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조봉암의 필화와 진보당 강제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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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소장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7년 10월 12일부터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 사건을 다룬다. 이중 일부를 『민족사랑』에 전재한다. – 편집부

죽산 조봉암(앞쪽 첫줄)이 1958년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 이승만 정권에서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조봉암은 1958년 1월 13일 북한과 내통했다는 간첩 혐의로 체포·기소돼 이듬해 2월 27일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정치사는 수구세력의 부패와 무능이 당장 붕괴할 것 같지만 야권은 지리멸렬과 편협성, 분파성 때문에 국민이 쟁취해준 집권 기회조차 도로화(徒勞化)시킬 것 같은 막장 드라마의 연속이다.
  분당해도 집권을 위해서는 태연히 뭉치는 철면피 오뚝이 수구세력과는 달리 야권은 같은 당안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꿍꿍이 속셈이 제각각인 콩가루 집안이다. “악마는 나이 지긋하다”(괴테)는 지적처럼 악랄과 교활로 단련된 둔갑술로 종횡무진하는 괴력 앞에 알몸으로 맞선 야권. 순진한 정의가 교활한 불의에 패배할까 불안한 세월이다.

민주세력 분열의 비극 조봉암
  이런 정치행태, 수구세력의 몰염치와 민주세력의 지리멸렬이란 정당구조가 굳어진 갈림길에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 1899~1959)의 필화와 진보당의 강제 해산이 자리하고 있다.
  8·15 해방 직후, 공산당과 결별한 조봉암은 불가피한 상황이면 단정 총선에도 참여하여 통일을 추구해야 된다는 현실적인 행보를 취했다. 그는 극우극좌 노선인 친미·친소나 반소·반미가 아닌 비미비소(非美非蘇) 민족노선을 주창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남한의 정치역학은 유럽의 보혁이념성 양당구조가 아닌 미국식 보수 양당제로 얼어붙어버렸다. 야당의 아킬레스건인 레드 콤플렉스에 기죽어 북진통일 노선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의 비극이 조봉암의 필화였다.
  늙은 여우 이승만의 종신집권에 맞서기 위해 지리멸렬 야권은 뭉쳐야 했다. 김성수(1891~1955)는 범야권 창당에 죽산을 끌어들이고자 무리한 요구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죽산은 “나는 8·15 이후 즉시 공산당과 절연하고 오늘날까지 민주주의 국가로 장래가 약속된 대한민국에 비록 미미하나마 모든 심력”을 바쳐왔다는 굴욕적인 성명서까지 냈다. 신익희(1894~1956)도 제3의 정당 태동을 막고자 이에 동조했다.
  장면 그룹과 흥사단, 김준연과 정일형 등은 완강하게 조봉암 참여를 거부했고, 조병옥도 내심은 비슷했다. 김성수는 병석에서도 그들을 설득했지만 1955년 2월 18일 타계함으로써 조봉암을 배제한 채 민주당은 9월 19일 창당됐다.
  그러나 이듬해에 막상 대통령 선거(5월 15일)가 닥치자 야권이 서로 비방하는 이전투구 속에서 장건상·정화암·김창숙 등이 연합노선 재추진을 강력히 촉구(4월 21일)했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신익희와 장면, 진보당 정·부통령 후보 조봉암과 박기출의 4자회담에 장면은 불참했지만, 극우편향 인사 입각 배제 선에서 투표일 직전 진보당 후보가 사퇴키로 합의, 불참한 장면을 설득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 헤게모니의 보수 양당체제론자인 조병옥은 조봉암이 우세하면 차라리 이승만을 지지하겠다고 공언했고, 장면 역시 요지부동이었다.
  그럼에도 죽산과 해공은 지방유세 중 5월 6일 회동키로 약속했으나, 그 하루 전 신익희는 이리에서 의문사했다. 이제 독재를 종식시키려면 조봉암 대통령 후보에 부통령은 장면으로 단일화하는 게 삼척동자도 다 아는 순리였다. 그러나 “타당 후보는 지지하지 않는다”고 민주당은 6일 공식 성명을 냈고, 결코 조봉암은 지지 않는다고 선을 긋고 신익희 추모표를 호소했다. 김준연은 “조봉암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이승만에게 투표하라”고 어깃장을 놓았다.(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한길사)
  자유당과 민주당은 장면 부통령표를 공정 관리한다는 담보로 조봉암표를 샌드위치표로 조작하는 걸 묵인했다. 조병옥조차도 “3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내 판단에는 만일 자유 분위기의 선거가 행해졌더라면 이승만 대통령이 받은 표는 200만표 내외에 지나지 못하리라고 나는 판단합니다”(1956년 6월 5일. 제22차 국회 본회의)라고 할 지경이었다.
  “만일 그때 범야신당이라는 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죽산을 따돌리지 않았거나 후보 단일화 협의를 위해 만나기로 한 신익희가 급서하지 않았다면, (조봉암이 처형당하는)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가정”(한승헌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 창비)은 오늘의 야권에 타산지석이 될 터이다.

‘평화통일’ 주장이 ‘죽음’으로
  이런 냉대를 받자 죽산은 진보당 창당을 서둘렀다. 1956년 11월 10일 서울시립극장에서 개최된 창당대회는 전국 대의원 900명 중 853명이 참석하는 응집력을 과시했다. 개회사에 이은 “자유 평등과 우애로 맺힌/ 훈훈한 복지사회를 이룩하는/ 세계의 깃발을 높이 들고/ 바라고 그리던 낙원의 광장을 향하여/ 보무도 우렁차게/ 이제 권고하나니/ 피땀 일궈 가신/ 인민의 대열이여/ 거룩한 목자의 영령이여/ 마음 편히 쉬시라./ 고이고이 잠드시라”(시인 박지수 ‘피땀 흘리고 가신’)라는 묵념시, 뒤이어 ‘당가’도 우렁찼다. “자유는 우리의 생명/ 평화는 우리의 이상/ 이 땅에 구현하여서/ 역사를 창조하리./ 조국의 새날에 이름하여/ 혁신의 새 깃발 높이 들어/ 오!/ 희망과 사랑의 거름되리”(박지수 작사).

1957년 진보당 기관지로 창간한 월간 <중앙정치> 창간호(10월호·아래 사진)에 실린 조봉암의 글 ‘평화통일에의 길’(위쪽). <중앙정치>는 창간호와 11월호를 내고 단명했다. 한승헌 전 감사원장 제공

  죽산이 제기한 첫 통일정책은 ‘우리의 당면과업-대 공산당 투쟁의 승리를 위하여’(1954년)였다. 대공정책의 근본은 민주주의의 실현이며 통일이 중요한 이유는 동족상잔을 피하고 평화를 정착시켜 주권 강화로 강대국 간섭을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냉전체제는 독재의 밑거름 역할을 한다고 본 그는 국민복지보다 국방을 우선하는 정치풍토를 비판하며 북진통일이 아닌 정치적인 통일을 더 중시했다.

  이어 ‘내가 본 내외정국’(1955년)에서는 “필요가 있고 유익하기만 하면 공산블록과 회의도 하고 협상도 해야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오직 피 흘리지 않는 통일만을 원한다”(진보당 정책 제1항)고 한 진보당은 유혈극의 재발을 꾀하는 극좌극우의 불순세력을 억제하려면 진보세력이집권해야 민주방식에 의한 평화적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죽산의 통일론이 집약된 ‘평화통일에의 길’(<중앙정치> 1957년 10월)은 즉각 발매금지 조치를 당했다. 그는 유엔 감시하 남북총선을 제기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대한민국이 이북괴뢰와 동등한 위치에 서서 동일한 시간에 선거가 실시된다는 것은 좀 불유쾌하기는 하지만, 기왕에 더 유엔 감시하에서 몇 번씩이나 선거를 해왔으니 또 한 번 한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나쁠 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 대한민국이 이북괴뢰와 동등한 위치에 서서”란 구절이 국가보안법 저촉이라고 문제 삼았다.
  통일 방해 세력으로 죽산은 “지주, 자본가로서 미군정에 중용되었던 한국민주당 중심의 고루한 보수적 정치세력과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있어 한국정치의 추기(樞機)를 장악하고 민주주의 이름 밑에 반(半)전제적 정치를 수행하여온 특권 관료적 매판자본적 정치세력의 과오에 기인하였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라고 규정했다.(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상권, 역사비평사)
  원자탄 개발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전쟁 억지력으로 작용하기에 제3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 죽산과는 달리 조병옥은 “1960년은 3차 대전 발발 시점으로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민주당 전당대회(1956년 9월 28일) 식사에서 주장했다.
  각종 어용 군중집회를 강행하면서 파시즘 체제의 초강경론으로 정치위기를 돌파하고 반공진영의 세계적인 인물로 부각된 이승만으로서는 죽산과 진보당을 묵과할 수 없었다. 1958년 1월부터 진보당 간부를 검거, 2월 25일 정당등록을 취소했다. 야당과 언론과 사법부가 이승만 정권에 야합해 그를 처형대(1959년 7월 31일)로 보냈다.

• <경향신문> 20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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