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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들은 해방을 맞지 않았다”

대법원에서 일제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정부 산하 재단이 민간에서 기부를 받아 배상금에 해당하는 돈을 주는 이른바 제3자 변제.

[양금덕 할머니/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2023년 3월 7일)]
“윤석열은 한국 사람인가, 조선 사람인가,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런 돈은 곧 굶어 죽어도 안 받아요.”

일본에서조차 놀랐습니다.

[김태효/당시 국가안보실 1차장 (YTN ‘뉴스와이드’, 2023년 3월 18일)]
“‘이렇게 하면 한국 국내 정치에서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우리(일본)로서는 이것이 학수고대하던 해법인 것 같다’‥”

일본이 나머지 반 컵을 채우면 된다던 자신만만했던 해법.

[박진/당시 외교부 장관 (강제징용 해법 관련 기자회견, 2023년 3월 6일)]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서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를 합니다.”

하지만 2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일본 기업이나 단체가 내놓은 돈은 단 한 푼도 없습니다.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기업의 참여를 바란다’ 선의를 어떻게 보면 구걸하는 거죠. 얘기했는데 전혀 일본은 호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국내 기업들 중 돈을 낸 곳은 포스코가 유일했고, 정부가 만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아무 관련도 없는 경제단체에 손을 벌렸습니다.

[한국경제인협회 (15억 원 기부) 관계자]
“재단 쪽에서 아마 저희 쪽으로 찾아왔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한테 좀 도움을 요청하신다고‥”

[대한상공회의소 (15억 원 기부) 관계자]
“경협(경제협력) 차원에서 그렇게 기부가 진행된 것이다. <기부를 하는 것과 경협과 어떤 연관관계가 있다라는 말씀이신 건지?> ‥‥‥.”

14살 어린 나이에 일본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에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박해옥 할머니.

[고 박해옥 할머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돈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전혀 논리적으로 이치적으로 따졌을 때 맞지 않는 돈인데, (그 돈을 받고) ‘해결이 됐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거죠.”

역시 같은 곳에 끌려갔다 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최정례 씨의 유족도 정체 모를 돈은 받을 수 없다고 분노했습니다.

[이경자/고 최정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나 그 돈 안 받고, 안 받을랑께 그러면 우리 죽은 고모님 살려내라. 나 그 말도 하고 싶어요. 그 말도 하고 싶어. 너희들이 데려갔지 않냐. 너희들이 데려갔다가 죽여 놓고 뭔 소리 하고 있냐.”

2018년 이후, 대법원에서 손해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나 유족은 모두 67명.
이 중 제3자 변제금을 받아 간 사람은 22명뿐입니다.

[이국언/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우리 정부가)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려고 하는 걸 보니까 정말 이게 내 나라인가, 그러니까 일제 피해자들이 간혹 하는 말이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았는지 모르겠지만, 일제 피해자들은 아직 해방을 맞지 않았다'”

재단이 제3자 변제를 밀어붙이며 유가족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 1941년, 17살의 나이에 일본 제철소에 끌려갔던 이춘식 할아버지.
전범기업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가장 먼저, 가장 앞장서 싸웠습니다.

[고 이춘식/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2023년 9월 6일)]
“일본에서 단연코 보상해야지. 우리나라에서 보상해서는 안 되지. 경우에 벗어나고 뜻이 안 맞지.”

그런데 지난해 10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요양병원에 머물던 할아버지가 제3자 변제를 수용했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알고 보니 재단에서 병원까지 찾아와 자필 서명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창환/고 이춘식 할아버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장남]
“전혀 몰랐죠. <그때 할아버지의 상태가 그런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상태였나요?> 연필도 못 주우셔. 그리고 이미 그 전에 섬망증이 오셨어. 사람을 알아보시는 것도 알아볼 때가 있고 못 알아볼 때가 있고.”

아버지가 본인의 뜻과 달리 제3자 변제를 받아들인 꼴이 됐다며, 장남은 이에 동조한 동생들을 경찰에 고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창환/고 이춘식 할아버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장남]
“끝까지 아버지 유지를 지켜드리는 것이 자식으로서 도리이고, 내가 어쩔 수 없이 법에다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어. 제가 오죽하면 피해자 지원재단이 아니라 가해자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일본 홋카이도 북단의 작은 마을 슈마리나이.
지난 1940년 전후, 이곳의 댐과 철도 공사에 조선인 노동자 3천여 명이 강제동원됐습니다.
영하 40도의 강추위와 폭설 속에서 혹독한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야지마 츠카사/슈마리나이 강제노동 박물관장]
“공사하다가 떨어지는 사람이 있어요. 근데 그때 사람이 떨어지면 구조할 수가 없어, 할 생각도 없고. 그러면 떨어졌던 사람들을 인주(人柱:사람 기둥)라고 불러요. ‘사람이 떨어지면 튼튼한 건물이 되겠다’고 미신 같은 게 있었어요.”

이곳에 있던 한 작은 절에 이렇게 목숨을 잃은 이들의 위패와 유골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한 승려가 인근 대나무숲에 집단 매장돼 있던 유해를 발굴하고 유족을 찾아나섰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일본의 ‘강제노동’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박물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된 노동자는 2백여만 명,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80년의 세월.
양국 정부가 ‘국익’이라는 미명 아래 고개를 돌린 사이, 과거의 책임을 묻거나 이에 대한 사과를 한 쪽은 정부가 아니라 시민들이었습니다.

[야지마 츠카사/슈마리나이 강제노동 박물관장]
“일본 정부가 ‘조선 식민지 출신 노동자’라는 단어를 한 10년 전부터 쓰기 시작했었고요. 거기에 강제성이라는 게 완전히 떨어져 있고, 그분들이 어떻게 일본에 와서 아니면 다른 데 와서 끌려왔다가 강제 노동을 당했다는 것은 하나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피해자로서 우리가 좀 앞으로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되자 일본 언론은 일본 정부 내부에서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며, 아쉬워하는 반응이 나왔다고 전했습니다.
야당 대표 시절 “역사의 정의를 저버리고 일본에 머리를 조아렸다”며 제3자 변제안을 강하게 비판했던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첫날엔 “국가 간 관계는 일관성이 중요하고 신뢰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는 합리적 관계가 되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남기정/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일본은 ‘올해 국교 정상화 60년이다’ 그래가지고 이 점에만 초점을 맞춰서 낙관적인 그런 한일 관계를 제시하면서 ‘모든 문제는, 역사 문제는 다 풀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역사 인식을 공유할 수 없는 상황이 아직은 있다’라고 하는 거죠. 이거를 ‘우리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것이 우리 국민의 입장이이어야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박종욱 기자

<2025-06-08> MBC 스트레이트

☞기사원문: 광복 80년,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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