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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일보]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황석영 소설 ‘철도원 삼대’ 현장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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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도원 삼대 현장답사단이 동명초등학교 앞에서 일제 강점기 때 이 자리에 있었던 ‘동경제국대학 전염병 연구소 인천출장소’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지난 20일 오후 황석영의 소설 ‘철도원 삼대’의 배경이 된 인천 중중·동구 일원에서 ‘2021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날 행사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소, 일제 강점기 당시 주변 건물 터와 함께 대한민국 진보 정치계의 거두 조봉암 선생의 생전 거주지 등을 둘러보는 순서로 진행됐다.

장회숙 인천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장과 함경란 인천광역시 문화관광해설사가 현장 해설과 안내를 맡았다.

황석영의 소설 ‘철도원 삼대’는 강화도 지산리에서 태어난 ‘이백만’과 열차 기관사로 일하다 해방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아들 ‘이일철’, 북한군 수송 열차를 운행하다 미군 폭격으로 다리를 잃고 귀향한 손자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노동자 3대의 이야기다.

이백만은 열세 살에 인천으로 일하러 나와 일본 정미소에서 선반을 배우던 도중 경인철도 선반부로 이직해 철도 공작창 기술자가 됐고, 여장부였던 주안댁과 결혼해 아들 일철과 이철을 낳았다.

일철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당시로선 드물었던 조선인 기관사가 됐지만 동생 이철은 철도 공작창에 다니다 해고당한 뒤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옥고를 겪는다.

일철의 아들 지산은 18세 때 아버지를 찾아 월북한 이후 북한군 수송과 물자를 보급하는 열차를 운행하다 미군 폭격으로 다리를 잃고 전향 포로가 되어 귀향한다.

지산의 아들이자 이백만의 증손자인 진오는 25년간 노동자로 생활하다 부당해고에 항의해 아파트 16층 높이의 목동 열병합 발전소 굴뚝에 올라가 고공 농성을 벌인다. 이 장면에서 ‘철도원 삼대’가 시작된다.

소설 속에서는 인천을 주 무대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던 김삼용이 김근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실존 인물인 박헌영, 이재유, 김형선, 김단야 등 사회주의 운동가의 이름도 만나볼 수 있다.

배다리성냥박물관에 모인 답사단은 소설에 나오는 장소를 찾아 송림동 고무공장, 이이철 주거지 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황석영의 소설 ‘철도원 삼대’ 현장 답사단이 배다리 성냥박물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동구 금곡동 배다리 성냥박물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냥이 소개된 것은 1880년이라고 한다. 개화기 승려인 이동인이 일본에서 석유, 램프와 함께 성냥을 가져온 것이 처음이라고 알려져 있다.

성냥 공장이 최초로 세워진 지역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은 “1886년 외국인이 제물포에 성냥 공장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1917년 인천 금곡동에 성냥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조선인촌 제조주식회사’가 설립됐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돼 본격적인 공장제 생산이 이뤄진 ’최초‘의 공장이다. 성냥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고 ’성냥하면 인천‘을 떠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자연스레 경제적 착취와 수탈이 자행됐고, 조선인에게는 성냥 공장 설립을 불허하고 제조기술마저 전수하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송림동 고무신 공장

1918년 용동에서 식품점을 하던 안기영 씨는 일본 고베에서 일본 고무신인 ‘호모화’를 판촉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 고무신 업자를 만났다. 당시 인천에서는 이성원이라는 사람이 가죽 구두인 ‘경제화’를 만들어 팔고 있었으나 값이 너무 비싸 고전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안기영은 ‘경제화’를 가져다가 일본 상인에게 보여주며 “같은 모양의 고무신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얼마 뒤 일본에서 도착한 고무신은 엄청난 인기를 끌며 대량으로 팔려나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값싼 한국형 고무신이 이렇게 인천에서 탄생했다. 한국형 고무신이 불티나게 팔려나가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같은 모양의 고무신 공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안기영은 1929년 송림동에 ‘인천호모합자회사’라는 공장을 차려 1940년까지 성업했으나 1940년 일제의 전시통제로 공장 문을 닫고 말았다.

▲ 장회숙 인천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장이 소설 ‘철도원 삼대’의 배경이 된 일제 강점기 때의 건물과 거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림동 ‘노다 간장 주식회사’ 인천지점

인천간장 양조업은 1894년 일본인에 의해 시작됐다고 한다.

인천역사자료관의 기록을 보면, 인천에서 처음으로 일본식 간장과 된장을 제조, 판매한 사람은 일본인 ‘이와 에이’로 나와 있다.

공장에서 본격적으로 간장과 된장을 대량 생산한 곳은 1896년 11월 설립된 일본 노다 간장 주식회사의 전신 ‘일본간장 주식회사’로 전해진다.

이어 1902년 기시모토 호노스케가 양조업에 뛰어들었고, 1905년에는 다카스키 간장주식회사, 기시모토 양조소, 구라시게 양조장, 산하 간장 양조장 등 5개소로 늘어났다.

동구 송림동 노다 간장주식회사 조선지점에서 생산된 제품은 품질과 맛이 일본 제품보다 뛰어나 일본과 중국, 만주로 수출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 인천경찰청 기동대 건물이 있는 곳에 공장이 있었다.

-왁찐 제조소 ‘동경제국대학 전염병 연구소’ 인천출장소

동명초등학교 자리에는 일제 강점기 때 천연두 예방약의 원료가 되는 천연두 싹 채취 제조소가 있었다.

1933년 동경제국대학 전염병 연구소 인천출장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마다 봄, 가을에 한 번씩 많은 송아지를 모아 원료를 만들었으며 동양에서는 유일한 시설이었다고 한다.

일 년에 생산량이 300만 명에 이르는데다 품질이 좋아 일본 전역은 물론 중국과 미국에까지 수출했다. 요즘으로 치면 최첨단 바이오산업 시설이었던 셈이다.

동명초등학교에는 일제 강점기 때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다. 이 학교 설립자인 박창례 선생이 1931년 일본인의 땅을 빌려 동명초교의 근간이 된 ‘동명학원’을 설립했다.

하지만 1939년 일제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이름을 딴 간판은 내걸 수 없다‘며 트집을 잡아 학교 이름을 일본식 이름인 ’소화 강습회‘로 개명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동경대 전염병 연구소의 실험용 우사를 인수해 지금의 동명초교 터를 만들 수 있었다.

▲ 함경란 인천광역시 문화관광해설사가 동구 송림동 일대의 일제 강점기 시기 건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이철의 주거지

‘철도원 삼대’는 이 일대 지명 여러 곳을 소개하고 있다.

“이철은 잠깐 생각해보고 대답했다. ‘만국공원 성공회 교회당 부근이 좋겠군!’. 이철의 거처는 쇠뿔고개 부근이었고. 김근식의 동네는 배다리 사거리 지나 공장들이 늘어선 곳에 있었다. 경성에서 모셔올 선생의 거처는 예전 밤나무골 율목정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율목정에는 인천항에서 돈 깨나 벌었다는 상인들이 기와집 동네를 이루어 새말이라고 불렀으니 만국공원 일대에 일본 부촌이 있다면 조선인 부촌은 율목정인 셈이었다.”

“박선옥은 배다리 사거리를 지나 창영정의 감리교회 뒷산 산책로에 갔다. 삼십분 후에 남자가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그가 이이철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 쇠뿔고개 길에서 헤어졌다. 그가 창영정의 고갯마루 골목에 있는 주택가로 들어가 어떤 이층집에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답사단의 안내를 맡은 장 소장 함경란 해설사는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와 실제 장소를 비교해 가며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상세히 풀어냈다.

– 죽산 조봉암이 거주하던 도원동 부영주택

일제 강점기 지방관청인 인천부청은 지금의 중구 도원동, 동구 송림동, 남구 용현동과 숭의동 등에 도시계획에 따른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1930년대 후반 인천지역에 각종 공장이 들어서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생긴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천부가 직접 지어 분양한 집을 ‘부영주택’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시영아파트’와 비슷한 성격이다.

▲ ‘철도원 삼대’ 현장답사단이 함경란 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인천시 중구 도원동 12 일대에도 산비탈에 2m 남짓 높이의 축대를 쌓아 지은 부영주택 3채가 나란히 서있다. 이중 가운데 집이 죽산 조봉암이 1942년부터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돼 서울로 떠난 1948년까지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곳이다. 인천에 남아 있는 죽산의 유일한 흔적이다.

부영주택은 죽산이 독립운동을 벌인 혐의로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 수감생활을 마친 뒤 귀국해 정착했던 곳이자, 해방 직전 일본 헌병에 또다시 구금됐다가 해방과 함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곳이다.

이 곳에서 죽산의 정치역정이 시작됐고, 걸출한 독립운동가라는 이력 이외에도 인천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자, 대한민국 정치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된 출발점이기도 하다.

죽산의 맏딸 조호정 여사는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집 근처 애관극장이나 표관극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유독 로맨틱한 영화를 좋아했다”고 부영주택 시절 죽산의 일상을 회고했다.

죽산을 최대의 정적으로 여긴 이승만 정권과 사법부의 담합으로 1959년 사법살인을 당한 조봉암은 지난 2011년 대법원의 재심판결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그의 거주지였던 부영주택도 한동안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그 이후 시간이 지나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지면서, 이제는 역사나 진보 정치에 관심 있는 시민들이 흔치 않게 찾는 곳이 되고 말았다.

배다리 성냥박물관을 출발해 노다 간장공장, 동경제국대학 전염병 연구소 인천출장소, 이이철 거주지, 죽산 조봉암이 거주하던 도원동 부영주택을 돌아본 답사단은 조선 고종 때인 1883년 만들어진 ‘용동 큰 우물’을 마지막으로 이날 행사 일정을 모두 마쳤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2021년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마지막 행사로 오는 28일 임진각과 도라산 일대를 살펴보는 ‘분단의 역사현장’ 탐방행사를 개최한다.

이날 행사는 구영모 통일민주협의회 사무총장의 안내를 받아 임진각 망향대와 평화누리, 자유의 다리, 독개다리 등을 거쳐 제3땅굴, 도라산 전망대, 도라산역 등을 둘러보게 된다.

/글·사진=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

<2021-11-22> 인천일보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황석영 소설 ‘철도원 삼대’ 현장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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