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유족과 시민단체들 외침

“저는 이춘식의 자식 이창환입니다. 지금 이 순간 너무 고통스럽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11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일본제철 본사 앞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인 이창환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씨는 일본제철을 향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최소한의 반성과 진솔한 사과 한마디가 그렇게 힘들고 어렵냐”며 “지금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은 진정한 사과와 배상이며, 이를 당장 실천하길 강력히 요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의 아버지 고 이춘식 할아버지는 1924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나 1943년 1월 일본 이와테현 일본제철 가마이시 제철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1945년 1월부터는 일본 고베에서 미군 포로 감시원 생활을 하다 해방 뒤 귀국했다. 그는 60년이 흐른 뒤 2005년 일본제철 후신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해 2018년 10월30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하지만 일본제철을 포함한 피고 기업들은 식민지에서 끌고 온 강제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그 사이 고령의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춘식 할아버지 역시 끝내 사죄를 받지 못한 채 101살 나이로 지난 1월 노환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에 대해 이날 이씨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던 2018년 아버지는 만감이 교차하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가해 국가와 가해 기업을 용서하기 위해 75년을 투쟁하며 기다렸다’고 말했다”며 “과거 불행한 시대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기다려왔다’는 아버지의 바람에 과연 잘못이 있는 일본 기업들은 과연 무엇을 했냐”고 따져 물었다.

이씨 곁에는 한·일 시민단체들이 함께 집회 ‘마루노우치 행동’을 열어 일제강점기 전범기업들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했다. 일본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을 지원해온 시민단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 모임), ‘한국 원폭 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 ‘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등 일본 시민단체 3곳이 함께 참여했다. 이들은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에 책임져라!”,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보상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일본제철과 함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도 항의 집회를 열었다. 손팻말과 펼침막을 통해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은 사죄하라”,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문제 해결에 협력을 시작하라”는 등의 요구를 이어갔다.

이날 집회에는 한국에서도 유족인 이씨를 비롯해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과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가 함께 참석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 원고들의 채권은 그대로 남아 있다”며 “기업들의 책임은 면책되지 않고, 도망갈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유족인 이씨와 함께 피해자와 지원단체의 입장을 담은 요청서를 전달하기 위해 두 기업을 방문했지만, 해당 기업들은 “담당자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다”는 등의 이유로 직접 접수를 거부했다.

도쿄 마루노우치는 일본 대기업 본사들이 밀집한 곳이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조선인 강제동원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 본사가 자리해 있다. 이곳에선 애초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을 지원해온 ‘나고야소송지원회’가 2007년 7월부터 18년째 해당 기업들에게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금요행동’ 집회를 열어왔다. 하지만 지난 1월부터 ‘한국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와 ‘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 합류해 연대집회로 규모를 키우기로 하면서 이름도 ‘마루노우치 공동행동’으로 바꿨다. 이날 마루노우치 공동행동 쪽은 “일본은 전시 중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당시 식민지였던 한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을 강제동원해 가혹한 노동을 강요했다”며 “강제동원 문제는 가해 당사자인 일본 기업이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는 이상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도쿄/홍석재 특파원
<2025-04-11> 한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