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국립묘지의 영예성 확립을 위한 시민사회와 국회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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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립묘지의 영예성 확립을 위한 시민사회와 국회의 노력

방학진 기획실장

1. 국립묘지의 시작

1945년 11월 환국한 백범 김구는 1946년 안중근 의사 허묘를 포함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 묘역을, 1948년에는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등 임정요인 묘역을 효창원에 조성했다. 식민지해방투쟁을 벌인 나라가 독립을 맞이하고 당연히 가장 먼저 했어야 할 과업이었다.

“나는 즉시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박렬(朴烈) 동지에게 부탁하여 조국 광복에 몸을 바쳐 무도한 왜적에게 각각 학살을 당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열사의 유골을 환국시키게 하고 국내에서 장례 준비를 진행하였다. (중략) 장례에 임하여 봉장위원회(奉葬委員會) 책임자들이 장지를 널리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내가 직접 잡아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그것은 서울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장례식이었다. (중략) (임시로 영구를 모신-필자 주) 태고사로부터 효창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중략) 옛날 국왕 인산(因山) 때 이상으로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다.”(『백범일지』에서)

그러나 백범 자신이 1949년 암살당하여 효창원에 묻힌 이후 효창원은 반이승만의 성지가 되면서 시민들은 경찰의 감시를 피해 몰래 ‘도둑 참배’를 해야만 했다. 이러한 ‘참배와 감시’의 역사는 광주 망월동묘지에서도 재현되어, 전두환 정권은 5·18 추모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차없이 탄압을 가했다. 이승만 정권은 독립운동가를 모신 효창원을 금단의 영역으로 묶어둔 것에 그치지 않고 1956년과 1959년 두차례나 선열들의 묘소를 강제 이장하려 했다.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를 조직해 강제 이장을 앞장서 막아낸 이는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이었다.

통곡 효창원
효창원에 쓰라린 바람 일고 처절한 비 내리는데 / 통곡하며 부르노라, 일곱 선열의 영혼을.
땅속에 묻힌 말라버린 뼈 / 일찍이 무슨 죄로
네 멋대로 공병대의 괭이 아래 파 뒤집혀야 / 한단 말이냐.//
저 남산의 탑동 공원을 돌아보니 / 하늘을 찌르는 동상이 사람의 넋을 빼앗는구나.
독재의 공과 덕이 지금은 이렇듯 높을지나 / 두고 보시오!
창상이 일순간에 벽해로 뒤집힐 것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가가 운영·관리하는 국립묘지의 시작은 독립운동가가 아닌 군인을 위한 것이었다.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군이 창설되어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여 오던 중 북한 인민군의 국지적 도발과 각 지구의 공비토벌작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육군에서 묘지 설치문제가 논의되어 1949년 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서울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6·25전쟁으로 묘지 설치문제는 중단되었고 각 지구 전선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 봉안하여 육군병참단 묘지등록중대에서 관리하였다.
계속되는 격전으로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육군에서는 다시 육군묘지 설치 문제가 논의되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주관하에 묘지후보지 답사반을 구성하여 제1차로 대구지방, 제2차로 경주지구 일대를 답사한 결과 경주시 형산강 지류인 천북 대안 일대를 육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추진하던 중, 군 고위층에서 현지를 답사하여 검토한 결과 지역적으로 편재되어 있고, 침수의 우려가 많을 것을 고려하여 타 지역으로 후보지를 재선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져 일단 중지하게 되었다.
1952년 5월 6일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육군묘지 설치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결과, 육군묘지를 설치하게 되면 타군에서도 각기 군묘지를 만들어 관리상 많은 예산과 인원이 소요되고, 영현관리의 통일성을 기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육군묘지 설치문제는 일단 보류하도록 지시하고, 3군 종합묘지 설치를 추진하되, 묘지의 명칭은 국군묘지로 칭할 것을 결의하였다. 1952년 5월 26일 국방부 주관으로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3군 합동답사반을 편성하고, 1952년 11월 3일 군묘지설치위원회를 구성한 후 1952년 11월부터 1953년 9월까지 11개월 동안 7차에 걸쳐 10개 지역을 답사하였다.
답사 결과 동작동 현 위치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여 1953년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하고 1954년 3월 1일 정지공사를 착공한 이래 3년에 걸쳐 묘역 238,017㎡를 조성하고, 그 후 연차적으로 1968년 말까지 광장 99,174㎡, 임야 912,400㎡ 및 공원행정지역 178,513㎡을 조성하였다.
1955년 7월 15일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되고, 이어서 1956년 4월 13일 대통령령으로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군묘지 운영 및 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되어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무원이 안장되고 덧붙여 순국선열 및 국가 유공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안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

1956년 4월 13일 제정된 「군묘지령」에 의한 안장 대상자는 ‘군인, 사관후보생 및 군속(기타 종군자를 포함한다)’이었고 1957년 1월부터는 ‘국방부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순국열사 또는 국가에 공로가 현저한 자’로 안장 대상자가 추가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독립운동가 안장은 이승만이 물러난 1964년 3월 11일 김재근 애국지사가 국무회의 의결을 통하여 최초로 안장되면서부터이다.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에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군묘지령」에 순국열사 안장이 추가된 것도 1956년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효창원 훼손을 목적으로 한 운동장 건설에 대한 국회와 국민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5년 3월 30일 「군묘지령」이 폐지되고 「국립묘지령」으로 제정되면서 ‘국군묘지’는 드디어 ‘국립묘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2. 「국립묘지법」 제정

대통령령인 「국립묘지령」을 법적 근거로 운영되던 서울과 대전의 국립묘지에 대한 개별 법률 제정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된 가운데 「국립묘지령」이 폐지되고 「국립묘지법」이 제정되는 결정적인 초점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2001년 홍제동 화재사건과 안동 소방헬기 추락 사건, 2003년 남극 세종기지 전재규 대원 사망 사건이었다.

동작갑 출신 정무위원회 전병헌 의원입니다. (중략) 우리 위원회안으로 제안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대안)에 대하여 제안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본 의원이 국립묘지법안을 제안하게 된 경위를 짤막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2001년 3월, 6명의 소방관들이 목숨을 던진 홍제동 화재사건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때 순직하신 분들은 제도적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이분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국민적 추모열기가 들끓어서 비로소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서야 소방관들의 순직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해 5월, 안동에서 커다란 산불이 일어났습니다. 산불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소방헬기가 추락해서 세 분이 순직했습니다. 세 분의 유가족들이 정부에 요구한 단 한 가지 요구사항은 이 세 분들을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제도가 미비해서 안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략)
2003년 12월 17일 정부는 남극 세종기지에서 실종된 동료대원을 구조하다가 사망한 고 전재규 대원을 의사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에 고 전재규 대원의 부친은 유일한 요구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2001년도에 22명, 2002년도에 9명, 2003년도에 21명이 정부로부터 의사자로 지정되고 인정됐습니다. 그러나 의사상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뒷받침하는 법적·제도적 틀이 없어서 국립묘지 안장은 불가능했습니다. (중략) 이번 법안을 마련하면서 숱한 난관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국립묘지에 대해 공통적인 사항을 포괄규정한 기본법 하나 없이 각 묘지별로 묘지령으로서 설치・운영했습니다. 이런 취약한 법적 환경이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운영을 불러왔습니다. 또한 이번 법안의 제정은 국회의 입법권을 드높이는 모범 사례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회의록 – 제254회 국회(임시회) 제8차 본회의, 2005. 6. 30).

국립묘지법안의 주요 내용은 군인들뿐 아니라 의사자와 의사상자로서 사망한 사람도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도록 대상자 확대, 당연 안장 대상자를 제외한 사람들의 안장 대상 해당 여부를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심의하기 위하여 국가보훈처에 안장대상심의위원회 설치, 국립묘지의 관리 주체는 국가보훈처로 일원화(국립서울현충원은 국방부 관리) 등이다.

3. ‘영예성’의 개념

우리나라 현행 법률을 통틀어 ‘영예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곳은 「국립묘지법」이 유일하다. 이 법 제5조 제5항 제5호는 ‘그 밖에 제10조에 따른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국립묘지의 영예성(榮譽性)을 훼손한다고 인정한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예성은 불확정 개념으로 ‘영예성 훼손’을 이유로 국립묘지 안장이 거부된 경우 법적 다툼이 발생한 사례도 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영예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위와 같은 국립묘지법의 목적과 관련 규정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영예성’ 내지 ‘영예성의 훼손’ 자체는 비록 추상적인 개념(내용)이나, 이 사건 법률조항의 ‘영예성’은 안장대상자가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희생·공헌한 점뿐만 아니라, 그러한 희생·공헌의 점들이 그 전후에 행해진 국가나 사회에 대한 범죄 또는 비행들로 인하여 훼손되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국립묘지법은 국가유공자 등에 대한 예우뿐만 아니라 국립묘지 자체의 경건함·엄숙함·영예성을 보호하여야 하고, 그러한 국립묘지 자체의 영예성의 유지를 통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된 국가유공자 등에 대한 일반 국민의 추모 등의 이익도 있다.”

즉 국가에 대한 희생과 공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반국가, 반사회적 행위가 있다면 국립묘지 자체의 존엄과 국립묘지에 안장된 국가유공자를 추모하는 일반 국민들의 입장을 고려할 때 안장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립묘지법」 제정 이전에도 유사한 개념이 「국립묘지령」에서도 존재했다.

제3조 (안장대상) ①묘지에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의 유골 또는 시체를 안장한다. 다만, 그 유가족이 이를 원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
1. 현역군인(武官候補生을 포함한다), 소집중의 군인 및 군속(從軍者를 포함한다)으로서 사망한 자. 다만, 불명예스러운 사망자는 제외한다.

17대 국회에서 전병헌 의원은 「국립묘지법안」을 이병석 의원은 「국립묘지기본법안」을 각각 발의했다. 이 중 이병석 의원안에서 처음으로 영예성 개념이 등장한다.

4. 안장대상심의위원회

「국립묘지법」 제5조 제5항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는 경우를 명시하고 있는데 제1호~4호는 그 대상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만 제5호는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즉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판단하는 심의 기구인 것이다. 물론 국가보훈부 훈령인 「국립묘지 안장대상심의위원회 운영규정」에서 ‘영예성’의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운영규정 역시 불확정 개념인 ‘영예성’에 대한 주관적 또는 정치적(관리기관인 국가보훈부 장관의 의지) 판단의 여지가 존재한다. 실제로 국가보훈부 차관이 위원장을 맡고 20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된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정파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를 기대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구조이다.

가까운 사례로 2020년 7월 11일 사망한 백선엽의 경우 안장대상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 7월 15일 육군장으로 장례가 치러져 대전국립묘지 장군2묘역에 안장되었다. 안장대상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의뢰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국가보훈부 장관의 판단에 따른다는 규정 때문이다. 결국 영예성의 판단 여부는 국가보훈부 장관 나아가 집권세력의 정치적 견해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백선엽의 사례는 ‘친일반민족행위’가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하는 반사회적, 반국가적 행위인지를 판단해야 할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판단을 회피함으로써 스스로 존재 의의를 부정하였다.

5. 국립묘지 영예성의 확립 과정

1991년 2월 민족문제연구소의 출범은 친일청산 문제의 대중적 확산과 공론화의 계기가 되었다.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에 더불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 99인』(전 3권)을 발간했다. 특히 이 책에는 김성수 등 당시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여론의 반향이 컸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은 타계 전 친일파가 안장된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때문에 김영삼 정부는 친일청산 문제를 개혁과제의 하나로 판단했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 김영삼 정부는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우며 국민적 지지를 얻어 냈고 1996년 서춘, 김희선, 박연서, 장응진, 정광조 등 5명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취소했다. 이른바 변절한 독립운동가의 서훈 취소는 여야 모두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김홍신 의원(민주당) “친일 혐의자가 심사위원을 맡은 시기에 적지 않은 친일인사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그 시기에 서훈을 받은 인물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황규선(신한국당) “친일파가 처벌받기는커녕 독립유공자로 변신해 국가적 차원의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실로 통탄할 일” “보훈처가 93년 이에 대한 조사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힌 뒤 3년이 지난 오늘까지 결과를 발표하지 않는 것은 친일파 색출 작업에 대한 의지가 없기 때문이 아니냐”
이성재(국민회의) “친일행적자에 대한 재조사 결과를 발표하라”
이재선(자민련) “친일파에게 준 서훈 박탈을 위해 상훈법의 개정이 필요하다”

당시 친일파 서훈 취소를 위해 「상훈법」 개정 필요성이 언급되었지만 더 이상의 제도적 변화는 없었다. 아마도 김영삼 정부가 임기 말로 치닫고 IMF 외환위기 등으로 인한 동력 상실이 그 원인이 아닌지 추측해 본다.

국립묘지 내 친일파 이장 문제가 본격화된 계기는 1998년 2월 안양 석수동 야산에 있던 친일군인 김창룡의 묘를 대전국립묘지 장군1묘역에 이장한 사건이었다. 이장 소식이 알려진 첫해 2개 단체가 시작한 김창룡 묘 이장 요구 집회는 2002년에는 10개 단체로 늘어났고 올해까지 26년째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현충일에 대전현충원 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2004년에는 국립묘지 내 친일파 이장 운동이 더욱 확산되었다. 2004년 1월 《친일인명사전》 국민모금 캠페인, 3월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제정, 4월 당시 집권 열린우리당의 총선 압승과 같은 유리한 정치 환경에 힘입어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는 현충일에 ‘친일파 김창룡, 서춘 묘 이장 촉구대회’를 예고했다. 이에 대전현충원 측은 6월 5일 서춘 묘비를 철거했다. 그래도 유족들이 스스로 이장을 하지 않을 경우 “비석 좌대철거(2단계), 봉분 둘레석 제거(3단계) 등을 통해 유가족들에게 묘 이장에 나서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행정대집행을 통해 다른 곳으로 강제이장하겠다(4단계)”고 밝혔다.

결국 서춘 후손은 2004년 9월 자진 이장했다. 서춘의 경우처럼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으나 이후에 친일행적이 밝혀졌거나 허위공적으로 밝혀져 「상훈법」에 따라 서훈이 취소된 인물 중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인물은 17명이었다. 그중 15명은 이장 안내 등 조치에 따라 유족들이 자발적으로 이장하였고, 1명은 애국지사의 배우자로서 국립묘지 안장자격을 유지하였으며, 나머지 1명은 2020년 7월 기준으로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다.

「상훈법」에는 서훈이 취소되더라도 국립묘지 안장 자격까지 박탈하는 규정은 없다. 하지만 서춘의 사례처럼 해당 기관의 정책 의지와 적극 행정으로 서훈 취소자의 국립묘지 이장까지 이루어 현충원 측이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드높인 사례이다.

하지만 유독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인물들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정책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6. 국회 차원의 「국립묘지법」 개정 연혁

친일파를 국립묘지에서 이장해야 한다는 국민여론은 언제나 높았다. 관련 여론조사가 2019년 2차례 진행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9년 2월 26일 한국갤럽에 의뢰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국민인식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결과 응답자의 80.1%가 친일청산이 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친일청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로는 “정치인/고위공무원/재벌 등에 친일파 후손들이 많아서”가 48.3%로 가장 많이 응답했다. 3·1운동 정신의 계승 방법을 묻는 질문에도 ‘친일잔재 청산’이 29.8%로 가장 높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19년 11월 1일부터 4일까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청산 문제 전반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74.4%가 친일인물의 국립묘지 안장을 취소해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국립묘지법」 개정안은 번번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임기만료 폐기’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라졌다. 현실적으로 친일파를 이장하기 어렵다면 친일파 묘소에 친일행적을 담은 조형물이나 안내판을 세우자는 온건한 개정안도 제출되었지만 역시 허사였다. 「국립묘지법」 개정이 매번 불발되었던 이유 중에는 법안만 발의해 놓고 손을 놓아버린 국회 스스로의 방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법안 발의 이후 소관 상임위원회인 정무위원회에서조차 거의 논의가 안됐다. 그나마 잠시 논의가 있었던 경우에도 정부 측(국방부, 국가보훈처) 논리를 의원들이 돌파하지 못했다. 친일파 이장에 반대하는 정부 측 논리는 한마디로 ‘공과론’(功過論)으로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공과론에 더해 법률 불소급 원칙까지 들고나왔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동시에 국가유공자인 사람에 대하여 그동안의 공과를 따지지 않고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서 배제하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고”(전문위원 정○○, 정무위원회 회의록, 법안심사 소위원회, 2017. 2. 23)

“제 지역에도 그런 일이 하나 또 발생했습니다. 친일행적이 있다, 그러나 6·25 때 약 11만 이상의 많은 피난민들을 구제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래서 6·25 때는 민족의 영웅으로, 또 그전에는 친일행적으로 동시에 비판을 받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판단해야 되느냐, 이런 문제가 있어서 지역적으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었는데, 이 부분은 좀 더 아주 신중하게 검토하는 게 필요하지 않겠느냐? 친일행적 자체가 치명적이었느냐? 6·25 때 미군을 설득해서 약 11만 명의 피난민들 목숨을 살렸던 행위하고 비교형량을 따져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드네요.”(김한표 의원, 정무위원회 회의록, 법안심사 소위원회, 2017. 2. 23)

“개정안에 대하여 국가보훈처는 친일반민족행위와 함께 광복 이후 국가에 기여한 공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할 사안이며, 이미 안장된 사람에 대한 강제이장은 법률불소급 원칙 및 입법상 신뢰 보호를 위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임”(김홍걸 대표발의 국립묘지법 개정안 검토 보고서, 2020. 9).

7. 「국립묘지법」 개정의 정책의제 형성 과정

친일행적 및 허위공적이 밝혀진 인물들의 국립묘지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의 과정을 보면 민족문제연구소와 광복회 등 시민사회단체 등 정부 밖에서 정책의제의 형성을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Cobb, Ross & Ross(1976)의 정책의제형성 모델 중 외부주도형(outside initiative model)으로 볼 수 있다.

Cobb, Ross & Ross의 외부주도형 모델을 바탕으로 「국립묘지법」 개정의 정책의제 형성 과정을 모형화하면 아래와 같다. 즉 현재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국립묘지에서 이장하기 위한 법률 개정은 공중 의제로서 자리매김 했지만 국회 통과와 정부의 시행을 남겨 놓은 상태이다.

2018년 적폐청산을 국정과제로 제시하며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역사정의와 친일청산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고 2021년에는 홍범도 장군 유해도 봉환했다.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2020년 21대 국회의원 지역구 당선자를 대상으로 ‘친일 행위의 국립현충원 안장 불가 및 이장, 단죄비 설치를 위한 법률(국립묘지법, 상훈법) 개정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은 결과 253명 중 73.1%인 185명이 ‘현충원 내 친일파 묘 이장에 찬성한다’라는 뜻을 밝혔다고 공개했다. 따라서 21대 국회에서는 「국립묘지법」과 「상훈법」 개정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당시 집권여당인 민주당은 「국립묘지법」 개정에 냉담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구체화 단계’에 이른 법 개정을 아이러니하게도 문재인 정부에서 ‘진입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정책 지체가 나타났다.

(박용진 의원은) “‘현충원에 친일 파묘법’ 주장이 나왔는데 ‘뼈에 무슨 이념이 있느냐’는 말이 있다”며 “과거에만 얽매일 일이 아니라고 했다.”(조선일보, 2020. 6. 12)

이낙연, ‘친일파 파묘법’ 당론 요구에 난색(연합뉴스, 2021. 2. 25)

김원웅 “민주당 친일 비호 정치인 있는 것 같다. 강북구 P의원이···”(경향신문, 2021. 3. 1)

8. 마치며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노골적인 친일정책과 역사퇴행을 자행하자 한국의 시민사회는 곧바로 저항에 나섰다. 작년과 올해 초 영화 <서울의 봄>과 <파묘>의 흥행이 상징적으로 증명하고 있는데 대표적 사례로 일제강제동원의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넓혔고 홍범도 장군 등 독립전쟁 영웅들의 흉상을 지켜내고 있으며 뉴라이트 세력의 준동에 항의하며 광복절 기념식에 불참하는 등 최고 수준의 저항을 하고 있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예상되지만 22대 국회에서 「국립묘지법」을 비롯해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이장을 위한 3법을 통과시킨다면 불확실 개념인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명확히 한 입법부의 사례로 평가받을 것이다.

끝으로 주권자인 국민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기능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며, 능동적 시민으로서 선거와 정당제도를 통해 국민주권의 이념을 실질화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확립하는 것도 온전히 주권자인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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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어 : 국립묘지법 │ • 검색 기간 : 1990. 1. 1~2024. 9. 25 │ • 검색 결과 : 1,57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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