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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경제 살리려 쿠데타? 치명적인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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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14> 유신 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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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와 관련해 그동안 데탕트 위기론, 그리고 1968년 무렵 고조된 전쟁 위기에 주목한 견해에 대해 살펴봤다. 이와 달리 유신 쿠데타의 주요 원인으로 경제 문제를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

유신 쿠데타와 경제 문제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견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제기되는 듯하다. 그중 하나는 경제 개발, 특히 중화학 공업화를 위해 유신 쿠데타가 불가피했다는 주장이다. 박정희를 적극 옹호하는 이들이 주로 펴는 주장으로, 예컨대 1970년대에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이었던 오원철은 “중화학 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 공업화”라고 주장했다. 유신 쿠데타가 없었다면 중화학 공업화로 대표되는 산업 구조 고도화는 불가능한 일이었나 같은 여러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 어떻게 보나.

서중석 : 경제 문제는 유신 체제와 관련해 제일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자 논란도 많은 사안이다. 많은 사람이 그 부분을 이야기했는데, 문제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느냐 하는 것이다. 정확하고 명료하게 그 부분을 지적해야 하는데, 애매한 상태로 거론한 사람들이 많았다. 난 여기서 두 가지를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1972년 10.17쿠데타는 헌법을 유린해 정치 활동의 기본적 자유와 시민사회를 극도로 억압하고 위축했다. 그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국민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게 뭐였겠느냐, 이 말이다. 있다면 유일하게 경제밖에 없었다. 그것과 ‘박정희가 경제 때문에 10.17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건 별개의 차원이다. 별개로 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걸 혼동하거나 혼란스럽게 얘기하고 있다. 질문에도 나오는 오원철 같은 사람, 그러니까 유신 체제에서 고위 관료였던 자나 일부 연구자가 ‘유신 체제가 중화학 공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유신 체제를 출범시켰다 또는 10.17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하고는 아주 다른 주장이다. 양자를 명확하게 분리해서 봐야 하는데, 역시 애매한 상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둘을 분명하게 구별해서 봐야 한다. 이와 더불어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


‘능률의 극대화’, ‘생산적인 정치’의 속뜻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능률의 극대화’, ‘생산적인 정치’라는 말이 유신 체제 내내 나오는데, 이게 정확히 뭘 가리키는 건가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약간 혼란을 느낄 수 있다. 능률의 극대화를 기해 생산적인 정치를 하겠다고 박정희는 유신 체제에서 계속 역설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 때문에 능률의 극대화가 필요한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 게 태반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연설문이라든가, 10.17쿠데타에서 1972년 12월 27일 유신 대통령 취임식 때까지 나온 문건들을 보면 대개 그런 식으로 돼 있다.

이 기간 중 초기에 나온 문건을 보면 ‘제3공화국 헌법의 정치 체제가 잘못됐다. 그래서 생산적인 정치를 못하게 돼 있다’, 이렇게 지적한 걸 빼놓고는 왜 생산적인 정치를 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꼭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생산적인 정치를 해야 한다고만 이야기했다. 10.17쿠데타에서 12월 27일 대통령 취임식 때까지 나온 것들을 보면 대개 그렇다.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 회견, 아주 유명한 회견인데 여기서도 박정희는 “더 능률적이고 낭비 없는 생산에 직결되는 정치 제도로 (…) 육성·발전시켜나가야”, “지금까지 국력 배양을 저해한 가장 큰 요인의 하나는 (…) 국회의 비능률적 운영에 있었다”, 이렇게만 얘기했다. 여기서 국력 배양이 정확히 뭘 가리키는 건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된다는 것인지를 명료하게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또 생산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경제에서 생산을 가리키지 않나. 그런데 “생산에 직결되는”, 여기서도 그런가 하면 그게 그렇지가 않다. “낭비 없는 생산에 직결되는”, 여기서 가리키는 건 경제적 생산이 아니다. 생산적인 정치, 그러니까 능률의 극대화를 말하는 것이다. 국회 운영이 비능률적이라는 것, 바로 그걸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박정희만이 아니라 군국주의 파시즘의 정화라고 볼 수 있는 1936년 일본 청년 장교들의 2.26쿠데타, 그리고 1920년대부터 열병처럼 퍼져 1945년까지 유럽을 뒤덮은 파시즘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들은 대개 강력한 생산적 정치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혐오하고 타기, 타도,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생산적 정치라는 것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를 때려잡자. 공산주의자를 때려죽이자’, 이건 이것대로 나오고 또 ‘생산적 정치를 하자’는 건 그것대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이 바로 파시즘의 본령이자 특징이라고 난 본다.

그런 점은 유신 체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박정희는 경제 발전을 위해 유신 쿠데타가 꼭 필요했다고 어디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능률 극대화를 위한 생산적인 정치를 해야 하고, 그걸 가로막는 것을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타격 대상 또는 타도해야 할 목표물로 공산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외에도 노동자 파업과 시위 같은 걸 설정하는 건 유럽 파시즘에서도 많이 나오는 것 아닌가. 또 사회적, 문화적 퇴폐와 병리 현상이 문제라고 박정희가 많이 지적했는데, 유럽의 파시스트들도 이런 것들을 얼마나 많이 지적했나. 일본 군국주의자들도 이 부분을 참 많이 지적했다. 그리고 ‘열등 민족’은 지구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런 것들이 설정돼 있었다.

이처럼 파시즘, 군국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민주 사회나 민주주의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생산적인 정치라는 것을 내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유신 체제에서 생산적인 정치라는 걸 언급할 때 그걸 바로 경제와 연관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생산적인 정치를 직접 언급한 구절을 자세히 읽어봐도 그렇고, 관련된 다른 것들을 봐도 그렇다.


▲ 유신 체제에서 박정희는 능률의 극대화를 기해 생산적인 정치를 하겠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 속뜻은 1인 독재 체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사진은 1973년 국군의 날(10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는 동안 스탠드에 펼쳐진 대통령 초상화 카드 섹션. ⓒ연합뉴스

축적·재생산 위기가 유신 쿠데타 불렀다? 구체성이 부족한 설명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와 경제 문제의 관련성을 중시하는 견해 중 다른 하나는 주로 진보 쪽에서 나왔다. 1960년대 방식의 자본 축적이 위기에 빠져 새로운 축적 방식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러한 경제 위기가 유신 쿠데타를 낳았다는 시각이다. 이런 시각,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경제와 관련해서는 여러 각도에서 논쟁이 붙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자. 우선 박정희 유신 체제의 성립과 경제의 관계에서 ‘경제 위기가 유신 정변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이 있다. 경제 위기가 유신 쿠데타로 가게 만들었다는 이러한 주장은 일부 진보적 학자들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구체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아주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것이 특징이다. ‘제3공화국 방식인 의회 민주주의 외양으로는 종속적 자본주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없는 재생산의 위기를 맞았다’, 또 ‘종속적 독점 자본 축적의 위기를 맞았다’, 이렇게 설명하는데 이게 뭘 가리키는 건지 모호하다. 이런 식의 주장을 여기서만 하는 게 아니다.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난 배경과 원인,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난 배경과 원인 같은 걸 설명할 때에도 ‘종속적 독점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아 발생했다’, 이렇게 똑같은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대체 ‘종속적 독점 자본주의가 축적의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뭘 가리키는 것인지, 난 이게 분명하게 설명돼야 한다고 본다. 또 이들은 제3공화국의 종속적 자본 축적 방식이 어떻게 위기를 맞았기 때문에 유신 체제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제3공화국의 종속적 자본 축적 방식과 유신 체제에서 이뤄진 자본 축적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또 각각 뭘 가리키는 것인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재생산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했기에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해 헌정을 유린하는 사태를 맞지 않으면 안 됐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런 부분들을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고 난 본다.

이 문제에 대해 김영명 교수가 잘 지적한 게 있다. 김영명 교수는 일부 학자가 경제 위기의 증거로 무역 수지와 재정 수지의 악화, 제조업 분야의 생산지수 증가율 하락, 임금 상승 둔화, 총투자율 감소, 경제 성장률 하락 등을 들고 있지만 경제 성장률, 도매 물가 지수, 공업 생산 지수, 수출고 등의 통계를 볼 때 유신 쿠데타 전후에 뚜렷한 경제 하락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뿐만 아니라 설령 상당히 뚜렷한 경제 하락세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유신 쿠데타를 일으킬 만한 경제적 동기인가? 그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박정희도 여기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프레시안 : 축적의 위기, 재생산의 위기와 유신 쿠데타의 문제를 당시 세계 경제와 연결해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부분, 어떻게 보나.

서중석 : 이들은 국제적 경제 위기를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데 언제, 어떠한 국제적 경제 위기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 위기가 대만이나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달리 왜 유독 한국에만 그런 영향을 끼쳐 유신 쿠데타와 같은 극단적 변란으로 체제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됐는지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추상적으로 짤막하게 국제적 경제 위기를 언급할 뿐이다.

사실 국내의 자본 위기나 세계 경제 위기는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현상 아닌가. 그런데 유독 1972년 10월에만 유신 쿠데타라는 극단적인 변란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 상관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1972년 8.3 사채 동결 조치가 아주 중요하게 평가돼야 한다고 난 본다. 8.3 사채 동결 조치는 독점 자본 축적에서 실제로 대단히 중요하지 않나. 그런데 이들은 이걸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저 설명하고 넘어가는 정도이고, 그중에는 도외시하는 사람도 있다. 8.3 사채 동결 조치로 자본 축적 위기를 불완전하게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고 평가해야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이들은 깊이 있는 논의를 해줘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자본 축적 위기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다.

또 세계 자본주의 위기는 1970년을 전후한 시기보다도 1973년 제1차 오일 쇼크 때 훨씬 심각했다. 이건 눈을 감고도 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니가. 그렇다면 왜 그때 다른 나라에서는 유신 체제와 같은 권력이 탄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이들은 해명해야 한다. 제1차 오일 쇼크로 세계 자본주의가 그렇게 큰 위기를 맞았고 몇몇 나라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는데,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다른 나라에서도 유신 쿠데타 같은 게 일어났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논리는 ‘유신 체제가 아니었으면 한국식 경제 발전이 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주장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유신 체제를 합리화하는 이들의 진보성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그들 논리의 정합성 여부와 별개로, 1960년대 말 한국 경제에 차관 기업 부실화 등 적잖은 문제가 있었던 건 사실 아닌가.

서중석 : 그런 게 있긴 했지만 그것도 1969년, 1970년에 있었던 것 아닌가. 1972년에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 것들과 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는 상관이 없다. 그리고 1969년 5월 재무부에서 대표적인 차관 업체 83개 중 45퍼센트가 부실기업이라고 발표하긴 했지만, 그런 게 나왔다고 해서 경제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경제기획원이 그 모든 걸 점검하던 때인데 왜 그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가, 박정희 정권이 어째서 차관 도입 기업체에 대한 단속이라고 할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가, 이 점은 문제였다. 그런 부실기업이 일부 망했지만 그 기업주는 여전히 잘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다. 기업주는 살고 기업체는 망했다는 얘기가 당시 많지 않았나.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해 야당은 ‘박정희 정권이 책임져야 한다. 총체적으로 박정희 정부의 경제 정책이 부실한 것 아니냐’, 이렇게 주장했다. 아울러 여기에는 예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권력 쪽에서 차관의 일부를 떼먹은 문제도 엮여 있었다. 그것 때문에 차관 업체가 부실한 경영을 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다. 이런 문제들이 다 얽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게 할 정도의 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박정희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당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1971년 위기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몇 사람만 자기주장을 하고 있다.

노동 문제 때문에 유신 쿠데타? 납득하기 어려운 해석 

ⓒ오월의봄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를 노동 문제와 연결해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주장, 어떻게 보나.

서중석 : 권력 쪽에서 볼 때 노동 문제와 관련해 유신 체제가 필요했던 것 아니었느냐는 설명이 있다. 다시 말해 노동 운동이 활성화될 터였는데 그런 노동 운동을 제약, 통제하기 위해 유신 체제가 필요했던 것 아니었겠느냐는 주장이다. 종속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계속 저임금 정책을 강요해 차관 도입이나 직접 투자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노동 운동을 봉쇄해야 했고 이 때문에 유신 체제가 출현했다, 이런 주장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노동 운동은 그야말로 초보적 단계였다. 노동자 계급 의식이라는 게 거의 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대 후반에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1980년대에 많이 나타나는 노동 운동권의 정치 투쟁이 이 시기에는 나타나기 어려웠다. 사실 1970년대 후반에도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정치 투쟁이라기보다는 도시산업선교회와 연결된 정치 투쟁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여튼 1970년대 초에는 노동 운동을 이끌 만한 민주 노조의 전국적인 산별 조직이나 규모가 큰 사업장 노동조합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움직이는 건 1987년 이후다. 1980년대 중반의 노동 운동, 1987년 6월항쟁과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을 볼 때 1970년대 초반기와 중반기의 상황에서 노동 문제 때문에 유신 체제가 필요했다고까지 이야기하는 건 좀 납득하기 어렵다.

노동 문제와 유신 체제의 상관관계를 주장하는 진보적 학자들은 1971년 12월에 통과된 국가보위법조차 당시 노동 현실과 노동 운동 상태를 볼 때 과잉 대응 아니었느냐 하는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국가보위법에서 제일 중요한 건 노동자의 단체 교섭권과 단체 행동권을 규제한 바로 그 부분(제9조)이었다.


난 이런 생각을 한다. 심하게 말한다면, 유신 체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국가보위법을 발동하고 그와 더불어 중앙정보부 같은 사찰·탄압 기구를 활용해 1970년대 노동 운동을 탄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다시 말해 유신 체제가 아닐 경우, 그러니까 1971년 대선에서 당선된 박정희가 1975년까지는 집권하게 돼 있었던 것이니 그다음에 김종필이든 김대중이든 다른 사람이 정권을 잡았을 경우 상황이 어땠을까?

내가 이 이야기를 왜 강조하느냐 하면,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노동 관계법을 개정할 때 김대중, 김영삼이 아주 보수적인 짓을 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6년 연말에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개악하는 쪽으로 날치기 통과시켰다가 그 직후부터 1997년 연초까지 노동자 총파업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투쟁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도 이런 것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뭐냐 하면, 자기들이 집권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1987년에도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자기들이 집권할 때에 대비해 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것 아니겠나. 이 사람들은 노동 문제에 그렇게 진보적이지 않았다. 그 시절에 곤경에 처한 노동자가 찾아오면 대개 대접을 잘해주긴 했지만, 김대중과 김영삼이 이끈 야당이 노동 입법 문제 등과 관련해 실제로 한 행동은 그것하고 다르다. (1987년 10월 노동 관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11월 공포됐다. 노동자 대투쟁으로 표출된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정안이 탄생했기에 이전부터 노동자를 옥죄던 장치들 중 일부는 이때 사라졌다. 예컨대 노조 설립 자체를 제한하고 노동 쟁의를 가로막던 각종 규제 조항은 많이 완화됐다. 그러나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정치 세력이 제도 정치권에 없던 상황에서, 더욱이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고 사회적으로 충실히 논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개정안이었기 때문에 그 한계도 뚜렷했다. 개정안에는 노동계의 숨통을 죄는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꼽히던 제3자 개입 금지, 복수 노조 금지, 노조의 정치 활동 금지 조항 등이 담겨 있었다. 이전에는 노동자 편이라고 말하던 야당은 노동 관계법 개정 문제에서는 대폭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편집자>)

어쨌건 1970년대의 여러 가지 상태를 볼 때 ‘노동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이 시기에는 그렇게 설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규모가 큰 기업체들, 예컨대 중화학 공업 쪽은 당시 월급이 괜찮았다. 그 이전보다 상당히 올려줬다.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노동 문제와 연결해 유신 쿠데타를 설명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권력이 노동 문제를 중시하는 건 전두환 신군부 때부터

▲ 남양주 모란공원에서 이소선 여사 3주기 추도식이 열린 2014년 9월 3일, 전태일 열사 동상의 눈에서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1970년 전태일 사건을 접한 후 권력 쪽에서 노동 문제에 대한 선제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것이 유신 쿠데타를 낳은 한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나? 전태일 열사 분신 직후 청계피복노조(‘청피’)가 탄생하고 그 후에는 동일방직, YH, 원풍모방 등에서 여성 노동자 중심의 민주 노조 운동이 전개되지 않았나. 물론 동일방직, YH, 원풍모방 등에서 노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건 주로 유신 쿠데타 이후이긴 하다(동일방직의 경우 유신 쿠데타 이전인 1972년 5월 한국 최초로 여성 노조 지부장 탄생). 그걸 감안하더라도, 민주 노조 운동의 문을 다시 연 전태일 사건과 그 직후의 흐름에 권력 쪽에서 불안감을 느꼈을 개연성은 없나.

서중석 : 난 그렇게 보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전태일 사건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그걸 중시한 건 운동권이었다. 운동권이 그 사건을 키운 건데, 그건 참 잘한 일이었다. 박정희 정부가 신경을 안 쓴 건 아니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봤다. 다만 당시 노동청장이 현장이 나오고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나는 등의 활동은 했다.

정작 권력이 노동 문제를 중시하는 건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그렇게 된 건 그 사람들이 예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냐 하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드디어 본격적인 산업 노동자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중화학 공업 부문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로 가면서 엄청난 규모의 대사업장 산업 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탄생하지 않나.

그러니까 그것에 대처하면서 그 복잡한 여러 행위를 했던 것이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권력을 잡은 후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어 노동 관계법을 다 개악해버렸다. 그뿐 아니라 조그마한 규모의 민주 노동 단체조차 아주 철저할 정도로, 정말 무섭게 탄압하지 않았나. 그야말로 씨를 말리려고 했다. 노조를 철저하게 때려잡았다. 그 결과 1980년 5.17쿠데타가 난 후 한 1∼2년 정도는 노동자들의 활동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조그마한 곳 몇 군데 빼놓고는 그랬다. 그러다가 1984년 대구에서 시작된 택시 기사들의 시위가 다른 도시들로 번지고 1985년에는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 동맹 파업 같은 게 일어나면서 노동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고 사람들이 보지 않나.

이러한 1980년대와 비교하면 1970년대에는 노동자의 단결 상황, 의식, 운동이 훨씬 약했다. 그런 것들은 특히 1987년 7, 8, 9월 투쟁을 겪으면서 확 퍼지게 된다. 어쨌건 노동 운동에 대한 이런 태도를 보면, 수구 보수 세력이 역사를 잘 모르는 것만은 아니기도 하다.

<2015-10-11>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경제 살리려 쿠데타? 치명적인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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