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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기업 자발적 출연해 일제 강제징용 배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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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일본에 제안
일 “국제법 위반” 7개월째 공세
“신중 검토” 기존 입장만으론
효과적 대처 곤란 판단
G20 앞 압력 낮추는 효과 기대

피해자와도 조율 없이 제안
“위자료 받고 화해할지도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

외교부 차관 비공개 방일해 제안
일 “해결책 못돼” 즉각 거부
한-일 정상회담 더 불투명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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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운데)가 2018년 11월29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앞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원고 승소 확정 판결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국과 일본 기업의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방안을 정부가 일본에 제안했다.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일본이 반발하며 안팎으로 여론전을 이어가자, 한국이 나름의 대안을 내놓고 일본에 공을 넘긴 셈이다. 일본 정부는 거부의 뜻을 밝혔다.

외교부는 19일 “소송 당사자인 일본 기업을 포함한 한·일 양국 기업이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위자료 해당액을 지급함으로써 당사자들 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며 “우리 정부는 일본 쪽이 이러한 방안을 수용할 경우 일본 정부가 요청한 바 있는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1항 협의(양국간 외교적 협의)의 수용을 검토할 용의가 있으며, 이러한 입장을 최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조세영 외교부 제1차관이 지난 주말 일본을 비공개로 방문해 이 방안을 전달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사법 판결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지만 가능한 노력과 지원을 기울이겠다는 것”이라며 “피해자들이 고령이어서 구제 절차가 조속히 진행될 필요가 있고, 화해를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측면에서 제안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제안은 법원에서 소송을 통해 확정 판결을 받은 강제징용 피해자 가운데 이 방안에 동의하는 이들이 대상이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이날 오후 “한국 정부의 제안은 일본과 한국 관계의 법적 기반이 되어 있는 약속을 위반하고 있는 상황을 시정하지 못한다. 국제법 위반 상황이 계속되고 있어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 보상 문제는 모두 해결됐다’는 입장이어서 수용 가능성은 애초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 분쟁해결 절차 3조1항에 따른 외교적 협의를 요구했으나 한국이 응하지 않자, 지난달 20일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은 이날 오전 김경한 주일 한국대사관 정무공사를 외무성에 불러 한국이 협정에 규정된 30일 기한인 18일까지 한국 쪽 중재위원을 임명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 주장하며, 분쟁해결 절차 3조3항에 따라 제3국 중재위원 선임을 통한 중재위 설치를 요구했다. 한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염두에 둔 행보로 보인다.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대리인단과 지원단은 “피해자들이 고령인 점을 고려할 때 정부 발표를 계기로 양국 정부가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협의에 나서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강제징용 소송 대리인단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는 이날 오후 긴급회의를 열어 “한국 정부의 입장 전달은 양국간 협의를 개시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협의 개시와 결론 도출까지 짧지 않은 기간이 걸릴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한·일 기업이 먼저 확정된 판결금 상당의 금원을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이후, 양국 정부가 다른 피해자들 문제를 포함한 포괄적 협상으로 논의를 확대해나갈 예정이라면 한국 정부 입장도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정부가 일본의 “역사적 사실 인정”과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하지 않고, 피해자들과 충분하게 소통하지 않은 채 입장을 발표한 점은 비판했다. 미쓰비시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을 대리하는 김정희 변호사는 “최근 추가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도 일본의 사죄를 우선했다. 배상액 자체가 소송의 목적이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 정부가 대법원 판결 이후 7개월여 동안의 “신중 검토” 입장에서 벗어나 ‘대안’을 제시한 데에는 복잡한 외교적 고려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우선 미국이 부쩍 한·미·일 협력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이달 말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압력을 사전에 낮추는 효과를 기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일본이 여론전으로 한국을 압박해온 상황에서 “신중한 검토”라는 기존 입장만으로는 효과적 대처가 어렵다고 판단해 ‘맞대응’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정부는 사법부 판단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방안을 내놓았다”며 “일본에 공을 넘김으로써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명분을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이 방안을 거부하면서 이달 말 일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외교부 당국자는 “대통령이 G20에서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지만, 강제동원 문제와 정상회담은 별개의 사안”이라고 말했다.

박민희 장예지 기자, 도쿄/조기원 특파원 minggu@hani.co.kr

<2019-06-19> 한겨레 

☞기사원문: “한·일기업 자발적 출연해 일제 강제징용 배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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