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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나는 이학래다 / 이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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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25년 전남 보성 겸백의 두메산골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박씨 집안이 많은 마을에서 그의 집안은 소수였지만, 아버지가 마을 이장을 할 만큼 인덕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우체국과 여수수산시장에서 막일을 했지만 제대로 되는 것도 없이 그의 청소년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1942년, 17살이 된 그는 탄광으로의 강제징용이나 일본군 징집을 우려하며 마을뒷산에서 피신 생활을 하던 중 “포로감시원을 하면 2년 계약직으로 월급 50엔을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을에서 누군가는 가야 했기에 그는 군속과 군인이 뭐가 다른지, 또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모른 채 마을을 홀로 떠났다.

부산 서면에 위치한 일본군 노구치부대. 전국에서 모집된 3016명은 포로감시원이 되기 위해 ‘삔따’(동료 뺨을 때리는 체벌)를 반복하며 가혹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연합군 포로감시 임무나 제네바조약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1942년 8월 부산항을 출발해 수마트라, 자바, 타이 포로수용소에 각각 배치됐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한 태면철도(타이와 미얀마를 잇는 약 415㎞의 철도) 150㎞ 지점 건설현장인 힌도쿠에서, 그는 동료 4명과 함께 500명의 연합군 포로에 대한 감시 임무를 맡았다. 초라한 의식주, 의약품의 결핍, 장비도 없는 가혹한 노동환경, 거기에다 밀림 속의 전염병에 콜레라까지 만연해 많은 포로들이 희생됐다.

‘도쿄전범재판’ 기록을 보면, 일본군 포로가 된 미·영 연합군 포로 13만2134명 가운데 3만5756명이 사망(사망률 27%)했고, 이 가운데서도 악명 높은 태면철도의 경우 투입된 포로 4만8296명 중 약 30%가 넘는 1만6000여명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이 얼마나 무모하고 비인도적인 작전을 수행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연합군 포로들의 감시 및 동원의 최전선에 활용된 것은 조선 청년들이었다.

이른바 비(B)·시(C)급 재판에서 조선인 148명이 일본전쟁의 범죄자로 형을 받았고, 23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태면철도 제5분소 감시원이었던 조문상은 1947년 2월25일 “나는 내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유서를 남기며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도 통역이나 구체적인 물증도 없이 증언만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천행인지, 그는 1947년 10월 극적으로 20년형으로 감형되어 1951년 8월에 다른 27명의 조선인 전범과 함께 일본 스가모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와 함께 국적 문제로 일본인이 아닌 그들은 석방돼야 했지만, 한·일 양쪽 정부는 이 문제를 협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1956년 6월 비로소 석방됐지만, 고향을 떠나서 이국땅에서 석방된 상황에서 동료 2명은 자살했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도 있었다. 그들은 친일협력자라는 비난 속에 조국행을 단념했다.

1965년 한-일 회담에서도 조선인 전범 문제는 협의되지 않았으며, 그는 석방된 동료들과 ‘동진회’를 구성해 1991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법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본 국적의 상실과 한일조약 이후 청구권 상실’을 이유로 8년간의 재판은 결국 패소했다.

2006년 한국 정부는 그들을 일본에 의한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야말로 ‘전범’이라는 오명을 쓰고 죽어간 23명의 동료들에 대한 명예회복이고,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라고 믿고 있다. 그는 아베 신조 총리에게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하는 등 1955년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 이후 29명의 총리에게 매번 요청서를 보냈으나 일본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2008년 일본 민주당 정권 때 특별법이 제출됐지만 민주당의 몰락과 함께 법안도 폐기돼 버렸다. 2015년 90살을 맞이하는 그는, 마지막 해결수단으로 지난해 10월14일 한국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조국을 상대로 한 헌법소원에는 주저했다. ‘전범’이 조국을 기소했다는 비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그들의 문제를 방치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50년, 이제 그들의 사슬을 풀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또 하나의 돌아오지 못할 영혼을 만들 것인가. 그들이 전범이면 우리들은 공범이다. 나는 이학래다.

이영채 일본 게이센여학원대 국제사회학과 교수

<2015-02-01> 한겨레

☞기사원문: [세계의 창] 나는 이학래다 / 이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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