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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日에 가족 빼앗긴 아픔, 역사로 새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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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신사 무단 합사된
강제동원 유족 증언집 첫 출간
이희자 보추협 공동대표
4년 전부터 제작에 나서
고통스런 수십년 삶 인터뷰
23명의 증언 생생히 담아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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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가 13일 서울 동대문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야스쿠니신사 합사 관련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무단 합사(둘 이상의 혼령을 함께 모시는 것을 의미)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 증언집이 최초로 출간됐다.

1959년 신사 측이 한국 정부나 유족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강제로 합사한 지 58년 만이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유가족 23인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긴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민족문제연구소) 발행을 주도한 이희자(74)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 공동대표는 13일 서울 동대문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본보와 만나 “가족을 빼앗긴 뒤 찾아온 개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이제는 우리 모두의 역사로 승화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본격 출간에 나선 건 2013년이지만, 증언집 제작을 결심한 건 그보다 십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무단 합사 취소 소송(2001년)을 하기 위해서는 간단하게나마 유가족 증언을 받아야 했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먹먹해 ‘이들의 삶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게 이 대표 말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은 채 억지로 하루하루 견뎌가고 있다고 했고, 친척 손에 길러지며 사촌은 학교에 가고 본인은 일을 도와야 해 서러웠다고도 했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이 대표 가슴에 그대로 박혔다.

마음은 당장에라도 만들고 싶었지만 현실이 녹록하지 않았다. 강제징용 이후의 아버지 흔적을 찾는 게 급선무였고,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도 장기화됐다.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중에, 나중에 차일피일 미루다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 대표와 교류했던 수백 명 유가족이 어느덧 100명 남짓으로 줄어 있었다. 이미 세상을 뜬 사람이 많았고, 정신이, 몸이 온전치 못해 증언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조바심이 든 이 대표는 민족문제연구소 도움을 받아 유족 인터뷰에 돌입했다. “빼앗긴 가족에 대한 그리움, 시대에 대한 억울함, 사과조차 않는 일본에 대한 분노… 유가족이 이 모든 감정을 털어내지 못하고, 세상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고 이 대표는 말했다.

참여 의사를 밝힌 유족으로 30명 정도를 추렸다. 수십 년 고통을 글로 새기는 동안, 또 몇 명이 세상을 떠났다. 소송을 진행 중인 야스쿠니신사 합사 피해자 유가족 10명을 포함해 결국 책에 실린 인원은 23명. 2000년대 초반만 해도 ‘2권 이상은 거뜬할 것’이라고 예상됐던 책은 한 권으로 마무리됐다. 이 대표는 “어렵게 책에 실린 (유가족) 각자의 삶 하나하나를 역사로 봐달라”고 했다.

표지는 증언집에 참여한 23인의 얼굴로 채웠다. “유족 중 절반은 희생된 가족 사진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사진이 없으면 빈칸으로 두면 되지 않느냐’는 얘기도 나왔지만, 이 대표는 “가족을 잃은 것도, 사진이 없는 것도 서러운데, 사진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공백을 둬서 다시 한 번 허전함을 느끼게 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정작 이 대표 본인 얘긴 넣지 않았다. 보추협 공동대표 등 여러 단체 요직을 맡은 자신은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지만 다른 유족은 그렇지가 않다”며 자신의 기록은 뒤로 미뤘다. 20일 발행을 앞둔 책을 두고 그는 “물음을 던지는 책”이라고 표현했다. 완전한 해방은 일제강점기가 남긴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가능한 것 아닌가? “이제는 유족들이 그 대답을 받아야 할 때”라고.


글·사진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야스쿠니신사는…

야스쿠니신사는 국가 및 천황을 위해 전쟁에 참여해 죽은 것을 기준으로, 246만 명 정도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국적을 회복했지만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는 ‘전사했을 때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당연히 일본인’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1959년 한국 정부나 한국인 유족에게 알리지 않고,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마음대로 합사했다. 한국인 2만1,000여명, 대만인 2만8,000여명이 합사된 상태다. 유족들은 합사취소 소송을 2001년부터 진행 중이나, 일본 정부는 ‘정부 권한이 아니다’는 이유로, 야스쿠니신사는 ‘혼령들이 한 덩어리로 신이 돼 따로 뺄 수 없다’는 교리를 내세우며 유족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강제징용피해자 증언집 관련 유족프로필>
 

▦강종호(76)
-1941년 제주 출생, 1941년 강제동원돼 어업통제회사 선원으로 근무하다 희생된 강태휴씨 아들
-“아버지를 한번도 보지 못한 나는 아버지가 태어난 6월 5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는 모르나 아마 바다에서 죽어 물고기 밥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지금까지 나는 제사상에 생선을 올려놓지 못하고 있다.”
 

▦권수청(79)
-1938년 경북 상주 출생, 1944년 오키나와에 징용되었다가 희생된 권운선씨 아들
-“그저 먹고 사는 일에만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정신 없이 살면서도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올 것만 같아서 사망신고도 하지 않은 채 지냈다.”
 

▦김기호(76)
-1941년 충북 옥천 출생, 1942년 포로감시원으로 태국에 배속되었다가 희생된 김만업씨 아들
-“어릴 때 추석이 되면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절을 올렸지만 내게는 그럴 묘가 없다는 게 굉장히 외롭게 느껴졌다. 경제적으로 힘들어 묘를 만들지 못한 게 오랫동안 한으로 남았다.”


▦김동관(75)
-1942년 충남 부여 출생, 1942년 홋카이도에 징용돼 희생된 김대성씨 아들
-“아버지는 일본으로 끌려가고 내가 나서 채 1년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본으로 끌려간 뒤 고향으로 편지 한 통 오지 않았는데, 첫 번째 날아온 소식이 사망통지였던 것이다.”
 

▦김문식(68)
-1949년 경북 문경 출생, 1942년 나가사키 탄광으로 징용되었던 김정옥씨 아들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다가 해방 직후 용케 살아 돌아왔지만, 험한 일을 했던 탓에 진폐증을 앓게 됐다. 내가 자랄 때 가끔 일제 때 징용됐던 경험을 말씀하시곤 했지만 지나가는 것처럼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고 한두 마디 흘리셨을 뿐이다.”
 

▦남양강(74)
-1943년 일본 고베 출생, 1943년 사할린으로 징용되었다가 행방불명 된 김외준씨 며느리
-“평소에 남편은 아버지와 같이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을 밀어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남편과 함께 활동에 참여했지만 지금은 나 혼자서라도 이 활동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유족회에도 나가고 강제동원 진상규명 활동에도 동참했다.”
 

▦남영주(79)
-1939년 경남 의령 출생, 1942년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뉴기니에서 전사한 남대현씨 여동생
-“다섯 살이던 나는 오빠가 왜 끌려가게 됐는지 그 경위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오빠가 끌려갔던 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총을 든 순사 같은 이들도 많아 언니들과 나는 무서워서 어디 얼씬거리지도 못하고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노재원(81)
-1936년 충남 연기군 출생, 1944년 군속으로 징용돼 중국 후베이성에서 근무하다 귀국길에 사망한 노복만씨 아들
-“해방이 되어 곧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했으나 해가 바뀌어도 소식은 없었다. 1946년 봄, 아버지와 함께 징용 갔던 두 분의 동료가 돌아왔다. 그 분들은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던 도중 배에서 배탈이 나 응급조치를 했으나 약이 없어 고치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고 했다.”
 

▦동정남(73)
-1944년 일본 나고야 출생, 1943년 군속으로 일본 현지에서 동원되어 북태평양에서 전사한 동선홍씨 아들
-“아버지가 끌려갔을 때 나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집에 없었지만 내 이름은 아버지가 편지를 통해 지어주신 것이다.”
 

▦박남순(74)
-1943년 전북 남원 출생, 1942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브라운섬에서 희생된 박만수씨 딸
-“나는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아버지를 직접 본 적이 없을뿐더러 사진과 같은 유품 하나 없어 아버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할머니와 둘째 작은 아버지가 가끔씩 들려준 이야기와 기록상으로 남아있는 것밖에 없다.”
 

▦박진부(77)
-1940년 일본 홋카이도 출생, 1944년 일본 현지에서 징용되어 후쿠시마 탄광에서 사고로 희생된 박선봉씨 아들
-“그날도 누군가 찾아와서 아버지가 다락방으로 숨었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내가 그만 아버지가 숨은 다락방을 가르쳐 주어 그 길로 아버지는 끌려가고 말았다.”

▦신명옥(71)
-1946년 황해도 연백 출생, 1944년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중국 안징성에서 전사한 박헌태씨 며느리
-“해방이 되어도 시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할아버지는 그때 받은 아들 소지품인 수첩과 만년필을 잘 간직하고 계셨지만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다고 한다.”
 

▦윤옥중(77)
-1940년 충남 논산 출생, 1944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페릴리우 섬에서 사망한 윤삼병씨 딸
-“옷은 제대로 챙겨 입고 가셨는지, 누구에게 어떻게 끌려가셨는지 나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무렵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던 장화신은 사람들, 납작 모자를 눌러쓴 사람의 모습만 떠오른다.”

▦이금수(74)
-1943년 충남 논산 출생, 1942년 징용되어 행방불명 된 이도우씨 딸
-“어머니에게 ‘다른 애들은 다 아버지가 있는데 왜 나만 아버지가 없어? 당장 아버지 사와! 아버지 사오라고!’ 하며 억지를 부렸다. 내 속이 아픈 만큼 어머니 가슴을 세게 치며 떼 쓰고 울었다. 어머니는 ‘응 그래. 아버지 사올게, 얼른 사올게’하며 하염없이 머리만 쓰다듬었다.”
 

▦이명구(79)
-1938년 경기 여주 출생, 1944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팔라우 섬에서 사망한 이낙호씨 아들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 동네에서 우리 가족만은 해방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전사통지서가 왔다.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1946년 10월 3일(음력)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춘자(75)
-1942년 경기 시흥 출생, 1944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중국에서 행방불명 된 이병헌씨 딸
-“중국 전선에서 자주 오던 엽서가 어느 날 갑자기 끊기더니 그 뒤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채 이별했기 때문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정윤현(64)
-1953년 전북 김제 출생, 1944년 후쿠오카현 소재 탄광으로 징용되어 행방불명된 박운석씨 며느리
-“시할머니는 어떻게든 끌려가는 아들을 말려보려고 안타까운 발걸음으로 뒤를 따라 나섰다. 뒤쫓아 가는 길에 송충이나 송진을 주우려고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다. 그걸 몸에 문지르면 금방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때문에 피부 부스럼이 걸렸다고 핑계를 댈 요량이었다.”
 

▦정태랑(76)
-1941년 경북 선산 출생, 1941년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행방불명 된 정봉규씨 아들
-“사촌 형과 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는 일을 해야 했다. 큰집에서 양조장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술을 만들고 배달도 하고 여러 가지 잡일을 한 일년 정도 했다.”
 

▦최낙훈(77)
-1940년 서울 출생, 1942년 후쿠오카 가이지마 탄광으로 징용되어 행방불명 된 최천호씨 아들
-“밤에 자주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봤다. 형님은 농사 일이 힘들어 금방 잠들었고 동생은 애기라 아무것도 몰랐다. 어머니가 울고 있으면 내가 말없이 어머니 옆에 앉아 있다가 잠이 들곤 했다.”
 

▦최두용(79)
-1938년 경기 평택 출생, 1944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중국 광시성에서 사망한 최승봉씨 아들
-“어머니는 재혼한 분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고 나는 그 집에서 더 이상 사는 것이 싫어져 가출을 했다. 갈 곳이 없어 평택역 근처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다.”
 

▦최상남(79)
-1938년 전남 무안 출생, 1941년 지원병으로 입대해 미얀마에서 전사한 최판룡씨 아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외가에서 외삼촌이 어머니를 재혼시키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나는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나를 두고 어딘가로 갈까 두려워 어머니를 따라 가려고 늘 책보따리를 싸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인재(79)
-1938년 서울 출생, 1943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트럭섬에서 사망한 최병석씨 딸
-“대문이 열리더니 우체부가 하얀 상자를 들고 왔고 작은 아버지께서 상자를 받더니 이내 내게 고개를 돌리며 ‘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하얀 상자에 아버지가 입었던 베 적삼, 손톱, 머리카락이 들어있었다.”
 

▦한광수(75)
-1942년 경기 양평 출생, 1943년 중국 하이난섬에서 사망한 한기석씨 아들
-“사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릴 여력이 없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삶을 희생한 어머니의 바람대로 바르게 자라서 어떻게든 고생을 덜어드리는 것이 내 임무처럼 생각되어 아버지를 잠시 기억에서 지웠다.

<2017-06-16> 한국일보

☞기사원문: [단독] “日에 가족 빼앗긴 아픔, 역사로 새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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