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경향 정원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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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경향」은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일본이 병합조약 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엽서를 공개한다. 병합 기념엽서의 존재는 이미 학계에 잘 알려져 있고 언론에도 드물게 일부가 공개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하는 엽서는 언론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들로, 모두 29장이다.
사진과 그림, 각종 문양으로 치장된 이 엽서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병합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미화하고 있다. 최장근 대구대 역사학과 교수는 “일본이 강제병합을 통해 영토를 넓혔다는 점, 강제적인 조약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맺은 것이라는 점, 강제병합이 동양 평화를 위한 일이었다는 점 등을 선전하려는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면서 “특히 지도가 표시된 엽서는 강제병합이 영토 확장 차원에서 이뤄졌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이 자료들은 일본제국의 조선 통치를 시각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Weekly경향」은 엽서 이외에도 당시 조선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함께 공개한다. 한일병합 당시 일본의 한 음악출판사에서 발행한 ‘한일병합’ 창가집, 일본 신문 삽지, 조선과 일본 양국의 강제병합 주역들의 사진이 합성된 대형 액자그림, 영국과 미국 신문에 실린 기사와 카툰 등이 그것들이다. 식민지 시기 창가를 연구해온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병합조약 체결일자에 맞추어 발행된 창가집은 일본이 강제병합을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라면서 “우리 음악계에는 그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자료”라고 말했다.
엽서를 포함한 모든 자료는 미술사학자인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의 개인 소장품으로, 이 소장의 동의를 받아 공개하는 것임을 밝힌다.(박스 기사 참조)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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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에 나와 있는 엽서의 우측 하단을 보면 ‘일한합방 기념’이라는 글자 아래로 발행일이 명시돼 있다. 명치사십삼년팔월이십구일. 병합조약이 공포된 1910년 8월 29일이다. 그 아래로는 영어로 ‘한국 병합 기념’이라고 쓰여 있다. 병합을 국제적으로도 선전하려 했던 것이다.
엽서를 보면 일본을 뜻하는 붉은 태양에서 뻗어나온 여러 갈래의 햇살이 조선 궁궐(경복궁?)을 비추고 있다. 오른쪽 상단의 사진은 1905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으로 강제병합 당시 일본 총리대신이었던 가쓰라 다로, 왼쪽 하단의 인물은 일본 육군대신 출신으로 병합을 실행한 주역인 당시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다. 가쓰라 다로 아래 지구본에는 일본과 조선의 영토가 붉은 색으로 표시돼 있다. 이는 조선이 일본의 새 영토가 되었음을 과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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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는 도안이 흥미롭다. 사각 액자 안에 있는 것은 병합조약 전문이다. 액자에 걸쳐 있는 것은 태극기의 태극문양이다. 태극문양 안에는 조선 궁궐의 사진이 들어가 있다. 태극문양 위로는 독수리를 닮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형태로 미루어 이 새는 일본을 상징하는 매인 금치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게 됐음을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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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에는 당시 일본과 조선의 황제가 등장한다. 위에 있는 인물이 일본 메이지 천황, 아래는 조선의 순종 황제다. 상하관계를 명확히 표시했고, 메이지 천황 옆에는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새가 긴 꼬리를 드리우고 있다. 형태로 보아 이 또한 금치인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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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는 활짝 펼쳐진 공작새의 깃털 좌우로 순종과 메이지 천황이 서로 대등한 구도로 배치돼 있다. 병합이 동등한 조건에서 이뤄진 경사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5의 구도도 비슷한데, 왼쪽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며 오른쪽은 후에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한 요시히토 천황(다이쇼 천황)인 것으로 보인다.
사진6은 강제병합을 주도한 일본측 대표 인물 두 명의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는 엽서다. 오른쪽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받아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 왼쪽은 병합 당시 조선 통감이자 병합 후 초대 조선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다.
사진7에는 경술국적 이완용이 등장한다. 엽서 오른쪽에 있는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은 각기 일본 천황과 조선 황제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병합조약문에 서명했다. 병합조약은 공식적으로는 1910년 8월 29일 체결된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 이완용이 데라우치 통감을 만나 조문에 조인한 것은 이보다 일주일 전인 8월 22일이다. 8월 29일은 순종 황제의 옥새를 날인하고 조약을 포고한 날이다.
사진8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왼쪽부터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순종, 데라우치 마사타케다. 인물 배치가 흥미롭다. 왼쪽과 오른쪽에 각기 조선과 일본 인사 한 명씩을 쌍으로 배치해 균형을 맞췄다.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이 한 쌍을 이루고, 오른쪽에는 순종과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 쌍을 이룬다. 엽서 속 사진에 나와 있는 건물은 당시 이완용이 데라우치를 만나 조약문에 서명한 조선 통감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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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9에는 일본 황거(천황이 거주하는 황궁) 앞에 있는 이중교가 등장한다. 이중교 사진 주위로 꽃문양을 배치해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明治四十三年 八月二十九日’(1910년 8월 29일)이라고 새겨져 있는 스탬프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사진10에는 순종(왼쪽)과 메이지 천황의 사진이 액자 속에 들어 있는 형태로 나란히 배치돼 있다. 사진11은 병합조약문 8개 조항 일본어 전문을 실은 엽서다. 엽서 아래에 ‘일한합방 기념’이라고 쓰여 있지만 강제병합 직후에 발행된 엽서는 아니다. 엽서에 찍힌 스탬프를 보면 ‘조선총독부시정기념’이라고 되어 있다. 시정(始政)이란 통치를 시작했다는 뜻으로, 조선총독부 통치를 기념한다는 뜻이다. 실제 발행일자도 명치 43년 10월 1일, 즉 1910년 10월 1일이다. 박한용 연구실장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해마다 이 같은 시정기념엽서를 발행했다.
사진12와 사진13에는 조선과 일본을 상징하는 건축물 사진이 나란히 등장한다. 사진 12에는 이중교와 창덕궁 사진이 원형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고 ‘한일합방 기념’이라고 쓰인 스탬프가 찍혀 있다. 발행일은 1910년 8월 29일이다. 꽃문양으로 경축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진13에는 돈화문, 조선총독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등장한다. 데라우치 이름 옆 괄호에 있는 문구는 ‘원통감(元統監)’이다. 병합 이전까지는 통감이었다는 뜻이다. 총독부 사진 옆 ‘조선총독부’라는 문구에도 괄호로 ‘원통감부’라고 표시해, 통감부가 병합 후 총독부가 됐음을 명시하고 있다.
사진14는 일본이 강제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축가 전문이 인쇄된 엽서다. “오늘 합방이 이루어져 팔도가 우리 영토가 되었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제국만세”로 끝난다. 노래에 등장하는 ‘신후(神后)’는 신공황후를 가리킨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조선땅에 도착해 신라, 백제, 고구려를 일본의 조공국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다. 사진15에 이 신공황후(왼쪽)가 등장한다. 이 엽서에 신공황후, 이토 히로부미(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른쪽)가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두 조선을 일본 영토로 편입시키는 일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제병합 2천년 전부터 시작된 조선병합의 꿈을 기어이 이뤄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병합에 역사적 연속성과 정당성을 부여한 셈이다. 사진 안에서 마차가 지나가고 있는 다리는 일본 황거 앞 이중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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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6은 노골적인 선전 엽서다. 조선의 궁성 앞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일한합방’ 또는 ‘만세’라고 적힌 깃발을 흔들고 있다. 엽서에는 ‘조선왕성 앞에서 열린 일한병합 축하대회 광경’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조선 민중이 강제병합을 환영하고 있다고 왜곡한 것이다.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사진17은 완벽하게 연출된 장면을 실은 엽서다. 사진을 보면 일본 대표들과 조선 대표들이 야외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아래에는 ‘일한병합 담판 표정’이라고 찍혀 있다. 강제병합조약이 마치 조선과 일본의 대등한 협상의 결과인 것처럼 포장한 것이다. 연출된 축하행렬 사진을 실은 사진18도 같은 맥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진19와 사진20은 모두 조선 민중들이 강제병합을 환영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사진19에서는 한복을 입은 조선 여성이 일장기를 들고 있다. 사진20에서도 조선 민중들이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두 엽서 모두 마을에 집집마다 일장기를 내걸고 있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사진21은 1910년 8월 29일자로 발행된 조선총독부 관보를 사진을 찍어 엽서로 만든 것이다. 관보에는 조약 내용이 실려 있다. 사진22는 강제병합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축약해놓은 엽서다. 사각 테두리 안에서 대각선을 그려 일장기와 태극기를 합쳐놓았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매우 흥미로운 엽서”라면서 “일본이 우리 국기마저 유린한 것”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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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공개된 엽서에는 일본과 한국의 지도가 그려진 엽서들이 여러 장 있다. 사진23은 1910년 8월 29일자 스탬프가 찍힌 병합 기념엽서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고, 독도는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 1906년께 발행된 한글 엽서(사진24)는 동해를 ‘대한해’로 표기하고 있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것은 다른 엽서들도 마찬가지다. 사진25와 사진26은 일본과 조선 영토를 모두 붉은 색으로 표시했다. 사진25는 이완용(왼쪽)과 가쓰라 다로의 사진을 위쪽에 실었고, 사진26은 순종과 메이지 천황의 사진을 실었다.
조선과 일본을 붉은색으로 강조한 이유는 사진27과 사진28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두 엽서에 실린 지도는 조선을 ‘신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최장근 대구대 교수는 “강제병합이 일본의 영토 확장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사진28에 나오는 지도의 경우 신영토를 두만강 위쪽까지로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최 교수는 “1909년 간도협약을 통해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한 후에도 일본이 이 지역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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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9는 병합을 통해 확장되는 영토를 구체적인 수치로 명시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엽서는 병합 이후 늘어난 인구와 영토를 명시한 후 “독일 이상이 됐다”는 문구로 끝을 맺는다.
이처럼 일본이 만든 이른바 ‘한일병합 기념’ 엽서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일본의 조선병탄을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내용이다. 박한용 연구실장은 “엽서는 일본제국의 조선 통치 효과를 시각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라면서 “엽서가 당시 주요 통신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 선전의 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진 30은 중국, 일본을 여행한 어느 외국인 부부가 만든 사진첩의 표지 장식이다. 일본군이 난장이처럼 묘사된 조선인의 목에 줄을 걸어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31은 이 사진첩의 마지막 장이다. 정장을 차려입은 남녀가 손을 맞잡고 무대에서 퇴장하는 듯한 모양새로 인사를 하고 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다는 뜻이다. 오른쪽 하단에 적혀 있는 날짜가 1910년 7월 17일이다. 이들 부부의 눈에 비친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병합 이전부터 지배와 복속의 그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사진32는 미국 신문에 실린 카툰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지도에서 조선을 떼어내는 모습을 그렸다. 이토의 손에 의해 조선(COREA)이 지도상에서 사라지면서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갔음을 풍자한 것이다. 발행일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다만 내용으로 보아 을사늑약에서 강제병합 사이의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합방, 합병, 병합 | 이번에 공개된 엽서들은 대부분 ‘합방 기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일부 엽서에는 ‘일한병합 기념’ 또는 ‘일한합병 기념’이라고 표기돼 있다. ‘합방’이란 두 나라가 대등한 지위에서 서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켰다는 사실을 숨긴, 기만적인 표현이다. 그렇다면 ‘합병’과 ‘병합’은 무엇일까. 한철호 동국대 교수의 설명이다.
“‘병합’은 당시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 데쓰기치의 작품이다. 그가 1920년대에 남긴 <조선병합의 경위>라는 책을 보면, 그가 이 말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일단 합방은 조선의 입장에서 보든 일본의 입장에서 보든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합방은 대등한 조건에서 하는 것이므로 일본 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는 의미를 담을 수 없다.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집어삼킨다는 뜻의 ‘병탄’이지만, 이건 또 너무 노골적인 표현이다. 대안으로는 당시 널리 사용되던 ‘합병’이 있었지만, 이걸로는 약하다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그가 만들어낸 말이 바로 당시 거의 사용되지 않던 ‘병합’이다. 결국 ‘병합’이란 말은 일본이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한 것이므로, 우리는 병합이란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강제병합, 병탄, 경술국치 같은 표현이 본질에 부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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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수 소장은 20년 이상 역사자료 수집에 노력을 기울여온 자료수집가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극히 일부로, 그가 2000년 이후부터 일본인 소장자들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지난 2005년 서울옥션에서 일제강점기 기생들을 주제로 연 ‘기생전’에 소개된 엽서 400여장도 그의 소장품이다.
이 소장은 1945년 이전 발행된 엽서만 1000여장을 소장하고 있지만, 그의 소장 목록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서양에서 만들어진 한국 관련 고서들이다. 그 중 단일 주제로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는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으로 1653년 조선에 표착한 하멜과 관련된 자료들이다.
그가 역사자료 수집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학에 입학하던 1984년에 찾아왔다. 그해에 그는 우연히 익사할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물에서 나왔을 때 그의 뇌리를 스친 첫 이미지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노래한 제망매가였다. 그 후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과 찾아간 한 술집의 벽지가 고서에서 뜯어낸 종이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글과 문장을 숭상해왔다는 나라에서 이럴 수가 있는가라는 탄식이었다. 그때부터 고서적상을 드나들며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출발은 개인적인 이유에서였지만, 꾸준히 자료를 모으는 동안 이 소장의 지향점은 자료수집의 사회적 공공성을 향하게 됐다. 그는 사소한 생활용품 하나까지 모으는 일본인들의 기록문화를 거론하면서 “당시에는 흔해빠진 물건처럼 보이는 것들도 시간의 두께가 쌓이면 당대의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면서 “축적한 자료들은 언젠가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져야 한다”고 말했다.<위클리경향 888호, 10.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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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조선백성의 탈을 쓴 황국의 신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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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대한제국 고위관료들의 매국 행각… ㆍ귀족 작위 받고 부와 권력 누려
여기 가로 45㎝, 세로 30㎝ 크기의 대형 사진이 있다. ‘동경문우회’라는 단체가 강제병합 체결일자인 1910년 8월 29일에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동경문우회가 어떤 단체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최장근 대구대 교수는 “당시 일본 대륙팽창주의자들의 단체인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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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사진에는 모두 2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24명은 서양식 홀 안에 3층으로 배열된 자리에 앉아 있다. 인물사진은 실제 사진이지만 홀은 그려진 것이다. 사진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함께 나온 배치도(☞ 사진 참조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귀족회 부회장이 된 민영휘
인물 배치가 교묘하다. 메이지 천황을 정중앙에 두고 좌우 상하로 인물들이 도열해 앉아 있는 형태다. 사진 상단 제목을 보면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일한합방 기념사진’.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실력자들을 권력서열에 따라 배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일본인의 시선으로 구성한 일종의 가상 내각인 셈이다. 다만 이토 히로부미는 병합조약 체결 시점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지만 사진에 들어가 있다. 자료를 제공한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은 “병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진 속 일본인은 모두 15명이다. 메이지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한 나머지 일본인들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첫줄 왼쪽 첫번째)를 비롯,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이다. 관심사는 사진 속 조선인 9명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무슨 일을 했기에 ‘제국의 내각’에 포함되는 ‘영광’을 누린 것일까.
첫째줄부터 살펴보자. 메이지 천황 오른쪽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은 차례로 순종, 고종, 민영휘다. 배치도는 순종을 ‘전 한국 황제 창덕궁 이왕’, 고종을 ‘전 한국 황제 덕수궁 이태왕’, 민영휘를 ‘전 한국 중추원 고문’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대한제국은 병합조약 체결 이후 이미 사라졌으므로 ‘전’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민영휘(1852~1935)는 1901년 이름을 민영준에서 민영휘로 개명했다. 1877년 4월 별시에 합격해 1894년에는 병조판서로 임명됐다. 1905년 12월에는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1907년에는 궁내부 특진관으로서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양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9년에는 일본 천황가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조직된 신궁봉경회 고문에 추대됐다. 1910년에는 일진회의 ‘합병 성명서’에 찬성을 표명하고 합병 지지 여론 확산을 위해 조직된 국민동지찬성회 고문에 추대되는 동시에 이완용과 조중응 주도로 합방 찬성을 위해 조직된 정우회 총재가 됐다.
강제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의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1911년에는 작위를 받은 조선 귀족들이 천황의 ‘성은에 감읍’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해 조직한 조선 귀족회를 조직해 부회장이 됐다. 이후 1928년에는 쇼와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고, 1935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주는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둘째줄에는 이완용(메이지 천황 바로 아래, 전 한국 총리대신) 오른편으로 박제순(전 한국 내부대신), 조중응(전 한국 농상공부대신), 이근상(전 한국 궁내부대신), 이하영(전 한국 중추원고문)이 앉아 있다.
이완용(1858~1926)의 친일행각은 명확한 데다 짧은 지면에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다. 1910년 8월 22일 조선통감부에서 강제병합 조약에 조인한 인물이 바로 그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은 기본적으로 해당 인물의 공과를 모두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이완용의 경우는 친일행각이 대부분이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표제어 ‘이완용’은 6쪽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그는 1867년 흥선대원군의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됐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됐으나, 같은해 7월 외국에 많은 이권을 넘겨줬다는 이유로 협회에서 제명당했다. 1905년 11월에는 을사늑약에 찬성해 ‘을사5적’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1907년에는 내각 총리대신이 됐다. 같은 해 7월에는 고종의 양위를 주장하고 같은 달 24일에는 대한제국의 입법·행정·인사 등 내정권을 통감에게 넘겨주는 정미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강제병합 이후인 1910년 10월 1일에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고문이 됐다. 같은 달 7일에는 조선귀족령에 따라 백작 작위를 받았다. 그가 죽은 지 13년이 지난 1939년, 일본의 대륙낭인단체 흑룡회는 ‘일한합병’ 30주년 추도식을 열어 이용구, 송병준, 박영효 등과 함께 그를 합병 공로자로 선정했다.
을사오적·정미칠적·경술국적의 이완용 박제순(1858~1916)은 을사오적이자 경술국적이다. 1855년 별시에 급제했다. 1901년 의정부 찬정 겸 특명전권공사로 일본 정부의 의향을 엿보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 후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을 추진하자 반대입장을 표명했으나 결국 그해 11월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을사늑약을 체결해 을사오적으로 지탄받았다. 강제병합 당시에는 내부대신으로 병합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회의에 참석해 가결에 동조, 경술국적이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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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병합 직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돼 1916년 6월 사망할 때까지 6년 동안 매년 수당을 받았다. 1910년 10월 7일에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 같은 달 23일부터 11월 16일까지 조선총독부의 비용으로 일본을 다녀와 11월 18일자 <매일신보>에 “천황 폐하로부터 박애인자한 내지 동포의 지도에 의해 장족의 발전”을 소망한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1915년에는 다이쇼 천황 즉위 대례식에 참석해 “직접 거룩한 시대를 만나 성대한 의식을 올리는 것을 보게 되었는 바, 하늘을 바라보고 성인을 우러르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립니다”라는 글을 지어 바쳤다.
조중응(1860~1919)은 1890년 조중협에서 조중응으로 개명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10여년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정치와 법률을 공부했다. 법부대신으로 있던 1907년 7월에는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교수형과 종신형 등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상주(임금에게 아룀)했다.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서 정미조약 체결에 참여해 정미칠적으로 지탄받았다. 1907년에는 일본 황태자의 한국 시찰을 환영하기 위해 조직된 신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0년에는 이완용과 함께 병합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된 정우회 경비를 지원했다. 1910년 8월 16일에는 농상공대신 신분으로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방문해 ‘합병조약안’과 ‘합병각서’에 대한 찬성의사를 표명했다. 같은 달 22일 어전회의에 참석해 합병조약을 가결해 경술국적으로 지탄받았다.
병합 후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8월 29일자 <매일신보>에 ‘병합 1주년 기념 감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는 병합 후 1년이 무사히 지나간 것은 천황의 은덕이라면서 조선이 병합 후 일본의 동생이자 아들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1915년 11월에는 다이쇼 천황 즉위대례식에 참석해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그의 매국 행각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보기에도 과도한 것이었다. <매일신보>는 그가 사망한 다음날 신문 사설에서 “매국적(매국을 한 역적)” “경조부박의 수괴” 같은 표현을 사용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조중응 병합 후 중추원 고문 자작 작위
이근상(1876~1920)은 세 형제가 모두 친일행위를 했다. 큰형 이근호는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둘째형 이근택은 을사오적이다. 을사늑약 이후 궁내부 특진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다. 이근상은 1905년 남산 왜장대에서 러일전쟁 해전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열린 축첩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06년에는 친일관료와 일본인 관료들의 사교단체인 대동구락부 위원이 됐다. 강제병합 후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2년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에는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에 참여해 역사왜곡에 가담했다. 1918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전국 6개 농공은행을 통합해 창립한 조선식산은행 감사에 임명돼 죽을 때까지 재임했다. 1920년 사망한 그의 작위는 양자 이장훈이 물려받았다.
이하영(1858~1929)은 부산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제중원에서 미국인 의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관직생활도 미국인의 추천으로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7년에는 미국 주재 공사관 서기관을 지냈고 1896년에는 일본 주재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됐다. 1904년 4월부터 1905년 9월까지 외부대신으로 재임하면서 일본에 각종 이권을 넘겨줬다. 1907년 10월에는 일본 황태자의 한국 방문을 환영하는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1909년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하는 송덕비를 건립하기 위해 만들어진 송덕비건의소에서 수금위원을 지냈다. 강제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5년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도 참석했고, 1928년에는 쇼와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셋째줄에는 조선 사람이 한 명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이재곤(1859~1943))이다. 이재곤은 1907년 이완용 내각에서 학부대신을 맡아 고종 강제 퇴위에 앞장섰다. 정미조약 체결에 동조한 정미7적 중 한 명이다. 1909년 1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이등박문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동대문 밖에서 추도회를 개최했다. 강제병합 직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에는 <매일신보>에 “손을 모아 하늘(천황)을 기리고 축원한다”는 내용의 합병기념 축사를 썼다. 1937년 8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개전 직후 조선총독부 주최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다. 이 시국간담회는 새로운 시국에 맞추어 정신무장을 새롭게 하자는 취지로 열린 행사였다.1939년에는 조선유도연합회 고문에 추대됐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전국 유림단체를 연합해 전쟁을 위한 정신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다.
사진 속 조선인 권력자들은 대개 비슷한 경로를 걸었다. 강제병합 전부터 충실한 친일의 행로를 걸었고, 병합 후에는 일본이 하사한 귀족 작위를 받고 돈과 명예를 거머쥐었다. 이들이 생전에 누린 부와 권력은 그들 개인에게는 ‘영광’이었을 테지만, 우리 역사에는 커다란 치욕으로 남았다.<위클리경향 888호, 10.08.17>
참고자료 : <친일인명사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편,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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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조선 근대화’ 보도는 일본의 왜곡
ㆍ1910년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 ‘제국적 논리’ 일방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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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이 이번에 「Weekly경향」을 통해 공개한 자료 중에는 조선병합을 선전하는 영국의 한 주간지 화보기사도 있다. 이 기사는 ‘일본이 합병한 부유한 땅: 조선의 자원, 식민지에 새로운 주인이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 아래 부존자원을 표시한 한반도 지도를 가운데 뒀다. 양쪽에는 ‘구 조선(old korea)’과 ‘일본에 의해 병합된 신 조선(New Korea)’을 대비시켜 보여주는 형식이다.(그림1) 기사를 게재한 잡지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10년 9월 3일자다. 한일병합 또는 경술국치가 이뤄진 것이 이 해 8월 29일이니 늑약(勒約) 5일 후 발행된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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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일본의 조선 병합을 알리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10년 9월 3일자 기사. 한일병합 5일 만에 일본 측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반영한 기사다.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 제공
병합 5일 뒤 일본측 입장 일방 전달 우선 궁금한 점. 왜 일본의 잡지가 아닌 영국의 잡지가 일방적으로 일본 측 입장을 반영한 기사를 실었을까. 병합을 기준으로 신구를 나누는 잡지의 시각은 정당할까. 일단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국제적으로 꽤 유명한 잡지다. 인터넷 백과서전 위키피디아에 게재된 정보에 따르면 이 잡지는 세계 최초의 화보잡지다. 1842년에 창간되어 197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전에도 국내 학계에서 이 잡지에 실린 기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2004년 중앙일보는 러일전쟁 당시 이 잡지에 실린 조선에 관한 기사를 보도했다. 1904년 1월 기사다. 이번에 나온 이 잡지의 1910년 보도기사는 최초공개다. 이 기사가 일본의 합병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은 기사의 부제에서도 드러난다. “…세계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수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당시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은 상태였는데, 당시 동아시아정책의 경우 서로 이해가 일치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역시 제국주의 국가로서 영국이 조선반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지적이다.
이 기사가 일방적으로 일본 측 시각을 취하고 있다는 점은 이 소장이 제공한 또 하나의 자료(그림2)에서도 추론이 가능하다. 신문 사이에 끼워 배포한 전단으로 추정되는 이 이미지는 한·일 양국의 대신이 한반도 지도를 두고 ‘조약’을 맺는 그림을 가운데 두고 철도 부설, 경작, 군대 양성, 교육 등이 이뤄지는 삽화가 배경에 깔려 있다. 자료를 공개한 이 소장은 “일본인들에게 한국이 무진장한 기회의 땅이라는 것을 선전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전단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제작된 연대는 메이지 40년이라는 문구로 미뤄볼 때 사법 및 내치권 관련 정미 7조약이 체결된 1907년께로 보인다. 1907년 일본에서 배포된 전단과 1910년 영국 화보잡지에 실린 기사에 담긴 내용이 거의 유사한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한편 위의 기사에 게재된 지도에는 한반도에서 어떤 ‘이익’을 취할 수 있는지 세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주 항목은 담배, 인삼, 소금, 석탄, 구리, 철, 목재 등이다. 실제 당시 조선에 이런 자원이 풍부했던 것은 맞을까. 김성보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한말에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이권 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이런 자원에 주목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날조한 자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하지만 당시 한국이 정말 탐나는 자원이 풍부한 나라였다면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일본이 병탄하는 것을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07년 일본 전단과 같은 논리 담고 있어 김 교수에 따르면 석탄이나 철광석, 금과 같은 주목할 만한 자원은 현재 남쪽보다는 북쪽 지역에 더 많았다. 오히려 병탄 이후에 일본이 체계적 조사를 하면서 자원을 수탈할 여력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만주나 이북지역에 연관되는 산업시설을 건설했다. 반면 남쪽은 2차세계대전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의 식량기지, 즉 산미증산계획의 무대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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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1907년 일본에서 배포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일병합 선전 내용을 담고 있는 전단. 일본인들에게 한국을 무진장한 기회의 땅으로 선전하고 있다. |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 제공
잡지의 기사를 계속 살펴보도록 하자. 기사는 조선반도의 지도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낡은 조선’의 풍경을, 오른쪽에는 한일병합 이후의 새로운 조선의 풍경을 담은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사진 설명은 이런 식이다. “구 조선은 죄수들을 원시적인 ‘새장’ 같은 감옥에 가뒀다. 이제 서울에서 이런 감옥은 사용되지 않는다.” “구 조선에서 열렸던 공개재판. 일본은 이런 형태의 재판을 없앴다.” “촌락의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일제가 도입한 근대 재판 제도와 ‘보통교육’을 고을 수령 주재의 전통적인 재판과 서당교육에 대비시켜 놓았다. 이기훈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영국이 인도를 문명화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이 조선을 문명화할 것이라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적 관점”이라고 말했다. 문명과 야만, 진보와 후퇴 또는 안정과 혼돈, 발전과 정체 식의 이분법적인 담론으로 과거와 현재를 구획하는 이분법적 역사인식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이 기사뿐 아니라 1910년대에 문화담론이나 정책 자체가 ‘일본이 조선을 문명화시켰다’는 관점을 투영해 만들어진 것이다. 단적인 예가 1915년 9월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다. 공진회가 열리면서 일제는 ‘구정(舊政)’의 상징인 경복궁의 건물들을 한꺼번에 헐었다.
문명과 비문명 이분법 설득력 있나 실제 일본이 한국의 사법이나 교육제도를 근대화시킨 것은 맞을까.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실의 도시환 연구위원(법학 박사)은 “조선에 근대적 재판제도가 도입된 시점은 갑오경장(1894) 개혁안에 입각해 1895년 3월 25일 ‘재판소 구성법’이 제정되면서부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등장한 일제의 통감부가 1907년 재판소 구성법을 새로 제정해 1심을 구 재판소와 지방 재판소가 맡고, 2심과 3심을 공소원과 대심원에서 맡게 한 후 다시 1909년 한국의 사법권과 감옥사무처리권을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기유각서를 체결한 후 3심격인 대심원의 이름을 고등법원으로 변경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최고재판소의 격을 일본 최고재판소인 대심원보다 하위에 두었다”고 말했다.
근대교육 역시 사정은 엇비슷하다. 조선에서 근대교육의 시작은 1883년 원산 상인이 세운 원산학사로 본다. 역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 교육입국조서가 반포되었고, 1905년까지 각급 관립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교육이 민족운동적 성격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1907년 학부관제를 개정·공포하고 학무국에 사립학교의 담당부서를 신설한 뒤, 1908년 8월 26일 ‘사립학교령’을 공포해 조선교육을 통제하는 체제를 갖췄다. 도 위원은 “결국 일본이 도입했다고 주장하는 근대 사법·교육 시스템은 한국 스스로 개화에 따라 자발적이고 자생적으로 발생한 해당 제도를 억누르고, 강제병합을 통한 일제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제도의 정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일제 시기에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근대적 교육시스템이 정비되고 대중교육이 확산된 것은 사실이 아닐까. 이기훈 교수는 “역사적 평가에서는 계량화가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최근 1920~30년대 보통학교로 대표되는 일제의 교육시스템이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을 고찰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일본에서 내놓은 공식통계만 보면 조선에서 1910년대 보통학교 즉 초등교육기관의 숫자는 몇 개 없다가 1920년대와 30년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며 “하지만 이 통계숫자에는 실제 지역사회 공동체에서 교육이 진행되고 있지만 보통학교로 인가받지 못한 일체의 학교 숫자가 빠져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계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위클리경향 888호, 10.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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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조선은 범죄적인 시대의 희생양”
ㆍ‘강제병합 100년 한·일시민대회’ 준비중인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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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사람들은 요즘 눈앞에 다가온 ‘강제병합 100년 한·일시민대회’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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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시민대회는 8월22일부터 29일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치러진다. 8월22일에는 개막식 행사로 일본 도쿄 도시마 공회당에서 한·일시민공동선언 일본 대회가 열린다. 8월27~29일에는 성균관대학교 600주년기념관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에서의 행사가 시작된다. 한·일시민대회는 8월29일 서울에서 한·일시민공동선언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한·일시민대회의 대원칙은 ‘식민주의 종식을 통한 동아시아 평화 실현’이다. 두 나라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식민주의 종식을 선언하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난 3일 오후 1시 한·일시민공동행동 한국 실행위원회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을 만났다. 박 연구실장은 약속시간보다 2시간 늦게 민족문제연구실에 도착했다. 그는 한·일시민대회의 일환으로 8월12일부터 9월30일까지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시회 도록을 준비하느라 전날 밤을 꼬박 새우고 오전 7시에 잠들었다고 했다.
특별전시회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구성되나. “전시회 이름이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이다. 일제강점기 유물 및 개인소장품 400여점과 당시 사진, 회화, 공예, 서예작품 50여점을 전시한다. 강제병합에 이르는 과정과 식민지배의 실상을 사진, 엽서, 우표 등 생활과 밀접한 자료를 통해 식민지에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병합조약을 지칭하는 여러 가지 용어들이 있다. 어떤 용어를 쓰는 게 맞나. “일단 합방이라는 말은 절대 쓰면 안 된다. 합방이란 일본이 침략의 명분으로 삼았던 대동합방론에서 나온 말로, 두 나라가 대등하게 통합했다는 의미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됐는데 합방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역사적인 사실을 고려하면 병합조약이 체결됐기 때문에 병합이라고 할 수도 있다. 병합이라고 쓰는 경우에도 문제는 있다. 어떤 이들은 병합조약 자체가 무효이기 때문에 병합도 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강제로 병합됨으로써 식민지가 되었다는 의미로 ‘병탄’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이라고 해도 된다. 강점이라고 하면 병합조약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므로, 배상을 요구할 근거가 된다. 학계에서 정리된 용어는 없다.”
병합조약 체결 100년의 역사적 의의를 현재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100년 전 우리의 근대는 식민지로부터 시작했다. 자주적 근대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식민지라는 고통의 체험을 하면서 근대를 경험했다. 먼저 조선이 왜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내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소수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데만 골몰했다. 하지만 내적 반성과 동시에 시대적인 상황 또한 고려해야 한다. 당시 세계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조선은 힘이 곧 정의가 되는 범죄적인 시대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강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킨다.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가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와 민족 내부의 반성을 바탕으로 화해와 미래를 이야기해야 한다. 국치일은 치욕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씻는 날이 돼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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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발표된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은 병합조약의 불법성을 강조하며 일본 총리가 성명의 취지를 반영한 담화문을 발표할 것을 촉구했다. 어떻게 보나.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 총리의 반성이 담긴 담화문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반성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 이미 일본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침략전쟁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그 뒤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나? 한국인 군인·군속 피해자들이 재판에서 이겼나? 선언이 아니라 책임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일본이 식민지배의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내놔야 한다.”
한·일시민대회의 대원칙으로 ‘식민주의 종식을 통한 동아시아 평화실현’을 내세웠다. 어떤 의미인가. “병합조약은 목적 자체는 물론이고 절차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조약이다. 문제는 그때 식민지가 된 나라가 조선만이 아니었다는 거다. 조선은 절차상 문제가 있으니 무효라 치자.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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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다면 절차상 문제가 없는 식민지면 괜찮은 건가. 근본적으로 식민지를 만드는 것 자체를 범죄로 봐야 한다. 노예 소유가 합법적이었다고 정당한 것은 아니지 않나. 식민지는 사라졌더라도 식민주의 자체는 아직 남아 있다. 식민주의 자체를 청산해야 한다.”
동아시아 평화 실현도 같은 맥락인가. “동아시아는 지리적·문화적으로 인접해 있다. 그런데도 왜 지역협력체가 없나.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는 20세기 초 역사적 갈등을 겪으면서 파인 골이 그대로 남아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에 20세기는 기억을 둘러싼 역사전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식민주의 청산이야말로 동아시아 평화 협력의 출발점이다. 한·일시민공동선언은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 식민주의의 범죄성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청산되지 않은 현안들의 해결방안과 정부의 행동계획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을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이 선언을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서구 제국이 자행한 노예제와 식민지배를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한 ‘더반 선언’과 같은 국제적 선언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한·일시민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일단 일본과 공동협력기구를 만들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일본 시민사회단체는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있다. 이들을 하나의 행동기구로 묶어내는 데만 6개월 이상 걸렸다. 다른 하나는 한국 정부다. 국치 100년을 맞아 시민사회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지만 정부는 정작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정부는 화해를 통해 미래로 가자고 하는데, 피해자가 먼저 화해를 얘기한다는 것은 무리다. 한·일시민대회에는 정부 공식예산이 거의 없다. 정부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쓰는 예산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일제강점 문제에 대해 정부가 너무 무관심한 것 아닌가.”<위클리경향 888호, 10.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