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미얀마 민주화투쟁과 연대하다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로부터 듣는 미얀마 민주화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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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미얀마 민주화투쟁과 연대하다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로부터 듣는 미얀마 민주화투쟁

인터뷰 : 노기환 MC
정리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이번 호의 인터뷰는 최근 팟빵과 유튜브에 업로드된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의 <미얀마투쟁과 연대하다>를 발췌 정리하였다. 내역사 시즌6의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의 투쟁’ 2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로 민족문제연구소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가 공동 제작하였다. 인터뷰는 4월 23일 연구소 5층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출연자는 내역사 전문 MC 노기환과 연구소 연구위원이자 경희대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민철,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 흘라민툰(HlaMIn Tun), 헤이만(Hay Man)이다. 2월 1일 시작된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맞서 미얀마 시민들의 목숨을 건 민주화투쟁이 3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 두 분으로부터 미얀마의 상황,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들어보았다. 군부의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에 맞서는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에 적극적인 연대와 지지를 보낸다. <미얀마투쟁과 연대하다> 동영상은 팟빵과 유튜브에서 ‘내역사 미얀마청년연대’로 검색하면 시청할 수 있다.

 

MC노 │김민철 교수께서 오늘의 방송 주제를 제안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민철 │두 가지 이유인데요. 하나는 1980년 광주에서 참사가 일어났을 때, 군부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을 때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부산에 살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광주에서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런 소식들만 들었거든요. 언론이 통제된 시기였으니까요.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광주 참사의 실체를 알고, 특히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거꾸로 국민을 향해 총을 쏘고 학살했다는 것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제 20대는 광주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기억이 되살아났고요. 직접적으로는 19세 젊은이 마째신이, 티셔츠에 ‘everything will be OK’라는 문구를 쓴 청년이 아침에 아빠한테 시위에 참가하겠다고 인사하고 나가서 저녁에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제 사고가 멈췄습니다. 며칠 동안 마째신의 얼굴이 제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랐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자고 제안했습니다.

MC노 │이 자리에는 김교수와 함께 두 분을 모셨는데,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대표 흘라민툰씨와 헤이만씨입니다. 민툰씨는 대한민국에 언제 오셨습니까?

민툰 │ 저는 2006년도에 대학교에 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부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취업했습니다.

왼쪽부터 노기환 MC, 김민철 교수, 흘라민툰 대표, 헤이만 대표

MC노 │ 전공은요?

민툰 │ 경영학 박사인데요. 미얀마에 투자하는 한국기업의 성공요인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나중에 미얀마 가서 관련된 일이나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쿠데타가 터져서 앞날이 너무나 막막합니다.

MC노 │ 헤이만씨는 학생이신가요?

헤이만 │ 저는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아동학 석사과정에 있는 수료생입니다.

MC노 │ 헤이만씨는 언제 오셨습니까?

헤이만 │ 저는 2018년 하반기에 왔습니다. 3년 되어갑니다.

MC노 │ 김민철 교수님, 두 분과는 어떤 인연인가요?

김민철 │ 특별한 인연은 없습니다. 경희대에서 교직자들부터 성명을 내야겠다 생각하다, 학교에 미얀마 유학생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알아보니 헤이만 학생이 수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수업시간에 학생에게 특강을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MC노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어떤 조직입니까?

헤이만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2월 3일 결성되었고 2월 7일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의 시민단체인KOCO(해외주민운동연대)와 연대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로서 기자회견, 기도회, 시위, 학교특강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MC노 │ 최근엔 어떤 활동을 하고 있죠?

헤이만 │ 기자회견, 한국의 종교단체들과 협력해서 기도회 참여, 지난 3월에는 오체투지도 함께 했고,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하는 조계종 스님들의 미얀마 특별입국 신청, 3월 27일 미얀마 국군의 날에도 미얀마민주주의 네트워크에서 주최하는 ‘미얀마 봄의 행진’을 함께 했습니다.

MC노 │ 지금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몇 분이 함께 하고 있습니까?

헤이만 │ 아직 규모가 작아요. 인원이 20명 정도입니다.

MC노 │ 미얀마 현지 상황은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민툰 │ 지난 주까지만 해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뉴스를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많은 지역이 와이파이나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이 될 때 와이파이가 잡히는 장소에서 사진이나 동영상 뉴스를 올리면 저희가 한국 쪽에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에 전하고 싶거나 미얀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싱겔, 텔레그램 같은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해서 뉴스나 정보를 듣고 있습니다.

MC노 │ 두 분은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면 많이 괴로우시죠?

헤이만 │ 저도 집에 연락할 때는 주로 국제통화를 사용하고 있어요. 제 고향은 큰 도시가 아니어서 인터넷이 거의 안 되는 지역이어요. 그제는 동생이 이모가 계시는 지역으로 잠깐 왔었다고 해요. 동생이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하고 있어요. 여기는 CDM이라 많이 부르고 있어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체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피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다른 지역보다는 좀 안전한 편이어요.

MC노 │ 오늘이 4월 23일인데, 지금 미얀마는 어떤 상황입니까?

민툰 │ 가면 갈수록 사상자도 많이 생기고, 전에는 인터넷이 잘 돼서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바로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정보를 알 수 있으면 피해가거나 미리 대비할 수 있는데 지금은 정보가 잘 파악되지 않으니 활동이 많이 끊긴 상태입니다. 그래도 시민불복종운동도 열심히 하고, 각지역마다 시위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처럼 많이 하지 못하지만요. 양곤에서는 밤에 냄비를 두드리는데 8시에 두드리기로 약속되어 있으면 7시 30분에 군인이 와서 지켜보고 있어 냄비를 두드리지 못하다가 군인이 가면 두드립니다. 군인이 없는 지역에서만 시위를 계속 하니까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지금은 시위대를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총을 바로 쏘기 때문에 나중에 인터넷에 사진이나 동영상이 나올 때만 확인할 수 있어 더 불안한 상태입니다. 전처럼 바로바로 정보를 알 수 없어서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MC노 │ 미얀마 현대사에서 최초의 쿠데타가 일어난 게 언제였습니까?

민툰 │ 최초의 쿠데타는 1962년 3월 1일 네윈 장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MC노 │ 쿠데타 이전의 정부는 어떤 정부였습니까?

민툰 │ 미얀마는 1948년 1월 4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영국은 미얀마에 소수민족이 많으니까 부족 간의 이간질을 통해 지배했습니다. 2차 대전 때인 1942년에 미얀마는 일본을 끌어들여 영국하고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처음에 도와준다고 들어왔다가 오히려 3년간 미얀마를 지배했습니다. 1945년 8월 전쟁에서 지자 일본이 미얀마 땅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영국이 다시 미얀마에 들어와서 식민지를 다시 만든 거죠. 그러나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영국이 버마인 따로 소수민족 따로 독립시켜주겠다 하자 아웅산 장군은 같이 독립해야 한다고 맞섰고 이에 1947년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함께 독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 6개월 전인 1947년 7월 아웅산 장군이 암살당했습니다. 미얀마 독립 당시의 정치상황이 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미얀마에선 ‘우누시대’라 부르는 시기입니다. 우누는 아웅산 장군과 절친한 사이로 함께 독립운동을 했었습니다. 우누가 10년 정도 총리를 하면서 정치를 잘 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간의 분열이 생겨서 네윈 장군이 1962년 3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네윈의 주장은 미얀마의 군인은 독립군이다. 혼란스런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군인이 나라의 정권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1962년 3월에 첫 번째 쿠데타 이후 1988년에도 한 번, 올해 한 번 더 똑같은 방식의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MC노 │ 두 분은 한국에 있을 때 고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헤이만 │ 제 카톡으로 많은 메시지가 왔어요. 확인해보니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며 한국의 지인이 미얀마 현지직원과 저의 안부를 묻는 걸 통해 알았어요. 오전 쿠데타 발생 때 모든 통신이 마비되었는데, 해외 거주인들은 가족과 연락이 안됐다가 오후 1시가 되어서야 국영방송에서 쿠데타 발생소식을 보도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고 한국의 지인은 난민신청을 해야 하지 않냐고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 쿠데타를 겪어보고 외국에 있는 상태에서 난민신청 이야기까지 나오니까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고 멍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민툰 │ 사실 1월 말부터 쿠데타 이야기가 나오긴 했었는데, 이 시대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죠. 그런데 2월에 쿠데타가 일어나니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저는 군사정권시대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시대에 많은 아픈 기억이 있어요. 미얀마에 민주주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딱 10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2010년 이전에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신세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지만, 저희는 정치 이야기만 해도 잡혀가는 시대였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화도 많이 나고 분노가 일었습니다.

MC노 │ 미얀마 투쟁 보도에서 보이는 Z세대는 어떤 세대를 의미합니까?

헤이만 │ 1995년 이후 출생자들입니다. 이십대 젊은이들입니다. 그 이후는 알파세대, 그 이전은 Y세대, 1988년 이후는 X세대 이렇게 부릅니다.

MC노 │ 투쟁과정에서 Z세대가 많은 역할을 하는데, 그 세대는 미얀마 사회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헤이만 │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민주주의를 맛본 세대라 할 수 있죠. IT기술이 개발된 시대에서 자라왔고, X, Y세대보다 더 기술적으로 인터넷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툰 │ 2010년 전까지는 군사정권 시대여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시대의 Z세대는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보기엔 Z세대가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목표도 없고 늘 게임만 하는 친구들로 보였어요. 우리처럼 군사정권시대를 안 겪어본 신세대가 너무 가볍게 보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Z세대는 민주주의를 다 누릴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국제사회에 있는 젊은이들하고 같이 어울릴 수 있어요. 교육도 많이 받고, 인터넷에도 익숙하기 때문에 정보에 접근하는 데에도 두려움이 없는 세대죠. 이번에도 쿠데타가 일어나니까 우리 X, Y세대는 겁이 나서 밖에 나와 데모도 못하는데 Z세대는 데모했어요. 부모님이 반대하면 나가서 몰래 데모하다 잡히거나 죽은 사람들이 많이 발생한 거죠. Z세대는 자유롭게 표현하고 용감하게 싸울수 있는 미얀마의 새로운 젊은 세대입니다.

MC노 │ 2월 1일 쿠데타 이후에 시민들의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헤이만 │ 가두시위가 처음 발생한 것은 2월 4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72시간 동안의 침묵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신고 없이 불법적으로 길거리 시위에 나가면 군부에 진압명분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냄비를 두들기는 행위는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밤 8시가 되면요. 첫 번째 가두시위는 2월 4일에 만달레이라는 제2의 도시에서 만달레이 의대생들과 외국어대학생들이 나와서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의 거리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떼자산이라고 만달레이 의대 출신 의사입니다. 그분의 주도로 계속해서 길거리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번 시위에서는 Z세대의 활약이 매우 큽니다. Z세대는 IT 기술을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알기에 쿠데타에 대해서 전 세계에 소식을 알리는 데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미얀마의 인터넷은 페이스북으로 대표됩니다. Z세대가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를 해외에 알리려 했을 때 인터넷을 잘 활용했던 거죠.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활용해서 영어라든지 여러 가지 외국어를 잘 구사할 줄 아니까 다국어로 다 알리는 거죠. 트위터에서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하고 또 바이컷앱을 개발하여 친군부 기업에 불매운동, 사회적 처벌을 할 수 있게 리스트를 만들어주고, 여러 가지 정보를 한군데에서 볼 수 있게 데이터를 만들어 주었어요.

MC노 │ 말씀 중에 사회적 처벌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민툰 │ 사회적 처벌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사독재 정권을 만들어 국민을 통치하잖아요. 군부에 불복종하고 반대하는 방법의 하나로 군부와 관련되는 장군이나 그 가족을 페이스북에 알리고, 군부가 운영하는 사업체의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군부가 관련된 기업에서 파는 식품이나 제품을 사지 말자는 것이 사회적 처벌입니다. 리스트를 보면 먹고 마시는 것의 거의 절반이 군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제품을 사지 말자 하면 국민들이 다 안 삽니다. 얼마 전에 A라는 음료수를 사지 말자 해서 사회적 처벌 바이컷 대상이 되는 음료수가 안 팔리니까 B라는 제품으로 포장해서 50% 할인해서 팔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B제품을 사서 포장을 풀어보니 A제품을 B제품으로 속여서 판 것이 탄로 난 것입니다. 미얀마에는 사회적 처벌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죠. 저희들은 되도록이면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 저희는 중국제품을 불매운동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얀마쿠데타를 중국이 많이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중국제품을 안 사고, 미얀마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쓰자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같이 시위도 하고, 불매운동도 하면서 다방면으로 군부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MC노 │ 유엔 등 국제사회가 제대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 중국을 비롯한 나라들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민툰 │ 예,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에서 미얀마 군부 제재를 통과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내부 문제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말자는 거죠. 중국은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미얀마의 자원을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를 도와주고 있다고 봅니다.

김민철 │ 국제관계적으로는 미중 대립으로 볼 수 있죠. 중국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습니다. 동지나해 쪽으로는 타이완과 베트남인데 사이가 좋지 않죠.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전략으로 진주목걸이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데, 중국이 인도양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미얀마를 통해서죠. 미얀마 군부하고 관계도 좋고, 경제적으로는 송유관이 바로 연결되어 중국의 대외전략으로는 미얀마를 자기편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MC노 │ 시위대에 처음으로 발포한 것이 언제죠?

헤이만 │ 2월 9일입니다. 네피도에서 뮇떼떼 칸시라는 19세 여성이 머리에 총을 맞았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강경진압이 심해졌어요. 처음에는 인터넷을 사용해서 국제사회에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퍼포먼스 위주로 시위했는데, 유혈사태가 발생한 후부터는 가두시위가 더 강화되고 군부의 강경진압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면서 시위 유형도 바뀌었습니다. 무인시위로 사람이 나서지 않고 피켓을 세운다든지 갤러리 식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만달레이에서는 연좌농성이 있었고, 4월 4일은 부활절이어서 이스터 스트라이크라고 계란에 그림을 그려 활용한 시위, 플라워 스트라이크라고 ‘봄의 혁명에서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영혼들을 위해서’라는 제목으로 신발 안에 꽃을 꽂아 길가에 놔두는 시위 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점점 상황이 악화되자 국민들이 반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총, 화살, 화염병, 공기총, 뚜미(옛 화승총) 등 사카이주와 친주에서 이런 도구들을 많이 사용하자 군부는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탄압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싸움이 더욱 심각해지고 사망자와 피난민이 많이 생겼습니다.

한국에 있는 미얀마 유학생과 근로자 등으로 구성된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MC노 │ 미얀마 내의 무장단체들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민툰 │ 무장단체들은 1962년 쿠데타 이후 생겼어요. 미얀마 안에는 8개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각 소수민족마다 각각 1~10개 정도의 무장단체가 있습니다. 지금은 20~100개 정도가 있습니다. 20개 정도의 무장단체들은 전부터 군부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군사정부 시대인 2000년 이후에는 평화협정을 맺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다시 폭력사태가 발생하고 지역주민이 사망하게 되자 까친주와 까 인주의 무장단체들이 투쟁에 참여해서 정부군과의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헤이만 │ 군부는 전투기까지 투입하고 수류탄까지 사용해가면서 시민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MC노 │ 오늘까지 희생자가 어느 정도 되죠?

헤이만 │ 4월 22일 기준으로 사망자 수가 779명, 그 중 총상 사망 건이 741건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겁니다. 실제로는 800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MC노 │ 남녀차별과 관련한 미얀마의 독특한 풍습을 이번 싸움에 활용한다고 들었어요.

헤이만 │ 미얀마는 남녀차별이 좀 심한 편입니다. 파고다(절)에 가면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여자가 갈 수 있는 곳과 남자가 갈 수 있는 곳이 구분됩니다. 여자가 갈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있어요. 예를들어 절에 가서 불상에 금박을 입히거나 할 때는 여자가 못합니다. 그러면 남자한테 부탁해서 금박을 입혀야 해요. 이런 것을 이번 시위에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남녀의 하의를 같이 빨래하지 않아요. 그러면 남자의 품위, 자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여자 속옷을 빨래하면 널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보이는 곳에 공개적으로 널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번 시위에서는 군경들이 시위대를 잡으러 오니까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치마 거는 빨랫줄을 만들었어요. 높은 빨랫줄 위에 여성 치마를 널면 군인들이 그 아래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자의 하의를 스치거나 만지고 지나가면 부정 탄다고 생각해서 그 아래로 지나가지 못하고 빨랫줄을 치운 다음에야 지나갔어요. 빨랫줄이 바리케이트 역할을 해준 겁니다.
그런데 Z세대와 시위참여 시민들은 이제부터는 성차별을 없애야 한다며,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인데 미얀마의 남자들이 머리에 여성 치마를 두르거나 몸에 걸치고, 또 입은 사진들을 SNS에 많이 올렸습니다.

MC노 │ Z세대가 시위뿐만 아니라 미얀마에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군요. 군부가 저지르는 만행이 국제사회에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말씀해 주세요.

헤이만 │ 군부가 1988년에 했던 짓을 똑같이 벌이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려 하고, 미얀마는 다민족국가인데 인종적으로도 차별하며 버마족과 소수민족을 이간시키고 있어요. 시위대를 잡아다 고문하며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가하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는 삐퇀시베다운이라는 지역에서 경찰서를 불질렀는데 범인을 잡아내기 위해 두 살짜리 아이가 보고 있는 가운데 부부에게 고문을 가했어요. 아이를 인질로 해서 자백하도록 강요한 거죠. 결국 실토하고 잡혀갔는데, 그 아이는 엄마, 아빠 이름을 계속 부르며 울고 있답니다. 시위 사상자 중 10~20대가 40%에 이를 정도로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지지난주 양곤에서 시각, 청각장애인이 사는 곳을 군부가 점령해서 반격을 못하게 인질로 삼고 인간 방패로 썼어요. 꺼떤에서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했고, 잡혀가서는 고문을 당하고, 여성들은 고문 트라우마가 심각해서 말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해요. 모래주머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는데, 총을 겨누며 동네 사람들에게 그걸 치우게 합니다. 발로 차고, 때리고, 여성을 폭행하고, 너무 심각한 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국영방송에 나오는걸 보면 체포당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엉망이고, 밤에 잡혀갔는데 아침에 시신 가지러 와라 이런 통보를 받아요. 어떤 사람들은 잡혀갔는데 생사가 불분명해요. 민간의 재물을 가져가고, 식당에서 먹고는 음식값을 내지 않고 다 파손시키고, 아무 이유도 없이 길가에 주차된 차량이나 자전거를 부수고 하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군인들이 긴 시간 동안 군대에서 고통을 받아와서, 세상에 나와 보니 민간인들이 자기들보다 더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무 이유없이 분노를 폭발시킨다고 보고 있죠.

MC노 │ 지금 미얀마 국민들이 원하는 건 무엇인가요?

헤이만 │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구금된 지도자들이 석방되며,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민주주의에 기반해 국민통합정부가 성립하는 것이 국민들의 목표입니다. 저희가 1988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에 대한 저항이 성공할거라고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시민불복종 운동도 더 강화되고 있고, 시민방위군이 생기면 시민들도 합류해서 저항하겠다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민툰 │ 민족연합이 우선입니다. 풀리지 않는 민족 간의 화합이 필요한데, 이번 쿠데타에 대한 저항에 소수민족이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민족통합국가를 만들자는 생각입니다. 소수민족의 입장을 서로가 이해하고 평화협정을 맺어 1947년에 아웅산 장군이 추구한 그런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헤이만 │ 미얀마는 불교국가여서, 이번 쿠데타에 대한 종교 지도자의 명확한 입장을 기대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유혈진압이 심해지고 사망자가 발생하고 나서야 애매모호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것에 대해 젊은이들의 신뢰가 깨지고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한국 불교계는 많이 지지하고 연대해주셨는데요.

MC노 │ 아웅산 장군은 어떤 분이십니까?

민툰 │ 아웅산 장군은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배운 사람인데도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나라를 위해 일하신 분입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영웅 중에도 길이 이름을 남긴 분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MC노 │ 미얀마는 다민족 국가여서 민족별로 평가가 조금 다르지 않나요?

민툰 │ 아웅산 장군은 민족통합을 이뤘기에 모두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그분의 딸인 수치 여사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 미신 문제를 잠깐 말씀드릴게요. 1983년 아웅산 묘역 테러가 일어났을 때에 미신을 믿는 네윈이 제 시간에 국립묘지에 가지 않았어요. 미신을 많이 믿고 있어서 늘 일찍 가거나 늦게 가거나 하지, 제 시간에 가지 않았어요. 네윈 장군이 도착하기 전에 폭탄이 터져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지금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장군들도 미신을 많이 믿고 있습니다. 특히 목요일에 ‘ㅁ’으로 시작하는 도시에서 늘 유혈진압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의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지금 장군 이름이 미엉라잉으로 ‘ㅁ’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점쟁이가 시위대의 머리에 총을 쏘면 시대를 바꿀 수 있다고 하니, 저격수를 배치해서 머리만 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망자가 많이 나왔어요.

헤이만 │ 더욱 충격적인 것은 스님이 점을 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거죠. 종교인의 이런 행동에 더욱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MC노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의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요?

헤이만 │ 저희는 유학생과 근로자로 구성되어 있어요. 한국에도 여러 단체가 있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단체도 많이 있습니다. 저희는 시민단체로서 작은 역할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기자회견, 추모회, 기도회 등 종교단체들과의 연대활동을 해왔습니다.

민툰 │ 미얀마에 대한 소식을 한국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플랫폼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클럽하우스에서 미국, 영국, 한국 사람들과 미얀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얀마에 대한 소식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부가 빨리 유혈사태와 진압을 멈추고 협상할 수 있는 날까지 계속하겠습니다. 또한 쿠데타가 수습되고 나면 미얀마의 복원에도 힘쓸 생각입니다.

MC노 │ 한국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연대활동은 무엇이 있을까요?

헤이만 │ 후원금 모금인데, 해외주민연대 KOCO를 통해서 참여해주시면 됩니다. 다음에는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릴레이 영상을 만들어서 KOCO에 보내주면 됩니다. 그러면 저희가 영상에 미얀마어 자막을 넣어서 현지 커뮤니티와 공유합니다. 그 외에도 일요일마다 인사동에서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1시 반까지 침묵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한국의 지지자들이 함께 와서 연대해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엽서와 마스크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는데,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민툰 │ 한국인들이 많은 후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등학교에 가서 미얀마 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면 많은 학생들이 지지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줘요. 이걸 미얀마에 전하면 큰 힘이 됩니다. 시위에 앞장서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한국 사람들의 지지가 많은 힘이 됩니다. 후원금을 보내는 것도 좋고, 세손가락 경례 사진을 찍어 올려주고, 응원 메시지를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김민철 │ 미얀마는 공무원에게 주택이 보장되어 있는데, 정년 후에도 계속 살 수 있어요. 군부에 반대하면 집에서 쫓겨나게 되니, 주택지원도 필요해서 후원금이 여기에도 쓰인다고 합니다. 저항이 길어지면 난민이 많이 발생할 수 있는데, 태국 근처에 난민 수용소가 세워지게 되면 그 비용도 필요하고요. 후원금이 여러 가지로 활용되리라 보입니다.

헤이만 │ 처음에는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해왔지만, 지금은 피난민 지원금, 시위대 보호장비 구입, 의료비 등에 지원할 것입니다. 현재 미얀마의 의료수준이 한국에 비해서는 덜 발달해 있어서 쿠데타가 수습된 이후에는 쿠데타 때 입은 트라우마 치료에 한국의료계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MC노 │ 미얀마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민철 │ 제가 헤이만씨를 초청해서 특강을 개최했는데, 특강 제목을 ‘미얀마에 귀 기울이다’로 잡았습니다. 그 이유는 1980년 광주로 돌아가서 봉쇄된 도시에 고립된 사람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누군가 밖에서 그런 소식들을 계속 알려주고 연대의 마음을 전했더라면 조금은 힘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죠. 지금 미얀마는 길어질 싸움을 하고 있고 너무나 힘들고 지치기에 낙관적 전망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국 시민들이 미얀마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억하며 이들의 민주화투쟁을 적극 지지해주었으면 합니다.

MC노 │ 세손가락 경례를 개인 SNS에 올려주어도 큰 힘이 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많은 분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를 바랍니다. 미얀마 국민들의 투쟁이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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