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과 실천적 지식인 김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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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1940년 여름, 명륜학원(성균관대학교의 전신) 강사인 김태준은 경북 안동 출신의 제자 이용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고향집에 조상 대대로 가보로 전해져 내려오는 훈민정음 원본(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다는 것이다. 김태준은 훈민정음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이용준과 함께 안동군 와룡면 주촌에 세거(世居)하던 후촌 이한걸 댁을 방문했다. 훈민정음 원본을 자세히 살펴보니, 세종대왕이 집필한 예의편(例義篇)과 왕명에 의해 정인지·신숙주 등 집현전 8학사가 쓴 해례편(解例篇), 정인지 서문 등 세 부분 31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예의편의 첫째와 둘째 장이 없었다.

이한걸 선생이 훈민정음 소장 내력과 두 장의 결락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은 본관이 진성 이씨로 퇴계 이황의 종파이며, 일찍이 선조 이정(李禎)께서 여진 정벌의 공이 있어 세종대왕으로부터 훈민정음을 상으로 받아 늘 궤짝에 감추어 세전가보로 간직해 오다가, 연산군 때 언문책 소지자를 엄벌할 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첫 머리 두 장을 뜯어 버리고 돌돌 말아서 비장(秘藏)해왔다는 것이다.¹

김태준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28년(1446) 9월 29일 기사에 훈민정음 예의편이 있음을 알고 이용준과 함께 결락된 두 장을 보수하기로 했다. 이용준은 이한걸 선생의 셋째아들로 12세때부터 서예에 뜻을 두고 안진경체를 익혀 16세 되던 1931년에는 동아일보에 ‘서예계의 신동’으로 대서특필되었다.

 이용준은 <조선왕조실록>의 훈민정음 예의편 앞부분을 안평대군 필체로 모사하여 결락된 두 장을 복원하였다. 복원과정에서 세종대왕 서문 말미에 “편어일용이”(便於日用耳)를 “편어일용의”(便於日用矣)로 잘못 필사하였다.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1) <조선일보> 1940.7.30.

김태준은 이한걸 선생에게 훈민정음이 국어학 연구자료로 매우 귀중한 것임을 알리고 이 책을 서울로 가져가기를 청해 허락을 받았다. 서울로 돌아온 김태준은 훈민정음 원본을 당대의 국어학자인 방종현과 홍기문(홍명희의 아들)에게 번역을 맡겼다. 그 결과물이 <조선일보> 1940년 7월 30일부터 8월 4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란 제목으로실렸다. 여기서는 훈민정음을 입수한 경위를 서술하고 해례편 전문을 초역해 놓았으며 “그 원문의 번역을 싣고 뒤를 이어 거기에 대한 주석 내지 우리 두 사람의 연구를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조선총독부와의 협의 하에 그해 8월 11일자 석간을 끝으로 폐간되었고²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1943년 조선어 사용 금지 등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활용한 연구가 불가능해져 해방 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한글 창제 원리를 명확히 기술한 훈민정음 ‘해례편’이 역사상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훈민정음 원본 발견에 대해서 대부분의 식자들이 크게 환영하였는데 특히 외솔 최현배는 “경북 안동에서 이런 진본이 발견됐다니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신 것…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라며 감격하였다.(<한글갈>, 1942)

왼쪽부터 조선왕조실록 113권 훈민정음 기사,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훈민정음 언해본 ‘세종어제 훈민정음’

훈민정음에는 언해본(한글본)과 해례본(한문본)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것은 언해본이다. 세종대왕이 지은 서문과 한글자모 28글자를 간략히 설명한 예의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월인석보>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이 너무나 소략하여 학자들 간에 한글 창제 원리와 구체적인 사용법에 관한 견해가 분분했다. 이에 비해1940년에 발견된 해례본에서 처음 등장한 해례편은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 용자례(用字例)의 순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천지인(天地人)을 응용한 모음 제자 원리와 발음기관을 본 딴 자음 제자 원리를 밝혀놓아 한글 연구의 신기원을 열었던 것이다.

김태준은 이한걸 선생의 요청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구매자를 수소문하여 장안의 대부호이자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 선생을 연결시켜 주었다.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중히 보관해오다가 훈민정음 반포 500주년(1946년)을 맞이하여 그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어학회에 위탁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영인하여 널리 보급함으로써 한글 연구에 크게 공헌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사후인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이 이를 소장하고 있다.

한국 고전문학 연구의 지평을 넓히다

명륜학원 강사 시절의 김태준

천태산인(天台山人)이라는 필명으로 많은 글을 썼던 김태준은 1905년 평북 운산에서 한문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15세 때 운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후 연변공립농업학교에 입학, 3학년 때 공립이리농림학교로 전학했다. 1926년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해 1931년 3월 동 대학 법문학부 중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 신라 향가와 이두를 연구한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 경성제대 교수 밑에서 국문학의 유산을 발굴·정리하는 데 힘썼으며 ‘경제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 이론을 공부하였다. 또한 재학 중이던 1930년에 ‘조선소설사’를 「동아일보」에 68회에 걸쳐 연재하여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31년 경성제대를 졸업한 후, 총독부가 운영하는 유교 교육 기관인 경학원 직원(直員) 겸명륜학원 강사에 임명되어 한문학(漢文學)를 가르쳤다. 그해 조윤제·이희승·김재철 등과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고 <조선어문학보>와 ‘총서’를 펴내는데 참가했으며 우리나라 한문학과 소설의 역사를 다룬 <조선한문학사>(1931)와 <조선소설사>(1933)를 잇따라 펴냈다. 1934년5월 한국의 역사·언어·문학을 연구하는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상무위원이 되었으며 기관지 <진단학보>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역대 고전가요를 취사하여 편집한 <조선가요집성>을 출간했다. 이 책은 신라향가편, 백제고가편, 고려가사편, 이조가사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에도 우리나라 시가(詩歌) 연구의 기초자료로 중시되고 있다. 1938년에는 한국 고전문학에 대한 뛰어난 연구성과로 손진태, 김두헌과 더불어 학술연구보조생으로 선발되어 학사원(學士院)으로부터 거액의 연구보조금을 받았다. 

1939년 명륜학원 강사 겸 경성제대 조선문학 강사에 취임했다. 그해 정년퇴직하는 다카하시도루(高橋亭)의 후임으로 조선문학을 강의하게 되었는데 경성제대에서 교편을 잡은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이해에 그간의 연구성과를 모아 학예사의 ‘조선문고’ 시리즈로 <증보 조선소설사>를 펴냈고 <원본 춘향전> <고려가사> <청구영언> 등을 교열하여 출판했다.

김태준은 1930년부터 1939년까지 한국 고전문학사의 기념비적 저작인 <조선한문학사>, <조선소설사>, <조선가요집성>을 집필했을 뿐 아니라 각종 신문 잡지 학술지에 「별곡(別曲)의 연구」 「조선가요개설」 「시조기원에 대한 재고」 「조선민요의 개념」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 「조선소설발달사」 「홍길동전 연구」 「구운몽의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과 평론을 무수히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연구성과는 현재까지도 국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특히 <조선한문학사>와 <조선소설사>는 비록 제한된 자료와 실증적 방법상의 한계가 있으나, 각 분야에서는 최초의 통사적 기술로서 국문학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왼쪽부터 조선소설사, 조선한문학사, 조선가요집성

경성콤그룹 활동과 연안행

1939년 4월 일제 당국의 검거를 피한 이재유 일파의 이관술과 김삼룡 등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경성콤그룹(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 지도부를 형성하고 이후 박헌영을 지도자로 영입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태준은 경성제대 강사로 재직하던 중 비밀리에 경성콤그룹에 가입했다. 이현상·정태식과 함께 인민전선부에 소속돼 과거 활동가들을 결집하고 새로운 조직원을 포섭하는 역할을 하였다. 1940년 8월에는 박헌영이 지도하고 있는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편집하였다. 1940년말 경성콤그룹의 지하조직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어닥쳤다. 김태준은 1941년 1월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과 함께 검거되었고 온갖 취조와 고문을 당한 후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3년 여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김태준이 옥중에 있는 동안 생활고로 인해 그의 노모와 아내, 젖먹이 아들까지 모두 잃는 아픔을 겪는다. 김태준은 비극적인 가족사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마주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과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더욱 단단히 벼린다. 그의 마지막 저술 <연안행(延安行)>³에서 학자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실천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문학연구니 역사연구니 언어연구니 하는 것은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의 일이니 당분간 이 방면의 서적은 상자에 넣어서 봉해두자. 보는 책은 경제학ABC, 인터내셔널, 전기, 레닌 선집 등이었다. 나는 좀더 튼튼한 세계관을 수립하려고 모색하였다. 외계에는 공출, 배급, 징용, 징병에 떨며 울고 있는 수천만 형제자매의 아우성소리 조음(燥音: 애태우는 소리)이 이타(耳朶: 귓불)를 치는데, 어느 겨를에 조선문학이니 조선역사니 찾고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

출옥 후 경성콤그룹 잔존 조직원들과 소규모 비밀활동을 계속하던 중 1944년 1월, 경성콤그룹 핵심투사로서 옥중생활을 마치고 나온 박진홍과 비밀혼인을 하였다. 1944년 서중석을 중심으로 꾸려진 서울 지역 공산주의자협의회는 군사문제토론회의 결의를 통해 김태준에게 중국 연안에 가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김두봉, 무정 등과 함께 국내 진공에 대한 군사대책을 세워보라고 지시했다. 연안은 당시 중국공산당의 거점으로 팔로군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조선의용군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김태준·박진홍 부부가 1944년 11월 서울을 떠나 일본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며 신의주, 안동, 봉천, 산해관, 천진, 북경을 거쳐 1945년 4월 홍군 해방구 연안에 다다랐다. 연안의 조선독립동맹 총부는 김태준·박진홍 부부를 크게 환영하고 후대하였다. 김태준은 조선 내 정세와 반일투쟁 양상을 설명하고 조선의용군의 국내 진공책을 논의했다. 이후 조선혁명가를 양성하는 조선혁명군정 학교에서 ‘조선국내반일투쟁정세’ 등에 대해 특별강의를 했다. 

일제의 항복 후 9월초에서 10월말까지 화북에서 심양에 이르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행군 도중 이들 부부는 관동군 패잔병들과의 잦은 전투를 겪으며 온갖 역경을 헤쳐나갔다. 이들 부부는 심양에서 조선독립동맹과 헤어져 1945년 11월 하순 서울에 도착하였다.

참담한 분단 현실에 항거하다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다

김태준이 서울에 도착해 마주한 조국의 현실은 그가 꿈꾸던 자주독립국가가 아니었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가 분단되었으며 미군정청이 통치하는 남한은 친일파와 모리배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모교인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의 후신)에서 몸담으며 지난날 못다한 한국 고전문학을 연구하고자 한 희망을 접고 다시금 민족해방투쟁의 전사로서 떨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8·15 이후 해방은 되었다고 하나 이 남조선은 친일 팟쇼분자 모리배의 낙원이라는 말을 들을 적에 비상한 불쾌를 느낄 뿐 아니라 친일파 팟쇼분자 모리배의 도량(跳梁: 함부로 날뜀)으로 인해서 혼란을 결과한 남조선의 대비극에 대하여 해방의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나는 해외에서 유랑하다가 들어온 전재민(戰災民)의 한 사람이다. 경성에는 많은 적산 사찰 유곽 요정 등 빈집이 있건만 나에게 집 한 칸도 없다. 오직 일제시대 인민의 이익을 위해서 싸웠다는 죄 때문에 테러단이 따라다니고 쌀은 하루 1홉의 배급도 타본 일 없고 밀가루와 강냉이도 없어서 곤궁과 낙망에 신음하며 물가는 천정을 모르고 올라가니 도대체 이와 같은 곤궁은 나뿐이 아니라 남조선 인민 전체의 동일한 처지에 있는 것이요 이 때문에 인민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었다.(「정치적 혼란과 경제 파탄으로 민생은 도탄에 전락!」, <독립신보> 1947.1.8)

김태준의 <연안행>(왼쪽)과 1946년 2월 김태준이 보고 강연을 한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 회의 장면 (오른쪽) Ⓒ김용준

김태준은 1945년 12월 경성대학에 복직되었고 이 무렵 교수, 학생, 졸업생 등 60명으로 구성된 전학대의원회에서 세 명의 총장후보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미군정청의 반대로 서울대 총장에 오르지는 못했다. 미군정청은 경성대학의 좌경화를 우려하여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친미적인 대학을 만들기 위해 1947년 6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공표했다. 이에 대해 전국에 있는 대학의 진보적 교수와 학생들이 맹렬히 반대했으나 미군정청의 강력한 탄압으로 그해 9월 경성대학은 서울대학교로 개편되고 김태준을 비롯한 수백 명의 진보적 교수와 2천여 명의 학생이 해직, 퇴학당했다. 

한편 김태준은 귀국하자마자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과 문화부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상임위원 겸 문화부차장을 지냈다. 아울러 그해 2월 조선문학가동맹이 주최한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조선고전문학에 관한 보고를 했으며 3월에 이조실록간행회가 조직되었을 때 홍기문과 함께 편집위원에 이 름을 올렸다. 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과 평론부장,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그해 12월에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김태준 등 9명에 총살언도. <경향신문> 1949.10.2. 위에서 두번째가 김태준

1947년 ‘8·15폭동 음모사건’으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1년간 수감되었다가 대사령에 의해 1948년 9월 석방된 후 지하로 잠적했다. 이무렵 남로당의 핵심간부 대부분은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했다.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던 아내 박진홍도 김태준과 낳은 아들을 데리고 이때 월북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서울에 남아있던김태준은 문화공작대의 일원으로 지리산에 파견되어 오장환, 이용악, 유진오 등 예술인과 함께 유격대 지원사업을 벌였다.

남로당 문화부장 겸 특수정보부장으로 문화공작대 지원사업과 기밀탐지사업을 하던 김태준이 서울시경 사찰과에 의해 종로에서 체포된 것은 1949년 7월 26일이었다. 이적행위 및 간첩죄로 기소되어 9월 27일부터 육군준장 원용덕이 재판장을 맡은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군사재판이 진행되었다.

최종선고일인 9월 30일, 김태준은 최후 진술에서 “지금 조선에는 고전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고증하는 것이 중대한 일이다. 앞으로 용인된다면 상아탑에서 대한민국을 위하여 이러한 일을 하고 싶다.”고 피력했다고 한다.(<경향신문> 1949.10.1.) 최후 진술을 마친 후 원용덕 재판장으로부터 사형언도를 받았고, 11월 어느 날 서울 수색 육군사형장에서 총살당하였다.


1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 소장처에 대해서 이용준의 본가설과 처가설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본가설을 따랐다. 이 견해는 안동고 국어교사였던 정철이 1954년 국어국문학회가 펴낸<국어국문학> 제9권(1954.4)에 발표한 「원본 훈민정음의 보존 경위에 대하여」에 근거한다.
이에 반해 이용준의 처가설은 곧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에 세거하던 광산김씨 종가, 긍구당 종손인 김응수 씨의 소장본이라는 설이다. 이 설은 박영진 동래여중 교사가 한글학회 회보인 <한글새소식> 제395호(2005.7)에 기고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에 의해 제기되었다. 1991년 10월 18일 긍구당 종손 김대중 선생의 답장 “이한걸 댁은 우리 셋째 고모의 시댁일세. 이한걸 씨의 삼남 이용준 씨가 나의 고모부일세.… 조부(김응수)께서 [사위를] 사랑하여, 오시면 책방에서 마음대로 책을 보게 하였다네. 그분이 이런 점을 기회로 <훈민정음> 원본과 <김매월당집>을 가져갔네. 정음원본의 앞에 두 장 없는 것은 우리 집의 책에는 앞 첫 장에 꼭 장서인을 찍어놓네. 말짱한 책에 앞장이 없는 것은 증인을 소멸하고자 함이 분명하고(하략).
2 조선일보의 폐간 경위는 <민족사랑> 2020년 7월호에 실린 「부역언론의 산파, 두 사주의 민낯」(최우현 연구원)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3 <연안행>은 서울에서 중국 연안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해방 후인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발행한 기관지 <문학> 1호, 2호, 3호에 나누어 연재한 글이다.


[참고문헌]

알브레히트 후베, <날개를 편 한글>, 박이정출판사, 2019
김슬옹,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한말연구> 제37호, 한말연구학회, 2015
이기환, 「반갑도다! 훈민정음의 나타남이여! 1940년 <간송본>의 출현에 외솔이 외쳤다」, <경향신문> 2019.11.5
김인현, 「국문학자 삶 떨치고 공산주의 활동 김태준」, <한겨레신문> 1991.9.13.
최영성, 「김태준의 학술연구와 국고(國故)정리작업」, <한민족어문학> 제46집(2005)
김성동, 「김태준 : 아름다운 문화조선을 꿈꾸던 ‘문화공작대장’」,<현대사 아리랑>, 녹색평론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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