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해방이 아닌 침략구호, ‘대동아공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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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1년 일본에서 제작한 <대동아공영권지도大東亞共榮圈地圖>이다. 일본의 산업조합중앙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가정의 빛(家の光)>이 창간한 지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부록으로 발행한 지도다.

지도는 일본과 일본의 점령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국경선과 항공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의 적이 본토를 폭격하는 가상도를 최상단에 배치하고 아래로 일제가 꿈꾸었던 대동아의 인구, 면적, 일본인 진출 수 등 각종 통계표를 작성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한론자들이 주장한 직접적이고 전격적인 군사점령 대신 ‘함포외교(Gunship Diplomacy)’라는 우회 침략의 방식을 취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1875)과 강화도조약(1876)을 통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등 조선 민중의 강력한 저항을 유혈 진압하면서 마침내 한반도를 강점하기에 이르렀다(1910).

일본의 야욕은 이에 멈추지 않고 한반도를 전초기지로 삼아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본격화했다. 쇼와(昭和)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군부는 ‘황군(皇軍)’을 자처하며 군국주의로 나아갔고, 한반도 지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만주와 몽고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만주침략을 강행한 것이다. 여기에 대공황에 따른 정치·경제적 위기를 타개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결합하면서 군부의 모험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개전 두 달 만인 11월에 벌써 동북 3성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다음해인 1932년 3월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점령지역 철수를 권고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면서 노골적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1937년 7월 일본은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군사충돌을 유발한 뒤, 중국본토를 침략했다. 순식간에 베이징, 톈진을 함락한 일본군은 이어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수십만의 인명을 살육하며 가는 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三光)작전’을 펼쳤다(난징대학살).

그러나 중일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일본은 전쟁물자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과 영국이 장제스 국민정부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경제 제재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일본은 새로운 자원공급처가 절실하게 되었다. 결국 유럽 각국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지역을 빼앗기 위해 인도차이나(프랑스령) 침공했다. 이에 앞서 일본내각에서는 국책요강으로 ‘대동아신질서 건설’을 결정하고 이를 전쟁확대의 명분이자 전쟁동원체제 강화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가 단결해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일본은 그들의 전쟁을 ‘아시아를 해방’시키고 ‘팔굉일우(세계를 ‘천황’ 아래에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 정신을 바탕으로 각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할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면서 총동원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침략전쟁의 지속을 위한 인력충원과 물자 보충도 절실해져 갔다. 각종 전쟁물자를 양산하고 군사시설 등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군대의 경우 무엇보다 병력이 부족했으며 전투를 수행하는 현역 군인을 대신해 각종 군사 업무를 볼 민간인(군속)도 필요했다. 이러한 인력 수급문제는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젊은 여성의 징발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시체제 아래 조선 민중들은 오로지 일제의 대외 침략전쟁을 위해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했고 쥐꼬리만큼 떼어주는 배급품을 가지고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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