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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31) 남정현 ‘분지’ 필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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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반핵·반미 ‘정치적 우화’ 수법 묘사…검찰, 계급의식 내세워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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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분지’ 필화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됐던 남정현 작가(왼쪽에서 두번째)가 1967년 5월 1심 재판 후 법정을 나오고 있다. 오른쪽 옆은 특별변호인으로 변론에 참여한 소설가 안수길과 한승헌 변호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작가 남정현(南廷賢, 1933~)이 단편 ‘분지(糞地)’(현대문학, 1965년 3월) 때문에 연행·고문과 수사·구속·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 불구속 기소돼 1심에서 선고유예 판결(1967년 6월28일)을 받은 지도 반세기가 되어 간다. 이 필화를 둘러싼 법정 공방에 대해서는 한승헌 변호사의 여러 기록들(<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권력과 필화> 등)로 사건 전모를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 ‘반핵 평화’ 문제를 제기한 작가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민족문학사적인 해석과 평가는 아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 차제에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 작가는 이 소설 창작 동기를 “반핵과 반미”에서 찾고 있다. “핵무기의 엄호를 받고 있는 미군에 의해 훼손되는 민족적인 자주권, 그리고 인간적인 모독, 거기에서 오는 우리 민족의 울분과 자존심 등을 민족적 양심에서 형상화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역사상에는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인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제국주의 정책에 의한 침략과 착취, 계급 간 갈등, 인종적인 편견과 우월감, 종교의 차이, 영토 분쟁, 폭군의 야망 등등, 그 이외에도 수다한 요인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핵무기보다 더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는 없으며, 또한 핵무기보다 더 인류 번영을 위협하는 존재도 없습니다.”(남정현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는 세계평화의 디딤돌’)

풍자적 기교에 능숙한 남정현은 ‘분지’를 우화 형식으로 다뤄 자신이 쓰고자 했던 의도를 충분히 그렸지만 검찰 공소장이나 법정 공방, 이후 문학 연구자들의 글에서 반핵 문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미국이 핵무기로 무고한 나라를 위협하며 평화를 교란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핵으로 세계(작게 보면 동아시아)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현대판 ‘동양평화론’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 펜타곤 핵 공격 대상이 된 사내

소설은 홍길동의 10대손인 홍만수(洪萬壽)가 돌아가신 어머니 영전에 호소하는 독백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의 어머니는 8·15 후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무슨 환영대회에 나갔다가 미군에게 능욕당한 치욕과 분노를 견디지 못해 광분상태로 세상을 떠났다. 홍만수는 펜타곤 당국에 의하여 “악마가 토해낸 오물”로 낙인찍혀 “육체와 그의 영혼까지를 완전히 소탕”시키겠다는 위협을 받고 있다. 만수가 숨어있는 향미산(向美山)은 “대한민국의 1년 예산에 해당하는 금액”을 들여 “핵무기의 집중공격”을 하려는 펜타곤에 의하여 완전 포위당해 있다.

만수는 “이방인들이 흘린 오줌과 똥물만을 주식으로 하여 어떻게 우화처럼 우습게만 살아온 것” 같은 자신의 누추한 삶을 반성하며, 설사 펜타곤이 핵공격을 해도 선조 홍길동의 기적을 일으켜 “구름을 잡아타고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날아가 기어이 자신의 억울한 한풀이를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왜 그는 펜타곤의 핵공격을 당해야 되는가. 펜타곤 방송에 의하면 그는 “성조기의 산하(한국)에서 자유를 수호하는 미국 병사(스피드 상사)를, 그의 아내(비취)의 순결을 짓밟”은 “강간자”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 때문에 검찰은 공소장에서 “비취 여사의 몸을 강제로 눕히고 겁탈하고 말았다”며 홍만수를 강간범으로 몰아버렸다. 과연 그럴까?

홍만수와 여동생 분이의 아버지는 항일투사로 행불 상태였는데, 8·15가 되어도 귀환하지 않았다. 이건 친일파가 득세한 현실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이다. 어머니마저 미군의 강간으로 미쳐서 죽어버려 어렵게 지내다가 6·25를 맞아 만수는 입대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돌아와 보니 누이 분이는 미군 제 엑스 사단 소속 스피드 상사의 첩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미군에 대한 억하심정에도 불구하고 먹고살고자 그는 양키물건 장사를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양키를 매부로 둔 만수를 특혜족으로 우러르며 미국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달라고 호소하는 터여서 만수는 울분에 차서 절규한다.

“이 견딜 수 없이 썩어빠진 국회여 정부여, 나 같은 것을 다 빽으로 알고 붙잡고 늘어지려는 주변의 이 허기진 눈깔들을 보아라. (…) 진정으로 한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원조를 해줄 놈들은 끽소리 없이 원조를 해주고 그렇지 않은 놈들은 당장 지옥에다 대가리를 처박으라고 전 세계를 향하여 피를 토하며 고꾸라질 용의는 없는가. 말하라 말하라.”

그런데 밤마다 스피드는 분이에게 “본국에 있는 제 마누라 것은 그렇지가 않다면서,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과 폭언”으로 들볶으며 구타까지 해댔다. 누이가 당하는 고통의 비명을 매일 밤 들어오던 만수는 마침 한국을 방문한 스피드 상사 부인(비취)의 “하반신을 한번 관찰함으로써 저의 의문을 풀고 싶었을 뿐, 그 외의 다른 아무런 흉계도 흑막”도 없었다.

▲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그는 비취를 향미산으로 데려가 정중하게 “옷을 좀 잠깐 벗어 주셔야 하겠습니다”라며, 그 이유를 “밤마다 곤욕을 당하는 분이의 딱한 형편”을 밝혔다. “단 하나인 누이동생의 건강을 보살피자면 부득불 나는 여사가 지닌 국부의 그 비밀스러운 구조를 확인함으로써 그 됨됨이를 분이에게 알려주어, 분이가 자신의 육체적 결함이 어디에 있는가를 자각케 하여 그 시정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오빠로서의 입장을 확실히” 했다. 그러자 비취 여사가 “갓뎀!”이라며 홍만수의 뺨을 후려쳐서 그는 여사의 목을 눌러 배 위로 덮쳤다. 그녀는 제발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애원하다가 “헬프 미!”를 외치며 향미산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만수는 출신구 의원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으나 이미 그는 “스피드 상사의 상관을 찾아가 열 번이나 절을 하고 내 출신구의 유권자 중에 그렇듯이 해괴한 악의 종자가 인간의 탈을 쓰고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본인의 치욕이며 동시에 미국의 명예에 대한 중대한 위협임을 누누이 강조”하며, “사전에 적발하여 처단하지 못한 사직당국의 무능과 그 책임을 신랄하게 추궁할 것임을 거듭 약속”한 터였다.

■ 소설 내용 왜곡한 수사기관

홍만수가 결백한데도 억울하게 핵공격을 당했다는 게 ‘분지’가 말하고자 하는 민족적 자존의 본질이며 미국의 오만성을 상징해준다. E M 포스터의 <인도에의 길>을 연상하면 이 대목은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작가는 검찰에서 이 점을 강조했지만 듣지 않고 겁탈한 것으로 왜곡해 버렸다. 왜곡은 수사기관에서만 행해진 게 아니다. 반세기 동안 이 작품에 대하여 언급한 많은 글들도 수사기관 주장처럼 홍만수가 비취 여사를 겁탈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작가 남정현은 아쉬워하고 있다.

“어떻게 그 많은 평론가들 중 작가가 쓴 소설의 줄거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작품을 분석 평가해 주려는 양식을 지닌 분이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다”며 정확·치밀성이 없는 평단 풍토를 비꼬았다.

검찰이 고발한 계급의식 운운은 그야말로 이 소설 오독의 극치다. ‘분지’는 민족의식은 강하나 계급의식은 깊이 다루지 않았다. 작가는 계급 갈등보다 민족 자주성을 더 중시한 것이다.

향미산에 숨어있던 만수가 펜타곤의 핵공격을 받는 즉시 홍길동의 술수로 구름을 타고 미국으로 가서 그곳 여인들 배꼽에 “깃발을 성심껏 꽂아놓을 결심”을 하는 게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태극의 무늬로 아롱진 이 러닝셔츠를 찢어 한 폭의 찬란한 깃발”로 만든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태극의 무늬’는 원래 없었던 것을 퇴고 과정에서 삽입시켰다고 밝혀주었다. 태극무늬, 즉 한국의 깃발이라는 구절 때문에 그는 심한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코리아의 조그만 산등성이 밑서 벌어진 일 분노” 홍만수 공격
‘분지’ 중 펜타곤의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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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문학 1965년 3월호에 실린 단편 ‘분지’.

“어디까지나 성조기의 편에 서서 미국의 번영과 그리고 인류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작업에 뜻을 같이한 자유세계의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미 누차 반복하여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들의 귀중한 생명과 재산과 그리고 자유와 안전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고 있는 본 펜타곤 당국은, 최근에 극동의 일각인 코리아의 한 조그마한 산등성이 밑에서 벌어진 그 우려할 만한 사태를 접하고 놀라움과 동시에 격한 분노의 감정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의 자유민 여러분! 이제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을 대신하여 본 당국은 바야흐로 역사적인 사명감에 불타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이름부터가 사람 같지 않은 홍만수란 자가 저지른 그 치욕적인 사건은 분명히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 전체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범죄적인 중대한 도전행위로 보고 본 당국은 즉각 사태 수습에 발 벗고 나선 것입니다. 축복하여 주십시오.

<2017-5-4> 경향신문

☞기사원문: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31) 남정현 ‘분지’ 필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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