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친일파 인사 35명이 요리집 식도원(食道園)에 급히 모인 까닭은? 표석 하나로 남은 이봉창 의사의 효창동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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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8]

친일파 인사 35명이 요리집 식도원(食道園)에 급히 모인 까닭은?
표석 하나로 남은 이봉창 의사의 효창동 집터

이순우 책임연구원

『매일신보』 1936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식 요리점 식도원(食道園)의 근하신년광고이다.

 

청계천의 광통교(廣通橋)를 남쪽으로 건너자마자 곧장 나타나는 한성은행(漢城銀行, 나중의 조흥은행)
을 끼고 두 번째 가게 옆으로 감아돌면 남대문로 쪽으로 출입구를 낸 식도원(食道園, 남대문로 1가 16번지 및 삼각동 78번지 일대)이라는 유명한 조선식 요리점이 그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기생요리집의 대명사인 명월관(明月館)의 주인이던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이 1920년 11월에 식도상회(食道商會)와 더불어 설립하였으며, 궁중식(宮中式) 조선요리와 함께 일본식 및 서양식 요리를 곁들여 제공하는 한편 신식교육을 받은 젊은 신랑신부의 결혼식도 곧잘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른바 ‘불경사건’의 범인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경악한 친일파 인사 35명이 식도원 요리점에 급히 모
여 충성 결의를 하고 있는 장면이 수록된 『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의 보도내용이다.

 

그런데 1932년 정초가 되어 9일째가 되던 날에 이곳 식도원에 35명이나 되는 서울 장안의 난다 긴다 하는 친일파 인사들이 근심 어린 낯빛으로 줄줄이 모여들었다. 참석자 가운데 도지사 출신의 신석린(申錫麟)을 좌장으로 삼아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림이 잠시 이어지더니 이들은 다음과 같은 회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하나, 총리대신, 척무대신, 궁내대신 및 동상중(東上中)의 총독(總督)에게 봉위(奉慰)의 전보(電報)를 타전(打電)함.
하나, 7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총독부, 군사령부를 방문, 봉위의 뜻을 표함.
하나, 3일간은 일체 도락적 연회(道樂的 宴會)에 출석치 않음.
하나, 재성(在城) 신문잡지에 근신(謹愼)의 뜻을 표하고 동포(同胞)에게 근신의 지(旨)를 종용(慫慂)함.
하나, 전보 발신명은 좌(左)의 7명으로 함. 위원(委員) 한상룡(韓相龍), 박영철(朴榮喆), 신석린(申錫麟), 조성근(趙性根), 김명준(金明濬), 민대식(閔大植), 박승직(朴承稷).

 

곧이어 이들은 이러한 결의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봉위전문(奉慰電文)을 즉각 타전하였다.

 

작일(昨日) 돌발(突發)한 불경사건(不敬事件)에 대하여는 오직 공구불이(恐懼不已)이오며 충성(忠誠)으로써 근신(謹愼)의 의(意)를 표(表)하옵나이다. 경성조선인유지(京城朝鮮人有志).

 

이들이 이러한 위문전문을 서둘러 발송한 것은 바로 전날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사쿠라다몬사건(櫻田門事件)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내무성(內務省)의 발표에 따르면, 해마다 신년행사로 벌어지는 육군시관병식(陸軍始觀兵式)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본 천황의 노부(鹵簿, 의장행렬)가 경시청(警視廳) 앞을 닿으려 할 찰나에 누군가 이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고, 그 범인으로 조선 경성 출신의 이봉창(李奉昌, 1901~1932)이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취조중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안절부절 못한 것은 이러한 ‘불경사건’의 범인이 바로 조선인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중추원 참의이자 조선생명보험 사장이던 한상룡(韓相龍)과 같은 이는 이소식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이러한 소감을 피력한 바 있었다.

불경사건은 공구(恐懼)의 염(念)을 금치 못하는 바요, 특히 범인(犯人)이 조선 사람이라 함을 들을 시에 더욱 황공무지(惶恐無地)외다. 따라서 우리 조선 사람으로는 일층 더 근신(謹愼)하여야 하겠다는 외에는 무어라 말씀하여야 좋을지를 모르는 바외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숨졌을 때 얼빠진 친일단체와 몇몇 친일인사들이 사죄단(謝罪團)을 꾸려 일본까지 건너갔듯이 그 일을 고스란히 빼다 박아놓은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꼴불견에 가까운 이러한 광경은 비단 식민지 조선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마루야마 회장이 이끄는 상애회(相愛會) 회원 400명이 도쿄황거 이중교 앞에서 늘어서서 궁성요배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충성 맹세를 하는 광경이 수록된 『경성일보』 1932년 1월12일자의 보도내용이다.

 

<경성일보> 1932년 1월 12일자를 살펴보면, 황거(皇居) 앞 이중교(二重橋)를 배경으로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포착된 보도사진 한 장이 수록되어 있다. 알고 보니 이들의 정체는 도쿄 지역에 거주하는 상애회원(相愛會員) 4백 명이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상애회는 1921년 12월에 도쿄 지역 조선인 노동자의 상호부조단체인 노동상구회(勞動相救會)를 개편하면서 탄생하였고, 친일주구로 악명이 높은 이기동(李起東, 1885~1952)과 박춘금(朴春琴, 1891~1973) 같은 이가 이 조직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이후 1928년 4월에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출신(1922.6.17~1924.9.12 재임)의 마루야마 츠루키치(丸山鶴吉, 1883~1956)가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특히 박춘금은 그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1932년 3월 조선인으로 최초이자 유일하게 대의사(代議士,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진에 붙어 있는 설명문에는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맹세하다”는 구절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대불경사건이 조선인의 손에 의해 행해졌다는 사실이 그저 송구스러워 사건 바로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궁전 앞에 모여 요배(遙拜)를 하고 ‘천황폐하만세’를 삼창(三唱)하면서 절절한 충성 맹세의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행렬 앞에 나선 마루야마 회장은 “금후에는 국가를 위해 내선융화(內鮮融和)에 노력할 것을 맹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훈시를 덧붙였다.
전날의 거사를 벌인 이봉창 의사는 본적(本籍)을 ‘경성부 금정(錦町, 지금의 효창동) 118번지’에 두었으나 원래 출생지는 통칭 ‘당현(堂峴, 당고개)’으로 불렀던 ‘경성부 원정(元町, 지금의 원효로) 2정목(지번은 미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버지 이진구(李鎭球)와 어머니 밀양손씨(密陽孫氏)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위로 이범태(李範泰)와 아래로 이점동(李点童) 외에 이복동생인 이봉준(李奉俊), 이봉운(李奉雲), 이종태(李鍾台), 이덕희(李德熙, 누이)가 있었다.

 

『황성신문』 1905년 10월 3일자에는 ‘용산 당현(堂峴, 당고개)에 사는 이진구(李鎭球)’가 낸 문권분실광고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이봉창 의사의 부친이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재력 덕분에 풍요한 생활을 하였으나 이내 가세가 기울어 생계가 어려운 처지를 겪었다고 전해진다.(왼쪽) 『매일신보』 1932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이봉창 의거에 관한 일본 내무성 발표 내용이다.(오른쪽)

 

1932년 9월 30일에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한 사실과 이봉창 의사의 인물사진을 함께 수록한 『부산일보』 1932년 10월 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사건 당시 총독부 경무국에서 조사 발표한 인적사항 관련항목에 “부모는 일찍 사망하고 ……운운”하는 대목이 있으나 이는 정확한 설명은 아닌 듯하다. 이봉창 의사 본인이 진술한 ‘제5회 신문조서(1932년 2월 9일 작성)’에는 부친은 1930년에, 모친은 1927년에 각각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 나온 여러 신문의 탐방기사에 이봉창 의사의 어머지 주씨[朱氏, 본명은 주간란(朱干蘭)]라는 분이 생존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 사람은 아버지 이진규의 첫째 소실(小室)이고 정봉희(鄭鳳姬)라는 이름의 다른 소실이 한 명 더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봉창 의사에 대한 예심판사 의견서(1932년 6월 30일 작성)와 판결문(대심원, 1932년 9월30일) 등에 기술된 내용에 따르면, “용산(龍山)의 자산가(資産家) 이진구의 차남으로 태어나 유년시절에는 편안한 생활을 보냈으나 …… 아버지의 병세와 사업차질로 인하여 이내 가세가 기울고 마침내 생계조차 어려워지기에 이르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따라 소년 시절 이봉창은 사립문창학교(私立文昌學校)를 나오자마자 일본인 가게에서 고용살이를 하였고 1919년 8월에는 용산역(龍山驛)의 시용부(試庸夫)로 들어가 역부(驛夫)와 전철수(轉轍手)를 거쳐 연결수(連結手)로 일하였으나 빈곤상태를 떨쳐버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4년 4월에 이르러 조선인 차별대우에 대한 싫증과 신병(身病)을 이유로 용산역에서 근무하는 일을 그만 두기에 이른다. 그 이후 철도에 종사하던 후지하타(藤幡)라는 일본인이 내지(內地, 일본)로 돌아가던 차에 조선인 식모를 데려가고 싶다는 얘기가 있어서 이를 계기로 자신의 조카 이은임(李銀任, 형 이범태의 딸)과 함께 1925년 11월에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이때 이봉창 의사는 우선 오사카 지역에서 직장을 구하였고 키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차별대우에 대한 반발과 건강상의 이유로 몇 차례 취직과 사직을 반복하였고, 특히 1928년 11월에 교토에서 거행된 천황 즉위식을 참관하러 갔다가 한글로 표기된 편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검속에 걸려 부당하게 경찰서 유치장에서 9일간이나 구류되는 경험을 하였는데, 이때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탓인지는 몰라도 심지어 1929년 2월 이후 2년가량은 아예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비누상회, 해산물 도매상점, 가방상점 등에 일자리를 전전한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1년 쯤 도쿄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거쳐 다시 오사카로 돌아오자마자 이내 1930년 12월에 취업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이곳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던 와중에 ‘백정선(白貞善)’으로 통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김구(金九)와 만나 여러 차례 접촉과 교유를 하던 끝에 천황폭살에 관한 결심 피력과 거사 모의가 성사되었고, 1931년 12월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고 수류탄을 전달 받아 코베항을 통해 다시 일본으로 잠입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32년 1월 8일의 거사가 결행되었고, 폭탄의 위력이 약해 뜻을 이루지 못한 이봉창 의사는 사건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 30일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이 선고되자마자 10일 후에 이치가야형무소(市ケ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이로부터 14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광복 이듬해에 이르러 김구 선생의 뜻에 따라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등 삼의사(三義士)의 유해봉환이 추진되면서 마침내 1946년 6월 15일에 각각 최석봉(崔錫鳳, 한독당 경남지부장), 윤남의(尹南儀, 윤봉길 의사 동생), 이강훈(李康勳, 상하이 육삼정 의거 동지) 등 세 사람의 가슴에 안겨 이들 유해는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朝鮮解放者號)를 통해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내 수송동에 있는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조계사)로 운구되어 그곳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20여 일이 지난 그해 7월 6일에는 삼의사의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이들 유해는 옛 효창원 묘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자에 수록된 「조국 광복에 바친 세 혈제(血祭)! 조기(弔旗) 아래 전시민이 애도」 제하의 기사에는 삼의사 장의행렬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묘사되어 있듯이 이봉창 의사가 살던 집(1917년에서 1925년 사이에 거주)이 바로 장의행렬과는 불과 100여 미터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금정(錦町, 효창동) 118번지’였으므로 그 누구보다도 남다른 감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9)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봉창 집터인 ‘금정(錦町, 효창동) 118번지’의 위치이다. 왼쪽 위에 보이는 199번지 구역은 옛 만리창 지역이고, 오른쪽 옆에 보이는 126번지 구역은 지금의 금양초등학교 자리이다.

 

이날의 장례를 조사하고자 맑게 개인 아침부터 수만 시민이 시내 태고사(太古寺)에 운집하였고 국민장의행렬은 상오 10시 3열사 봉장위원회의 지도를 받아 엄숙한 주악리에 효창원으로 향하였다.
…… 이리하여 행렬은 수만 시민의 봉배와 눈물어린 감회 속에 안국정 사거리를 종로로 남대문 앞을 지나 경성역을 거쳐 연병정으로 행하였다. 더욱이 동지의 유골을 받들은 김구(金九) 총리의 얼굴에는 새로운 감회가 깊이 우러나오는 듯 용산서 앞을 지나금정(錦町)에 이르니 이곳이 곧 고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출생지다. 연고 깊은 이곳 장지인 효창원에 도착한 것은 하오 0시 40분이었다.

 

『동아일보』 1932년 9월 11일자에 이봉창 의사가 살던 집이라고 소개된 ‘금정 128번지’ 및 ‘금정 118번지’의 모습이다. 전체 가옥의 구조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나마 이렇게라도 이봉창 의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사진자료인 셈이다.

 

옛 집터가 있던 구역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새로 들어선 ‘효창파크 KCC스위첸 아파트’ 안에 설치된 ‘이봉창 집터’의 표석(2018년 7월 제작) 모습이다.

 

효창공원 백범 김구기념관 초입에 설치되어 있는 이봉창 의사 동상(1995년 11월 6일 제막)의 모습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옛 집터 자리는 그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효창 제4구역 재개발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지금은 ‘효창파크 KCC스위첸’(2018년 9월 입주 개시) 102동 후면의 지하주차장 입구 옆쪽에 서울시에서 새로 설치한 표석 하나가 간신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듣자 하니 이 자리와 가까운 지점에 ‘이봉창 기념관’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나, 무심하게도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이봉창 의사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훑어보다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던 것이 기억나서 여기에 마지막으로 그 내용을 덧붙여 보려고 한다. 거사 이후 취조과정에서 작성된 ‘제5회 신문조서(1932년 2월 9일 작성)’를 보면, 이봉창 의사가 용산역을 그만 둔 뒤 “용산 금정에 있는 관제묘(關帝廟)의 보존을 위해 봉사하거나 청년회를 조직하여 하수 청소와 야경에 종사하는 등 약간의 공공사업에 봉사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확인해 본즉 실제로 <매일신보> 1924년 4월 24일자에 수록된 「관성묘(關聖廟) 철폐에 대하여 부근 주민 분개」 제하의 기사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부내 관수동(觀水洞)에 있는 불교화광교원(佛敎和光敎園)에서는 대정 11년(1922년) 8월에 용산 금정에 있는 관성제묘(關聖帝廟)의 대지 70여 평의 불하를 얻어가지고 그곳에 학교를 짓고자 요사이에 와서 묘당을 헐려고 한즉 그 부근 일대의 주민이 백여 명은 떼를 지어 일어나서 묘당을 헐지 못하게 하고 지난 23일에는 용산경찰서 고등계에 모두 모여서 진정을 하였다더라.
그러니까 이봉창 의사 역시 본인 스스로의 진술대로 관우 사당의 철폐를 반대하는 행렬에 함께 서 있었던 것이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동네 주민들의 희망과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인지 여기에 거론된 관성묘의 흔적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혹여 이 관성묘가 지금껏 잘 보존이 되었더라면 이봉창 의사의 흔적을 되새길 수 있는 참으로 마침맞은 공간이 되었을 테지만, 그러한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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