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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다큐는 여러 가지 속임수가 내재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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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이승만 다큐..진실을 보지 못한 후대를 걱정하며


김정륙 임정기념사업회 부회장(연구소 회원)


KBS다큐멘터리 담당 프로듀서로부터 취재요청이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제작취지부터 짚어봤다. 세간에 이승만 박사 찬양 미화 의도라 하는데 사실이냐고…PD는 전혀 사실이 아닌 오해라 했다.




그래서 재차, 수많은 단체가 거부하는 이 프로그램을 왜 굳이 고집하느냐고 물으니 만약, 이박사 고무찬양이라면 반민특위에 관한한 과오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인데 왜 비켜가지 않고 굳이 내용에 담겠느냐며 믿으라했다. 수긍이 되기에 취재에 응했었다.


방송을 본 후, 제일 먼저 자라나는 우리 후대들이 걱정 되었다. KBS는 이박사의 功과 過를 모두 아우른 영상을 제작하려는 의도를 가졌으나, 이 프로그램을 반대한 단체들의 예상대로 여러 가지 속임수가 내재된 것을 확인하고 분노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보자면, 첫째, 국회에서 기초한 최초의 헌법은 내각제였다. 이박사는 대통령제로 바꾸지 않으면 응하지 않겠다며 완강하게 거부했다. 요즘, 뉴라이트계열측은 느닷없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논리를 개발해서 주장하고 있다. 민주주의건 자유민주주의건 그 요체는 ‘의회정치’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했다면 내각제와 대통령제를 의제로 상정해서 다수의 의사를 따르는 것이 원칙인데 이박사는 초기부터 원칙을 버린 채 아집만 부려 대통령제로 고쳐 당선된 것이나, 영상을 보면 앞뒤의 요점은 빠져있고 이승만 몇 표, 김구 몇 표, 그래서 이승만의 당선을 선포한 것처럼 되어있다.백범 김구 선생은 조국의 분단을 고착하는 이 단정수립을 반대해 정치에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 당대의 지도자와 경합해서 당선됐다는 판단을 하게한 트릭이 있는 것이다.


둘째, 일제치하에 고통 받던 많은 국민들이 살길을 찾아 미국에 건너가 고된 노동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이분들은 조국광복의 염원을 담아 ‘국민회’를 조직하고 피땀 어린 성금을 회비로 내놓아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금전의 출납은 장부에 기재하고 투명하고 건전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이 국민회를 이박사는 미국에 건너가자 기습 강점한 것이며 이후 회계처리는 베일에 가려졌고, 거의 이박사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당시의 기록이다. 이를 박용만, 이승만의 의견충돌로 보게 한 것은 분명 왜곡이다.


셋째,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 받은 이박사만 있고, 수치스런 탄핵으로 물러난 결과는 다루지 않은 것 또한 문제이다.


넷째, 6·25전쟁 일 년 전, 이북은 크고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도발했다. 군당국에서 발표한 일련의 통계 전과를 보면 적사살 15,000명이 넘고, 노획무기도 엄청났다. 사단병력에 해당하는 적을 사살했다면 적어도 군단병력의 전투규모다. 이 사이 북한의 조종사가 전투기를 몰고 귀순했고, 이북의 전력정보를 여러 경로로 확보한 이승만 정부가 겨우 잠자리 비행기로 비유되는 L-19 몇 대에 안주한 것도 모자라 얼토당토않은 ‘점심은 평양, 저녁은 압록강!’을 외치며 국방장관이 허풍을 쳤다.



대통령의 절대적 주임무는 국가와 민족의 보위다. 그러기에 대통령 취임선서에 이 대목을 명기하는 것이다. 6·25 기습남침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국민을 남하시켜 보호할 수 있는 기회는 6월 27일 단 하루였는데 거짓방송과 거짓전과보도로 국민을 현혹시켜 서울에 가두고 유일한 퇴로였던 한강다리를 폭파해버린 것은 통수행위가 아니라 직무유기였다.


마지막으로, 나라의 땅덩이가 경상남도만큼 오그라들어 존망의 백척간두에 놓일 때, 피난수도 부산에서의 정황은 어떠한가? ‘백골단’, ‘닷벌때’의 이름으로 부산의 전봇대를 도배한 무시무시한 표어의 공포 분위기! 이 때,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잡아가두고 통과시킨 것이 발췌개헌이다. 이것이 서울 수복 후에도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어져 우리의 헌정사는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유린당한 암흑기였다 해도 과언은 아닌데 이것이 모두 빠져있다.


또한, 이후 일련의 실정이 누적되어 국민은 4·19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당시 긴급내각회의에서 이박사는 이 소요사태를 모르고 묻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이화장의 억지 주장과 일치한다. 이박사는 분명 실정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알고 있었다. 단지, 노회한 제스처로 규탄의 주체에서 벗어나 아랫사람에게 덮어씌우려했을 뿐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당시의 진실을 보지 못한 후대가 걱정되는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의식 있는 단체에서 역사관을 세우고, 인위적으로 조작된 역사를 바로 잡겠다고 나섰다. 이 단체가 걸어온 굽이굽이 부대낀 연혁은 상처투성이지만 한 번도 좌절하거나, 의지를 꺾은 적이 없다. 역사 정의 실천을 가치로 쫓는 ‘민족문제연구소’다. 이 단체의 숙원성취를 기원하며, 편안함 보다 더 소중한 상처뿐인 영광이 있으리라 확신한다.


2011년 10월 3일 김정육 배상


[참고로 이 글은 10월10일 “전국언론노조”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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