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일제 삼림수탈의 척도 압록강 재감材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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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압록강 유역에서 ‘뜻하지 않은’ 전리품(戰利品)을 얻게 된다. 강 양쪽에 산더미처럼 버려져 있던 목재가 그것이다. 일제는 이들 목재를 수습하여 군사용으로 전용하고자 1905년 11월에 청국(淸國) 안동현(安東縣) 지역에 육군목재창(陸軍木材廠)을 신설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삼림이 중요한 이원(利源)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한 일제는 1906년 10월 19일 한국정부를 강박하여 「압록강 두만강 삼림경영협동약관」을 관철시켰다. 이 협약에 따라 1907년 4월 1일에는 통감부 영림창(統監府營林廠)이 개설되었고, 한국 측도 허울뿐인 서북영림창(西北營林廠)을 설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1908년 9월 청국과 합동으로 압록강채목공사(鴨綠江採木公司)를 발족하였다. 이 기관은 압록강 우안지역(右岸地域; 북쪽 연안) 모아산(帽兒山)에서 이십사도구(二十四道溝) 간의 강면에서 64청리(淸里)에 달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벌채사업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압록강을 경계로 통감부 영림창과 압록강채목공사가 남북으로 포진하여 광범위한 지역의 삼림수탈을 가속화하는 주체로 떠올랐다.

육군목재창의 지휘관들이 그대로 통감부 영림창의 운영을 떠맡은 가운데, 해송과 낙엽송 위주로 벌채한 목재는 대부분 한국주차군의 병영지 건축,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와 통감부 통신관리국의 전신주 재료, 탁지부건축소의 건축자재 등으로 공급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영림창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벌목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데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 무분별한 벌채에 의한 삼림파괴가 가중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0329-51

영림창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벌목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데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 무분별한 벌채에 의한 삼림파괴가 가중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압록강 재감(材鑑)은 이러한 삼림수탈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유력한 증거물의 하나이다. 재감은 조선총독부 영림창에서 제작 배포한 부채모양의 목재 샘플을 말한다. 여기에는 바깥살대로 사용된 주목(朱木, イチヰ)을 비롯하여 부챗살을 이루는 피나무(皮木, アムウルシナノキ), 황벽나무(黃蘗木, キハダ), 박달나무(檀木, ヲノヲレカンバ), 백양나무(白楊, テウセンヤマナラシ), 엄나무(楸木, マンシウグルミ), 자작나무(白樺, シラカンバ), 전나무(杉松, テウセンハリモミ), 들메나무(梻, ヤチダモ; 訛稱 シホヂ), 가문비나무(杉松, タウヒ), 느릅나무(楡, ハルニレ), 잣나무(紅松, テウセンマツ), 잎갈나무(落葉松, テウセンカラマツ), 신갈나무(楢, モンゴリナラ) 등 압록강 유역에서 자생하는 14종의 나무가 포함되어 있다.

한 가지를 덧붙이면, 191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 때 지반강화를 위해 사용된 기초말뚝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당시에 조선총독부 영림창에서 공급한 9,388그루에 달하는 낙엽송이 경복궁의 땅속에 박히게 되었다. 지난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때 이 말뚝들을 말끔히 제거했어야 하나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경복궁 복원공사가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로 인해 백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일제에 의한 삼림수탈의 흔적은 여전히 수도 서울 한복판의 지하에 응어리로 남게 되었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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