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항일 민족지의 출발은 조선・동아가 아니라 조선독립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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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1)

항일 민족지의 출발은 조선・동아가 아니라
조선독립신문이었다

김승은 학예실장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3‧1운동 101주년인 올해 우리나라 거대 두 신문사가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 조선일보는 지난 3월 5일 100주년 특집호 표지에서 “조선일보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의 거울”이었고, 조선일보는 “일제에 저항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고 자평했다. 다음 100년에도 “사실 보도라는 저널리즘 본연의 가치를 지키며 정론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도 실었다. 동아일보는 4월 1일 창간 100주년 사설을 통해 “무엇이 진짜 뉴스인지 궁금할 때면 눈을 들어 동아일보를 보라”고 말할수 있는 기준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과연 두 신문이 이렇게 당당하게 과거 100년에 이어 다음 100년의 존재가치를 말할만한 자격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적폐의 대명사, 살아 있는 언론권력으로 ‘검언유착’ ‘권언유착’을 일삼으며 한국사회에 큰 해악을 끼쳐온 대표적인 신문이니 말이다. 100주년 기념사가 사과와 반성이 아닌 자화자찬 일색인 것은 놀랍지도 않다. 현재도 매 시각 쏟아내는 기사마다 의혹만 부풀리고, 갈등을 부추겨 정치쟁점화하고, 인신공격에 인격살인도 서슴지 않으며, 사실 왜곡을 확대 재생산해 독자들의 비판적 독해력을 마비시키고 있다. 진실은 주장에 갇히고 정의는 공허한 외침으로 그치는 일들이 최근에 더욱 자주 목격된다. 조선‧동아 두 신문은 반민주적 반인권적 언론일 뿐 아니라 반역사적 기득권을 토대로 여전히 반역사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뉴스타파 <조동(朝東)100년 : 두 신문 이야기>

 

동아투위‧조선투위 등 57개 언론‧시민단체는 이미 작년 9월 ‘조선 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을 꾸렸다.
적폐언론 청산을 위해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발간, ‘조선일보100년’ 전시, 아카이브 구축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우리 연구소도 지난 100년 간 두 신문사가 자의적으로
왜곡하거나 은폐한 오욕의 역사를 되짚으며 그들 자신이 써낸 기사를 통해 그들의 실체를 밝히는 두 가지 기획을 준비했다.
첫 번째는 뉴스타파와 공동 기획한 ‘조동(朝東)100년: 두 신문 이야기’이다. 조선일보 창간일인 3월 5일부터 동아일보 창간일인 4월 1일까지 총 13편의 연속보도 가운데 연구소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6편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했다. 우리 연구소와 역사디자인연구소, 뉴스타파는 두 신문의 창간부터 1940년 8월 폐간까지 기사를 시기별로 분석하고, 그 가운데 특히 1937년 이후 일제 침략전쟁과 총동원체제에 두 신문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는지 추적했다.
두 번째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 준비하는 기획전시이다. 두 신문사는 100주년 기념사에 여전히 ‘민족지’라는 타이틀을 자신의 대표적인 수식어로 내걸었다. 100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 그들이 민족사에 기여한 ‘자랑거리’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두 신문사는 1937년 이후 노골적인 일제 협력과 침략전쟁 미화에 지면을 할애한 전쟁부역언론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땅히 해방 후 철저히 청산되었어야 할 언론사였고, 사주들이었다. 그런데도 두 신문사는 부역의 역사를 은폐하고 온전히 ‘민족지’로 다시 포장해 과거를 날조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번 기획전시는 그들이 덧발라온 분칠을 벗겨내고 자신들이 내뱉은 기사를 통해 민족을 배반한 거짓의 민낯을 드러내고자 한다.
기획전시는 경술국치 110년을 맞는 8월, 그것도 일제의 폐간 농간에 순응해 마지막 신문을 발행한 8월 11일에 개막할 예정이다. 개막을 앞두고 앞으로 3회에 걸쳐 <민족사랑> 지면을 통해 기획전의 일부 내용을 미리 소개한다.

 

누가 ‘민족지’인가

이번 호에 소개할 첫 번째 주제는 “과연 두 신문은 민족지인가”이다. 창간 65주년을 맞았던 1985년, 두 신문은 꽤 떠들썩하게 상대방 신문을 “친일신문”으로 공격한 적이 있다. 이른바 ‘민족지 논쟁’으로 불린 이 사태를 기억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모르는 분들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00주년을 맞아 구축한(!) 디지털아카이브에서 관련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85년 4월 1일자 동아일보가 “조선일보는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이라고 첫 포문을 열자, 조선일보는 4월 14일자 사설에서 “반일, 친일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동아일보는 4월 17일자 사보 「애독자 제현에게 알려 드립니다-동아‧조선 창간과 ‘민족지’ 시비에 대하여」에서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일보도 공세에 나서 4월 19일자 사보 「우리의 입장-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에서 “식민통치의 가장 중추적 동맹군인 토착귀족 지주세력과 기성 친일언론인으로 혼성된 측에 허가된 신문이 동아일보”라며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동아일보 초대 사장”이었다고 반격했다. 또한 “민족사의 내측에 숨겨있던 친일 계보는 속속들이 파헤쳐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갔다. 참으로 놀라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가 무려 35년 전에 ‘친일청산’을 주장했었다니 말이다. 물론 ‘민족지논쟁’ 이후에도 이들은 여전히 독재를 찬양하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부역언론의 길을 걸었다. 특히 친일청산을 국론분열・친북용공으로 몰아세우는데에는 ‘일심동체’였다.

 

 

항일 민족 언론의 부활, 조선독립신문

그렇다면 이들이 자인한대로 두 신문사는 과연 얼마만큼 ‘친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을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제는 군대와 각종 식민지 악법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인들의 손발을 묶어 놓았을 뿐 아니라, 모든 언로를 차단해 조선인들의 눈과 귀와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일제 무단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문명과 번영을 기약한 “한일병합”은 무력 탄압과 차별로 점철된 “강점”이자 “병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제 강점 후 9년 만인 1919년, ‘조선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외치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터져 나온 만세운동의 열기는 일제의 탄압에도 반년 넘게 지속됐다. 혁명적 에너지는 이름 모를 청년 학생들이 한 장 한 장 만들어 배포한 지하신문들이 끌어 올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일제 강점과 동시에 모든 민족 언론이 폐간됐지만 3․1운동을 계기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언론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빨리 만들어진 지하신문은 바로 독립선언서와 함께 3월 1일부터 배포된 <조선독립신문>이다. 신문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호외 형태의 단면 인쇄지였지만, 항일 민족언론의 부활을 상징하는 신호탄이었다. <조선독립신문> 외에도 <국민회보> <신조선신문> <자유민보> <국민신보> <국민신문> <진민보> 등 약 30여 종의 지하신문이 1919년 내내 전국에서 발행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제 당국에 의해 ‘적발’돼 우리는 그 실체를 알 뿐이다.

 

「조선독립신문」 제1호, 1919.3.1(연세대학교이승만연구원 소장) 최초로 발간된 지하신문. 초기 천도교 계열의 신문 발행 관계자들이 모두 체포되자 9호부터는 이름 모를 후계자들이 발행을 이어갔다. 현재까지 43호와 호외, 국치기념호가 제작됐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고 이 신문이 정확하게 몇 호까지 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출판물 차압의 건 보고 통보」 1919.4.23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제가 출판법 위반으로 발매·배포를 금지해 압수 처분한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의 목록들이다. 이 압수목록은 3•1운동 당시 얼마나 다양한 지하신문이 발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발행된 항일 지하신문들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3‧1운동을 축소‧왜곡 보도하자 이에 맞서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고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역할을 했다. 지하신문 <진민보>에 실린 신문의 역할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바라는 민족 언론의 사명 그 자체였다.
“우리의 민족적 운동을 한껏 옹호하라, 우리의 운동이 안팎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신속하게 보
도하라,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나아가더라도 소리만은 벽력같이 크게 질러라.” 항일지하신문은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3‧1운동을 폄훼하고 비난하는 친일파에 대해서도 질책했다.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국적 이완용·송병준을 비롯해 일제 주구가 된 친일경찰과 헌병보조원들, 허위‧왜곡보도를 일삼았던 매일신보 기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친일파들을 비판했다. 또한 조선 독립을 부정하고 식민통치를 인정하며 자치를 주장하던 친일파에 대한 비판도 신랄했다. 대표적인 자치론자인 민원식에 대해 <조선독립신문>은 “부여족의 면피(面皮)로서 일본의 혼을 가졌다. 인류의 골격으로서 짐승의 심장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굴뚝을 만들어야

이렇게 3‧1운동의 의의를 전파하고 혁명운동의 기운을 고조시키는 조선인들의 자발적 언론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 당국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을 미리 막지 못한 이유를 조선인의 민심을 파악할 조선인 언론의 부재에서 찾았다. 지하신문을 압수하고 탄압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제는 신문발행을 허가해 조선인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이를 통해 민심을 살피거나 여론 조작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 함께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는 당시 조선의 긴장된 공기를 완화하기 위한 분출구, 즉 ‘굴뚝’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조선어신문의 허용이라고 회고했다. 결국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의 열기는 지하신문을 통해 조선 민중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민족 언론의 부활을 이끌었으나 총독부가 정작 신문 발행을 허가한 대상은 친일파들이었다. 조선인 신문 발행 곧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문화정치’의 상징과 같은 조치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총독부가 발행 허가한 신문―조선일보 시사신문 동아일보

발행 허가를 받은 신문은 민원식이 주도한 국민협회의 시사신문, 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가 주도한 조선일보, 그리고 조선일보가 지적한대로 토착귀족 지주세력과 기성 친일언론인의 합작인 동아일보 세 신문뿐이었다. 앞서 지하신문들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민원식이 ‘동화주의’를 내걸고 참정권‧자치운동을 벌인 국민협회의 시사신문은, 민원식이 항일투사 양근환에게 암살된 후 자연스럽게 폐간됐다. 이후 조선‧동아 두 신문이 조선의 언론계를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조선일보는 발행 허가를 받을 때 비정치적인 ‘실업계 신문’을 표방했다. 이를 주도한 면면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시사신문과 함께 우군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한 인적구성을 가졌다.
조선일보 창간을 주도한 세력이 대정친목회였다는 사실은 조선일보 사사에도 간간히 밝혔지만, 발기인 39명 중 32명이 대정친목회 회원이자 임원이라는 것으로 봐도 분명하게 실체를 알 수있다.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전직 관료와 조선귀족, 대지주, 실업가 등이 망라돼 내선융화운동을 주도한 조선 최대의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다.
이들은 3․1운동 직후 ‘자력으로 독립은 불가능하다’ ‘조선인은 실력을 길러야한다’며 일본 제국의 통치에 잘 따라서 산업 발달과 문화 향상을 이룰 것을 주장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주도한 조선일보는 초기부터 ‘친일신문’으로 민중의 배격을 받았다. 그래서 초기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조선일보는 극단적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창간 초기 30건의 압수, 23회의 발매 반포금지, 2회의 정간을 받을 정도로 조선일보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는데, 이는 당대 최대의 친일단체가 가장 탄압받는 ‘저항신문’을 발행한 꼴이다. 이에 대해 장신 박사는 <개벽> 제37호의 기사를 인용하며 그들이 ‘항일’ 기사를 게재한 이유는 경영난 타개를 위한 ‘판매 확장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동경유학생 등의 동아일보 「성토문」

 

그러면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한 동아일보는 순항했을까. 최근 연구소는 1924년 일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의 원문을 입수했고 이번 전시회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 성토문은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에서 발단이 됐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는 일제에 타협적인 정치운동을 주장한 이광수의 사설을 실었다. 즉각 동아일보에 대한 비난과 배척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멀리 도쿄의 조선유학생학우회 등 11개 단체도 ‘성토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성토문에는 동아일보를 향한 민중의 배신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를 둘러싼 논란은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인 사회까지 전파됐다. 민족지로서 자임하며 출발한 동아일보는 창간 4년 만에 김성수 일가에 장악당해 사익을 추구하는 언론사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래된 신문이 아니라, ‘정론의 길’을 걷는 제대로 된 신문이다. 이들의 출발이 ‘친일’에 오랜 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전시에서 분명하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박찬승, 「3•1운동기 지하신문의 발간 경위와 기사내용」, <동아시아 문화연구> 44권, 2008
박용규, 「3•1운동기 항일지하신문의 친일파 비판」, <언론정보연구> 56권 4호, 2019
장신, 「1920년대 대정친목회의 조선일보 창간과 운영」, <역사비평>, 2010.8.
장신, 「1924년 동아일보의 개혁운동과 언론계의 재편」, <역사비평>, 2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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