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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km를 자전거로 달리며 되새긴 ‘미안해요,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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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연구소 이규봉 대전지부장(배재대 교수)은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을 알리고 베트남 민중들에게 사죄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3년 여의 준비 끝에 ‘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자전거 일주를 진행했다. 2010년 1월 20일부터 2월 8일까지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총 1798km(하루 평균 112km)를 자전거로 종단한 고난의 긴 여행기다. – 편집자 주 –


이규봉 대전지부장


베트남은 우리가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자유민주주의국가 월남과 공산국가 월맹이라는 분단국 사이의 내전에서 1975년 월맹이 승리하여 공산국가로 통일된 나라이다. 정식 명칭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ocial-
ist Republic of Viet Nam)으로서 1986년 도이 머이(Doi Moi, 쇄신)정책을 채택한 이후 시장 경제를 도입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동남아시아반도의 동쪽 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베트남은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쯔엉 썬(Truong Son) 산맥을 경계로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국경을 이루고 동쪽은 남중국해와 접해있다. 면적은 약 33만 평방킬로미터로 한반도의 1.5배에 달한다. 남북의 직선길이는 한반도의 두 배쯤 되는 1650km이고 동서의 가장 좁은 폭은 약 48km 정도 되는 S자형의 매우 기다란 나라이다. 우리나라 서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시차는 우리보다 2시간이 늦다.


국토의 73%가 산악지대이고, 평야 지대는 중국 윈난성에서 발원하는 북부의 홍 강 삼각주와 티베트에서 발원하는 남부의 메콩 강 삼각주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홍 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를 박 끼(Bac Ky 또는 박 보), 메콩 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를 남 끼 (Nam Ky 또는 남 보) 그리고 하이반 고개(Hai Van Pass)를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의 중부를 쭝 끼(Trung Ky 또는 쭝 보)라 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프랑스가 점령하면서 이 지역을 각각 통킹(Tongking), 안남(Annam), 코친차이나(Cochinchina)로 이름 지어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북부의 중심도시는 하노이(Hanoi)이고 중부의 중심도시는 옛 황도였던 후에(Hue)와 지금의 다낭(Danang)과 나짱(Nha Trang), 그리고 남부의 중심도시는 과거 사이공으로 불렀던 현재의 호치민(Ho Chi Minh)이다.


베트남은 다민족사회로 비엣족(Viet), 일명 낀족(Kinh)이 80%에 달하고 주로 평지에 산다. 소수민족으로는 참족, 크메르족 그리고 중국인 화교가 주로 평지에 살며 다른 소수민족은 대부분 산지에 거주한다. 전체 인구는 8300만(2005년 통계)이 넘어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한 인구보다 많다. 전체 인구의 약 60%가 불교 그리고 20% 정도가 천주교를 믿고 있으나 대부분이 조상을 숭배하고 있다. 주식은 쌀이며 쌀로 만든 퍼(Pho) 또는 분(Bun)이라는 국수를 우리가 매끼 밥을 먹듯이 먹는다. 전압은 우리와 같은 220V를 사용하고 있어 여행에 편리하다.


베트남 언어에는 중국어와 같은 성조가 6개나 있다. 20세기 초까지는 중국의 한자를 문자로 사용하면서 우리나라의 이두와 같이 중국의 한자에서 음을 빌려 만든 ‘쯔놈(Chu Nom)’을 함께 사용하였다. 1651년 프랑스의 드 로드(Alexander de Rhodes) 신부가 로마자를 이용해 오늘날과 같은 베트남 문자를 만들었다. 1906년 프랑스 식민당국은 한자문화를 프랑스어 문화로 바꾸어 식민지 관료제도를 수립하기 위하여 새로운 문자를 ‘꾸옥 응으(Quoc Ngu)’라 부르고 중등학교에서 강제로 교육시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 결과 현재 베트남 국민의 문자해독률은 주변 국가에 비해 매우 높다.


거짓된 세뇌 교육


베트남하면 어렸을 적 태극기 휘날리며 역으로 환송하러 나간 것과 위문편지 쓴 것이 떠오른다. 물론 아무런 개념도 없던 그 때 모두 학교에서 억지로 시켜 한 일이었다. 정부는 “월남이 공산화되면 주변 국가가 차례로 공산화된다.”는 지금 생각하면 엉터리 같은 도미노이론과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월남을 공산화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미국과 월남이 요청하여 우리 군대를 파병한다.”는 거짓된 이유를 일방적으로 세뇌시켜, 지금도 그 생각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지금도 나와 같은 세대 이상은 대부분 그렇게 알고 파병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남의 나라 전투에 군대를 파견하여 인명을 살상한 것에 대하여 전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고 있다.


내가 대학에 막 입학한 1975년, 월남이 패망하자 우리 정부는 이를 기화로 반공을 부르짖으며 마치 북한이 쳐들어올 것 같은 공포 분위기를 만들면서 군사 독재를 강화하여 정권을 이어갔다. 그때로부터 35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을 것 같던 베트남은 항상 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일본 시민단체도 나서는데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을 하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군 위안부 문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었던 시기에 이 문제를 불러일으킨 주체가 한국이라기보다는 일본 시민단체였고, 그들의 노력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베트남이란 나라가 생각났다. 일본이 우리에게 가해자였다면 우리도 베트남에게 가해자가 아닌가? 일본인 스스로 그들의 과오를 들추고 있는데 우리도 우리 스스로 베트남에 저지른 과오를 들추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들이 비록 요구를 하지 않을지라도……


베트남에서 우리 군대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벌은 수입으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가 일제강점기시대에 입은 피해에 대해 일본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처럼 베트남도 우리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일본 시민단체가 나서서 자신들의 아픈 과거를 알리듯이 우리도 먼저 나서서 과거를 반성하고 피해보상을 해야 하지 않은가? 아픈 과거를 감추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바로 알고 맺힌 아픔을 풀어야 진정 함께 협력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베트남에 대하여 다양하게 공부하였다. 공부하면 할수록 그 진상을 자세히 알게 되고 그럴수록 우리가 베트남에 저지른 참상에 그리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심지어 정당화하는 우리 정부와 사회에 대하여 나는 몸서리가 쳐졌다. 일본정부가 하는 짓이나 우리가 하는 짓이나 다를 바 없었다.


미안해요, 베트남!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나는 우리 군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을 우리나라 사람에게 알리고 미안함을 나누기 위해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자전거로 종단하는 고난의 긴 여행을 하고자 했다. 예전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사와 베트남의 희생자를 돕는 단체가 결성되었던 것이 기억이 나서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인터넷을 뒤져 ‘나와우리’라는 시민단체를 알게 되었다. 마침 ‘나와우리’에서 2009년 여름에 있을 평화캠프를 위해 4월에 사전 현장 답사를 간다고 하기에 피해현장을 직접 가보고 싶었고 피해자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함께하였다.


가장 피해가 많은 중부지역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그곳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증오비’와 ‘위령비’를 직접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이곳으로 행군을 해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 중략 –


처음 베트남에 관하여 생각한 지 3년여의 망설임과 준비 끝에 모든 계획을 수립하였다. 혼자 여행할 생각이었으나 뜻밖에 함께 가겠다는 동료를 만났다. 제주지부 이영권 선생을 포함하여 대전의 대학 교수 둘과 함께 모두 넷이서 여행하였다.


2010년 1월 20일 출발하여 2월 8일 귀국할 때까지 그 사이 16일간 매일 평균 112km씩 모두 1798km를 달렸다. ‘미안해요, 베트남!’을 항상 생각하며……







▲ 맨 왼쪽 이영권 선생, 나와우리(가운데), 필자는 맨 오른쪽


기내에 5시간 동안 감금당하다


대전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내내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공항 역시 이러한 안개가 끼었을 텐데 이런 날씨에 비행기가 제대로 이륙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수속은 잘 진행되었고 이륙이 늦어진다는 자막이나 어떠한 방송도 없었다.


이륙시간이 지나도 비행기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별 안내방송도 없다. 조금 기다리면 되겠지 했으나 시간은 마구 지나간다. 어느덧 점심때가 다가오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불만 소리가 들린다. 기내식이 나온다. 지상에 착륙하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을 먹기는 처음이다. 정시에 이륙했으면 도착할 즈음인 5시간이 지나서야 움직인다. 기다림에 지친 승객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그러나 창밖으로 보는 기상상태는 5시간 전하고 비교할 때 별로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차라리 출발을 연기한다고 방송한 후 탑승시켰다면 이렇게 좁은 비행기 안에서 5시간이나 감금되어 있을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지 


하노이에 도착하니 어두컴컴하였고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자전거의 부피가 커서 짐칸이 있는 택시 두 대가 필요했다. 공항서 시내까지 꽤 시간이 걸렸고 요금은 정액제였다. 택시기사가 한국어를 조금하였다.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보니 한국에서 3년간 연수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오후 일정에 있던 호치민박물관 관람은 수포로 돌아갔다. 잘 알진 못했지만 같은 대전환경운동연합 회원인 김 변호사를 만나 호엔끼엠(Hoan Kiem)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하였다. 그는 떠나는 우리를 걱정하며 한 마디 보탰다.


“1번 국도를 가다 보면 가끔 거적을 덮어 놓은 것이 있는데 교통사고로 죽은 시신이다.”


이 말을 듣고 가뜩이나 1번 국도가 위험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우리 일행은 조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지…… 







▲ 하노이 호텔 입구에서 김 변호사(가운데)와 함께


























아! 이놈의 건망증, 배낭을 길에 두고 오다


7시쯤 출발에 나서니 어제 내리던 보슬비는 더욱 굵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도로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자전거가 잔뜩 뒤엉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속을 가까스로 뚫고 1번 국도로 들어섰다. 1번 국도 역시 출근하는 인파들로 뒤덮여있으며 밤새 내린 비로 도로엔 물이 고여 있어 도로 표면이 보이지않았다. 위험을 감수하며 정신없이 물을 헤치며 달렸다.


한 시간 쯤 달려 하노이 시내를 빠져 나왔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아직 문을 열지 않는 가게 처마 밑에 쉬었다. 모두 물속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흠뻑 젖어 있고 자전거도 엉망이 되었다. 잠시 쉬고는 다시 달렸다. 한참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등이 허전함을 느꼈다. 그 순간 바로 자전거를 돌려 온 길을 향해 다시 돌아갔다. 잠시 쉴 때 배낭을 잊고 두고 온 것이다. 가끔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또 다시 그 건망증이 도진 것이다. 배낭에는 여권을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뒤따라오던 사람이 가져오겠지 했으나 그들도 남겨진 배낭을 보지 못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전 속력으로 달렸다. 한참을 달려도 쉬었던 장소가 나타나지 않는다. 혹시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쉴 때눈여겨보았던 주변 장소가 멀리 눈에 들어온다. 거기엔 노란색이 선명한 내 배낭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순간 기쁨과 함께 다리에 쥐가 났다. 넘어질듯 말듯 경색된 다리를 뻗으며 내려섰다.


닫혀 있었던 가게 문은 열려 있고 누군가 가방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무어라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 내 지갑과 휴대전화를 갖고 나온다. 지갑을 열고 속에 있는 돈을 보여주면서 지갑과 휴대전화를 나에게 준다. 지갑에서 없어진 것은 없었다. 배낭을 보니 배낭을 연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아직도 의문이다. 어떻게 지갑과 휴대전화가 배낭 밖으로 나와 있었는지……


무어라 말하는데 몸짓을 보니 누가 가져갈까봐 지켜보고 있었다는 같다. 너무 고마워 한국서 환전해온 100만동(한국 돈 7만원 정도)을 모두 주었다. 그는 내 지갑 안의 만원권을 갖고 싶다는 표현을 하기에 만원을 꺼내 주었더니 아주 좋아했다.


되돌아가는 동안 맥이 완전히 풀렸다. 확인해 보니 10여 km를 전속력으로 달렸던 것이다. 장거리여행을 할때는 무릎에 힘을 가능한 주지 않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서는 안 된다. 아니나 다를까 한 쪽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제 막 여행을 시작했는데 벌써 무릎 통증이 오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새옹지마


비가 와서 속도는 떨어지고, 두고 온 배낭을 찾기 위해 시간이 지체되고, 펑크도 자주 나서 계속 늦어졌다. 결국 계획에 없던 야간주행을 하게 되었다. 어두운 밤 빗속을 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숙소를 찾기 위해 타인 호아(Thanh Hoa)까지는 가야했다.


타인 호아성의 타인 호아에 다다르니 고가도로가 나왔다. 양쪽 무릎이 너무도  아파 경사가 완만함에도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고가도로 아래로 가는 길도 있을 것 같아 들어섰으나 잘못된 길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되돌아 나오다 보니 ‘나응이(nha nghi 민박, 여관)’라는 간판 불빛이 보였다.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이럴 때 ‘새옹지마’라는 표현을 쓰지…


첫날이 가장 긴 여행으로 원래 계획은 150km 정도였다. 그러나 두고 온 배낭을 찾기 위해 되돌아갔다 온 것까지 합하니 170km가 되었다. 하루에 그것도 빗속을 170km나 달린다는 것은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매우 무리한 일이었다. 한쪽 무릎의 통증이 양쪽 모두로 퍼졌다. 3층에 있는 방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명나라를 물리친 레 왕조의 시조 레 러이 황제


비에 젖은 옷과 신발은 아침이 되어도 마르지 않았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 보았자 또 젖을 것이 뻔해서 축축한 옷과 신발을 다시 걸쳤다. 그 찜찜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조금 달리고 나니 그러한 느낌이 모두 가셔졌다.


인파를 따라 타인 호아 도심으로 들어가니 넓은 공원이 나오고 가운데 큰 동상이 서있다. 베트남 사람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레 러이(Le Loi) 황제이다.







▲ 명나라를 물리친 레 왕조의 시조 레 러이 황제


공원 근처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니 이른 아침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아침과 함께 베트남 커피를 주문했다. 베트남 커피는 연유를 담고 있는 잔 위에 작은 구멍이 촘촘히 뚫린 조그마한 컵을 올려놓고 커피 가루를 그 속에 넣은 후 뜨거운 물을 부우면 아래에 떨어진다. 이것을 섞어서 얼음이 담긴 유리잔에 부어 냉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데 맛과 향이 아주 좋다. 일부 까페에선 이 커피를 화이트 커피(white coffee)라 적어 놓았다. 베트남에서 커피를 많이 생산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듯 전국 곳곳에 까페가 매우 많이 보인다.


패트병 조각으로 찢어진 타이어 응급조치


어제와 오늘에 걸쳐 펑크가 자주 낳다. 튜브를 갈기 위해 바퀴를 뺄라치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기 일처럼 봐주려한다. 간섭이 지나치다 할까 아니면 정이 많다고 할까? 아무튼 그들은 자전거와 오토바이 정비에 대해서는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 고쳐주려고 애를 쓰는 베트남 사람


한 번은 타이어 옆면이 찢어져 고민하고 있을 때 보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자기 집에서 타이어를 갖고 와 대본다. 크기가 다르자 자기의 오토바이에 우리 바퀴를 싣고 어디론가 갔다. 잠시 후 다시 오더니 크기가 맞는 타이어가 없었는지 그냥 갖고 왔다. 훼손된 타이어가 뒷바퀴에 있던 것을 알고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앞 타이어와 뒷 타이어를 바꾸라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앞바퀴보다 뒷바퀴에 하중에 더 많이 걸리므로 훼손된 타이어를 앞바퀴로 옮긴 것이다.


튜브가 타이어 밖으로 튀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비닐을 이용해 튜브를 감싸고 임시방편으로 수리를 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튜브가 타이어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 때 번득이는 생각! 버려진 패트병을 잘라 찢어진 타이어 안에 대고 튜브를 넣었다. 효과 만점이었다.


아픈 다리로 인해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응에안(Nghe An)성의 디엔 차우(Dien Chau)에서 멈추었다. 제법 큰 마을이었다. 작고 깨끗한 호텔을 찾아 들어서니 또 비가 오기 시작했다.


기도소리와 수탉 울음소리 그리고 개 짖는 소리의 화음


잠결에 종소리와 기도소리가 들려 잠이 깼다. 밖에 나와 보니 비가 제법 굵게 내린다. 시간은 새벽 4시쯤 되었다. 바로 호텔 뒤에 있는 성당에서 종소리와 함께 기도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다. 천주교에서 하루 세 번하는 삼종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예전에는 근처 성당에서 새벽 6시와 12시 그리고 저녁 6시이면 성당 종을 울리고 삼종기도 하는 것을 많이 봤기에 그 추억에 잠시 잠겼다.


성경을 읽는 소리인지 기도소리인지 처음엔 은은히 들리는 것이 옛 기억을 살리는 것처럼 운치 있었으나 문제는 그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새벽의 수탉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질세라 동네 개들도 함께 짖어댄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기도소리와 수탉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가 어울려 환상적인 화음이 울려 퍼진다. 완전히 잠을 설쳤다. 기도 소리는 한 시간이 넘어서야 그쳤다.


자전거와 짐을 맡기고 호치민 생가로


응에안성의 성도 빈(Vinh)에 도착하였다. 빈에서 서쪽으로 20km 지점에 호치민 생가가 있다. 거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여건은 전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베트남까지 와서 위대한 영웅 호치민의 생가를 가보지 않는 것도 매우 후회할 만한 일이었다.


택시를 타고 가면 되지만 문제는 자전거와 짐이었다. 궁리하다 보니 자전거 가게가 보인다. 찢어진 타이어도 갈아야 되므로 들렸더니 마침 주인이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우리는 그 가게에 자전거와 짐을 맡기고 불러준 택시를 타고 생가가 있는 캄 리엔(Cam Lien)으로 갔다.


생가는 매우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호치민이 나고 자란 외가로 초가집이 몇 채 있고 아주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호치민은 몸과 마음을 모두 조국 베트남의 통일에 헌신한 세계적인 지도자이다. 전쟁 중에 사망하지만 그가 남긴 “당과 인민의 단결”은 결국 베트남을 통일에 이르게 한다.







▲ 매우 소박하게 꾸며진 호치민 생가


자전거 주차비를 내다


도로가에 근사한 식당이 있어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식당 앞에서 자전거에 내리니 마치 주차 편의를 봐주는 사람이 오는 것처럼 한 젊은이가 다가온다. 식당 벽에 주차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식당에서 나온 줄 알고 식당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려다 안에서 보이길래 바깥벽에 기대 놓았다. 그런데 웬 번호가 적힌 딱지를 준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이들이 주차비를 달라고 한다. 그것도 한 대당 2만동씩 8만동을. 8만동이면 식당에서 먹는 맥주가 8병 값이다. 하도 어이없었으나 젊은 것들이 그래도 돈 좀 벌겠다고 나선 것 같아 반을 깍아 4만동을 주었다. 반 강제적이었으나 아무튼 생전 처음으로 자전거 주차비를 냈다.


손빨래하는 세탁 서비스


하틴(Ha Tinh)과 꽝빈(Quang Binh)성의 성도 동호이(Dong Hoi)를 지나 17도선 군사분계선에 이르니 매우 커다란 기념탑 같은 건물이 있고 베트남 국기가 높이 솟아 있다. 도로 건너편에는 옛 모습의 집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각 방에는 전쟁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 벤허이(Ben Hai) 강이 흐르고 강물 위로 미군의 폭격에 의해서 여러 번 끊긴 히에르엉(Hien Luong 다리가 놓여있다.







▲ 벤허이 강과 히에르엉 다리, 멀리 기념조각상이 보인다.


동하(Dongha) 전 7km 지점에서 점심을 하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 오늘 머무를 도시는 거의 다 왔고 시간은 충분해 비 그치기를 오래 기다렸으나 영 그칠 기색이 없다. 비에 젖은 채로 호텔로 들어섰다. 일찍 도착해서 다행히 세탁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세탁기에 돌릴 줄 알았으나 전부 손빨래하는 것을 보았다. 아직 세탁기가 보급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건조기도 없다. 다음 날 세탁물을 받았을 때 조금 눅눅했지만 그래도 말리려고 애쓴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경쟁하듯 울려대는 경음기 소리


베트남의 소음은 대단하다. 거리에서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경음기를 울려댄다. 처음엔 적응하기 매우 어려웠으나 경음기 소리가 나를 보호해준다는 생각을 하니 참을 만했다. 뒤에서나 앞에서나 경음기가 울리면 갓길로 내려간다. 자동차는 우릴 보호하듯이 간격을 두고 옆으로 비켜간다.


1번 국도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는 물론이고 우마차를 포함해 온갖 교통수단이 다 사용한다. 주 도로는 왕복 2차선이고 중앙보호벽은 물론 노란 중앙선조차 대도시 외엔 보질 못했다. 주 도로 양 옆에는 폭이 좀 좁은 갓길이 꼭 있다. 대부분 자전거와 작은 오토바이는 이 길을 사용한다. 자동차가 이 길을 침범하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듣던 바와 달리 1번 국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안전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안전했다.


역주행, 무질서 속의 질서


베트남의 환경은 타이완과 너무 비슷했다. 도로 양옆에 있는 2, 3층 건물이 뒤로 길쭉한 것이나, 오토바이가 물결을 이루며 달리는 것. 그러나 대만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역주행이 베트남은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다. 왕복 2차선인 도로에서 자주 두 대의 차가 앞에서 나란히 온다. 심지어는 세 대의 차가 나란히 오며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것을 자주 보았다.


갓길에서의 역주행은 마치 법으로 허용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다. 베트남에서 차량은 우측통행을 한다. 그러나 갓길에서 마주치면 자연스레 좌측통행을 하여 비켜간다. 무질서 속의 질서라 할까 나름대로 질서가 있어 그나마 사고를 줄일 수 있는 것 같다.


환전 사기를 당하다


꽝찌(Quang Tri)성의 성도 동하는 군사분계선 안에 있는 땅굴 관광의 중심이 되는 도시이다. 숙박한 호텔 앞에 개인 환전소가 있어 환전하였다. 이상하게 환전하는데 바로 앞에서 주지 않고 돈만 받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한참 있다 내려오는데 지폐를 다양하게 섞어서 준다. 분명 앞에서 셀 때는 맞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일부 사기당한 것을 알았다. 10만원권에 5만원을 섞어준 것이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하며 북부를 벗어나 중부에 있는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웬(Nguyen) 왕조의 수도 후에(Hue)에 입성하였다. 후에에 들어서자 젊은 아가씨 둘이 ‘한국인이죠’하며 반가워한다. 둘이서 북부에서 남부까지 관광버스로 일주하는 중이란다. 하노이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보는 한국인이라 매우 반가웠다. 마침 배도 고팠는데 바나나를 한 다발 사더니 일부 건네준다.


프랑스는 1885년 청나라와 2차 톈진조약을 맺고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는다. 이후 남부를 코친차이나로 바꾸고 직접 통치하였으나 중부는 안남으로 바꾸고 보호국으로 삼아 당시 응웬 왕조가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후에는 이 왕조의 수도로 높은 담과 성이 거의 훼손되지 않았고, 황궁 둘레에 쳐진 해자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조선도 비록 일본이 강점했을지라도 왕조가 망하지 않고 자치권이나마 행하였다면, 옛 모습의 한양을 많이 유지하고 있어 오늘과 같은 모습의 서울이 아니었을텐데 하는 회한이 든다.







▲ 후에 황궁과 주차된 자전거. 그 사이에 해자가 있다.


처음으로 세차비 주고 자전거를 닦다


황궁을 뒤로 하고 후옹(Huong) 강을 건너 신도시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외국인이 많이 보였고 간판이나 메뉴도 영어로 된 것이 많다. 호텔에서는 영어가 통했다. 호텔에 들어가기 전 너무도 지저분한 자전거를 닦기 위해 세차장을 찾았다.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세차해 주는 곳에서 쾌히 우리 것도 해 주었다. 처음으로 자전거 세차하고 값을 지불했다.






















중부에 들어서니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것 같다. 지난 저녁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돌아다녔는데도 춥지 않았다. 오늘 아침도 날씨는 역시 흐렸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날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 해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마음이 우울해지고 있었다.


후에도 큰 도시답게 아침 출근길은 매우 번잡했다. 후에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1월 31일 베트콩의 전면적인 구정(뗏 Tet) 공세에 의해 베트콩에게 함락되었던 도시로 함락되었던 여러 도시 중 가장 늦게까지 저항하다 다시 미국에게 함락되었다.


펑크 나고 펌프와 브레이크는 망가지고


지난 1주일 사이에 펑크가 너무 자주 났다. 그것도 한 자전거에서 심지어 네 번까지 났던 적도 있다. 오늘만 5번의 펑크가 나, 지금까지 매일 평균 3차례 펑크가 났다.


바람이 빠져 튜브를 교환할 때 반드시 타이어에 뾰족한 것이 박혔을 경우를 대비해 항상 타이어 안쪽을 세밀히 쓰다듬어 봐야 한다. 분명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어 튜브를 교환했지만 달리면 한참 가다 또 바람이 샌다. 이러길 세 번째, 아예 타이어를 빼고 세밀하게 검사했다. 타이어의 한 작은 구멍을 파헤쳐보니 아주 날카로운 유리가 박혀있었다. 겉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속으로 박혀있었다. 이것이 달리면 압력을 받아 조금씩 올라와 아주 작은 구멍을 내 바람이 서서히 빠진 것이다. 타이어를 까뒤집으며 속에 있은 유리를 모두 파냈더니 그 다음부터는 괜찮았다.


네 명 모두 공기펌프를 가져갔으나 첫날 한 펌프가 고장 나고, 다음 날 또 다른 펌프가 고장 났다. 둘 다 산 지 오래되어 자연히 망가진 것 같았으나 하필 여행 중에 망가지다니. 다른 두 펌프는 크기가 작아 바람 넣기가 힘들었다. 그 뿐 아니라 튜브의 노즐을 잡아먹어 세 개의 새 튜브를 아예 못쓰게 만들었다. 성치 않는 펌프에 여유분이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아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당장 우리 자전거에 맞는 26인치 튜브와 펌프를 구해야 했지만 일반 자전거 가게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두 대의 자전거는 흙탕길을 헤쳐 오느라고 그랬는지 브레이크까지 고장 났다. 자전거에는 앞뒤 두 개의 브레이크가 있어 한 쪽을 제거하여도 운행에는 지장이 없지만 내리막에서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700km 만에 처음으로 맞이한 고개, 하이반


하노이를 떠난 지 700여 km 만에 처음으로 고개가 나타났다. 후에까지는 거의 평지였고 후에에서 45km 지점에 처음으로 해발고도 54m, 59km 지점에 64m 정도인 고개이다. 그것도 오르막이라고 처음으로 내리막을 달려봤다. 10km 더 진행하니 왼쪽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오른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 솟아있는 곳에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에 터널로 가는 길은 최근에 완성되었는데 자전거는 갈 수 없다.


해발고도 5m인 고개 입구에서 굽이굽이 굽은 고갯길을 올라간다. 고개를 오르면서 처음으로 바다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1번 국도는 동쪽 해안가를 따라 내려가지만 바다에서 좀 떨어져 있어 바다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올라가면서 아름다운 해변가와 멀리 남중국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한 굽이 넘어가면 또 다른 오르막이 나오는 것을 반복하니 멀리 다낭 시내가 보인다. 이 고개가 바로 하이반(Hai Van) 고개이다. 해발고도는 475m 정도로 입구부터 고도차는 약 470m 정도이나 그 거리는 10km 정도 되었다.







▲하이반 고개 중턱에서 내려다 본 바다


하이반 고개는 베트남 전쟁 당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았던 곳으로 한국군이 전투에 참여한 곳이기도 하다. 고개 정상에서 베트남 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출발하려는데 펑크가 또 난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펌프는 사용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주변  상인들이 갖고 있는 펌프를 빌려 간신히 바람을 넣고 오랜만에 내 달렸다.


투박한 튜브 그러나 성능 좋은 펌프


다낭은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 십자성 부대가 주둔한 곳으로 베트남 제4의 도시로 매우 큰 도시이다. 그래서 우리가 찾는 튜브와 펌프가 있을 것 같았다. 주변 자전거 가게에서 물어보니 자전거 부품을 파는 도매상의 약도를 그려주어 우선 찾아갔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없고 베트남산 튜브는 매우 투박하고 크기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여분의 튜브도 없고 펌프도 모두 고장 나 필요하면 튜브를 잘라서 사용할 것을 각오하고 튜브와 펌프를 구입했다. 다행히 펌프는 프레스토 타입인 튜브에 연결할 수 있는 어댑터를 함께 구할 수 있었다.


튜브와 펌프를 산 것은 마치 보험을 들은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 거의 펑크가 나지 않았다. 우리가 산 베트남 튜브는 사용도 못하고 호치민에 도착하면서 용도폐기 되었으나, 펌프는 가격에 비해 너무도 바람이 잘 들어가 갖고 왔다.


다낭 시내로 계속 직진하며 들어가니 한(Han) 강이 나왔다. 강 주변에는 많은 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별 세 개의 고급호텔에서 묵었다. 숙박비가 좀 싸다했더니 역시나 강가에 있음에도 우리가 묵은 방은 조그만 창문조차 없는 방이었다. 그러나 시설은 아주 좋았고 다음날 아침 식사는 매우 근사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아침상을 받고 오랜만에 아침을 즐겼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으로 비가 오지 않았고 해를 볼 수 있었다.


퐁니마을 민간인 학살


다음 날 꽝남(Quaung Nam)성에 들어섰다. 베트남에서 우리 군인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주로 일어난 지역으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지역은 디엔반현 디엔안싸에 있는 퐁니마을이다. 이 마을은  당시 미 해병대 캡소대와 자매결연까지 맺은 안전마을이었으나 1968년 2월 12일 구정공세 반격작전을 하던 청룡부대가 퐁니마을 사람 69명 학살을 학살하였다. 당시 주민들은 마을이 모두 불타 담요나 해먹이 없어 아이들 주검은 상자나 대바구니에, 어른들 주검은 커다란 채반에 담아 머리에 이고 길을 걸어 1번 국도 앞 베트남 정부군 초소까지 가서 도로 양옆으로 시신을 늘어놓고 청룡에 대한 응징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한-베트남 간 외교문제로 비화되고 미국의 강한 항의로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조사하였고 당시 중대장은 이 사건으로 조기 귀국을 당했다.


우리가 지어주는 병원 건설현장


꽝남성의 성도 탐키(Tam Ky)에서 한 25km를 지나니 매우 커다란 한글 광고판이 국도 변에 서있는 공사현장이 나온다. 작년 12월에 공사가 시작되고 바로 1주일 전에 기공식을 한 추라이(Chu Lai) 지역의 베트남중부지역종합병원 건설현장으로 한국 정부의 의료지원사업으로 짖고 있는 것이다. 추라이 지역은 청룡 부대가 주둔하였던 곳으로 최대의 미군기지가 있던 곳이다. 한국의 베트남 지원이 이런 식으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위로가 된다.







▲ 우리가 지어주는 베트남중부지역종합병원 건설현장


소음과 먼지 속에 국수를 말아먹다


꽝응아이성으로 들어갔다. 성도 꽝응아이를 들어가는 입구에 강(Song Tra Khuc)이 흐른다. 다리를 건너가면 꽝응아이이다. 그러나 미라이(My Lai)학살로 유명한 손미(Son My)마을은 이곳에서 갈라진다. 강가에 있다는 호텔을 찾아 갔으나 마침 폐업 중이었다. 근처 민박집을 찾았다. 방은 거의 비어 있음에도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부른다. 우리는 그동안 준 것을 설명하고 결국은 반으로 깍았다.


문제는 숙소 근처에 식당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내까지 강을 건너가기도 그렇고 하여 강 입구 도로변에 간이식당을 찾았다. 먹을거라곤 국수뿐이었다. 오가는 자동차의 소음과 날리는 먼지 속에서 얼음에 담긴 맥주를 마시며 한 그릇의 국수를 말아먹고 나니 기운이 난다.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발바닥이 매우 가렵다. 그동안 젖은 신발을 계속 신고 다닌 탓인가 보다. 호텔방에 있는 에어콘과 TV가 모두 우리의 LG 제품이다.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많은 곳에서 우리가 만든 제품을 보았다. 직접 그 현장을 보니 우리나라의 가전제품이 세게 곳곳에 많이 나가있는 것을 실감한다.


미군이 자행한 송미마을 학살 


이른 아침에 택시를 불러 송미마을로 갔다. 너무 일러서인지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위령관 입구 전면에는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단과 나이가 적혀 있고, 안에는 당시 참혹했던 장면의 사진과 관련 군인의 학살 장면이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당시의 촬영한 사진이 알려지면서이다. 전시품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남조선 용병(South Korean mercenaries)이란 단어도 들어있다.


해방전선위원회중앙당은 침략국가 미국과 남조선 용병들이 국민들과 세계시민들 앞에서 자행한 잔인한 범죄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국제법정에 이러한 미제국의 전쟁범죄를 심리하라고 고발했다(The central part liberation front committee accuse violently atrocious crimes of the America aggressor and the South Korean mercenaries before the national people, the world people, the international court to try war crimes of the American empire.).


전시관 밖에는 당시 마을의 처참한 모습을 꾸며 놓았다. 마을과 전시관 사이에는 강력한 인상을 풍기는 조각 작품이 우뚝 솟아있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보 티 리엔의 남편이 만든 작품이다.







▲ 가족의 고통을 표현하는 조각


송미학살은 미라이학살로 알려져 있다. 미군에 의해 일어난 최대의 민간인 학살로 베트콩의 구정대공세 직후인 1968년 3월 16일 송미마을 인근 4개 부락에서 자행되었다. 미라이는 작전지도에 명기된 이름으로 실제 학살이 이루어진 송미와 딘케의 인접마을이다. 학살이 일어나기 이틀 전 인근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들이 부비트랩에 걸려 사상자가 발생하자, 베트남 정부의 신분증을 보유한 양민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17명의 임산부와 어린이 173명을 포함한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고 모든 가옥에 불을 질렀다, 미군의 피해는 이 참상을 보다 못하여 스스로 자해한 병사 1명 뿐이었다고 한다. 생존자 보 티 리엔이 세계를 순회하며 베트남 참상을 폭로하여 송미학살은 미국 내 반전 평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현장을 지휘한 캘리 중위는 40년 만에 공개 사과했다.


휘영청 밝고 둥그런 보름달이 떠오르다


오늘의 주행 계획은 약 70km로 예정되어 있어 아침부터 느긋하게 자전거를 몰았다. 목적지인 사힌쓰(Sa Huynh)는 바닷가에 인접한 해변마을이다. 책자를 통해 소개된 호텔을 찾았으나 대대적인 수리를 하고 있어 마을로 되돌아가 숙박을 하였다.


해변가에 위치한 호텔과 바닷가 사이에 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방문 앞에는 넓은 복도가 있어 옷을 널고 자전거를 정비하기에 아주 좋았다. 앞에 있는 바다를 이곳에서는 동해라 하고, 국제적으로는 남중국해라 한다. 해변가로 나갔으나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당장은 환경에 신경을 쓸 형편이 되지 못하겠으나 경제가 발전하고 환경을 잘 가꾸면 베트남의 해변은 엄청 좋은 관광자원이 되리라 본다.


날씨는 화창하고 멀리 파도소리는 좋았으나 모기에 뜯겨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저녁을 먹을 때는 바다 위로 휘영청 밝고 둥그런 보름달이 떠올라 온 세상을 훤히 비추었다.


크기에 관계없는 야자 가격 


주행 중에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야자수를 마셨다. 처음엔 야자가 보이면 들어가서 마셨다. 대개 10,000동을 받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큰 야자가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자꾸 지나치게 되고 결국 한 곳에 섰다. 그런데 야자가 좀 작았다. 그러나 주인은 크기에 상관없이 10,000동을 받는다. 남부로 갈수록 야자가 더 커 보였다. 한 번은 야자가 좀 커 보이길래 잠시 쉬어갈 참으로 들렸다. 크기에 관계없이 가격이 같은 줄 알고 있었으나 이제는 야자를 통채로 내 주지 않고 속에 있는 물만 컵에 따라 나온다. 한 통을 한 컵에 다 집어 넣었을리는 없는 것 같았다. 주인 마음대로였다.


2월 첫째 날이다. 푸엔(Phu Yen)성의 성도 투이호아에서 28km 지점을 지나나 앞에 다비아(Nui Da Bia) 산이 보인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이 산에서는 우리 군인의 많은 교전이 있었다. 이 고개를 넘어가니 칸호아(Khanh Hoa)성의 성도 나짱(Nha Trang)까지 평지가 계속 이어졌다. 첫 번째 나짱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들어갔더니 해안가로 돌아가는 도로였다. 경치는 아주 좋았으나 8km 정도 더 가야했다.







▲ 다비아 산


해안가를 따라 계속 달리니 나짱의 중심지가 나온다. 좀 싸고 좋은 호텔을 찾기 위해 해변가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을 잡았다. 가격 대비 이번 여행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호텔이 되었다.


주변 보따리상인과 상생하다 


해변가에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한 식당에 들어가 해변가에 위치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은 외부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삶은 바닷가재를 파는 한 아주머니가 팔아달라고 밖에서 우리에게 조른다. 가격은 매우 저렴했다. 그러나 이미 식당에 들어와 주문했고 남의 음식을 식당에서 먹는 것은 곤란하였다. 그도 눈치를 챘는지 안에서 먹어도 괜찮다고 하는 것 같았다.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사 먹어도 좋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라 그런가.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쫓아내고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식당의 종업원이 보따리 상인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주인의 허락을 받았는지는, 상납을 받는지는 몰라도 그 종업원은 쾌히 그렇게 하라고 한다.


음식을 다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를 그 그릇에 담으니 그 아주머니가 도로 걷어간다.


















나짱을 출발하여 한 20여 km 가니 동보 계곡(Suoi Dong Bo)이 있는 꺼우힌 산(Nui Cau Hin)이 왼쪽으로 보인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우리 군대가 베트콩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1965년 청룡부대가 상륙하여 주둔하고 이어 백마부대와 제2해병여단이 상륙한 항구도시 깜란(Cam Ranh)에 도착하여 길가의 까페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보아온 까페 중에 분위기가 제일 좋았고 커피 맛도 일품이었지만 커피 값은 가장 쌌다.


사고가 난 줄 알다


길가 노점에 야자열매가 보여 야자수를 마시며 쉬려고 멈추었다. 곧이어 다른 두 사람도 도착해 셋이 함께 있고 나머지 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미리 도착한 세 사람이 남은 한 사람이 오는지 지켜보고 있었고 자전거도 바깥에 잘 보이도록 서 있었으므로 절대 지나갔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는지 한 사람이 찾으러 나섰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찾으러 나선다는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한 나는 주변에 있는 오토바이를 수소문해 뒤에 타고 찾으러 나섰다.


점점 멀리 갈수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신 곳까지 거의 갔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되돌아오다 만난 경찰에게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려 했다. 통했는지 몰라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저 멀리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함께 간 베트남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오토바이를 다시 몰았다.


되돌아왔더니 그 베트남인은 찾으러 더 안 가냐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쉬고 있던 곳에는 하나만 남고 다른 일행은 없었다.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벌써 지나갔다는 전화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판랑(Phan Rang)까지 쫓아갔다.


판랑은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의 제2해병여단 제2대대가 미군이 건설하고 있는 비행장 경계에 투입되었던 지역이고, 1965년 11월에는 인근 까두산(Nui Ca Du)에서 전투도 했던 곳이다.


판랑 린선사 사건


1969년 10월 14일 남부 해안가에 있는 판랑 지역의 절 린선(Linh Son)사에서 한국군 한명이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하여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AFP 통신은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것으로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고, 이어서 달아나는 여자 보살에게도 총을 쏜 후 시체를 모두 불태웠다. 마을에서 돌아온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이 시신탈취에 대한 불안으로 시신을 인근 절로 옮겼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판랑 지역 전 학교가 휴학을 결의하고 일제히 봉기에 나섰다. 12일이 지나서 시신을 화장할 수 있었고 절은 폐허가 되었다. 1998년에 새로 지어진 이 절에는 당시 죽음을 당한 스님들의 유골이 모셔진 3층탑이 있다고 한다.(한겨레21 256호 99년5월)


피리 소리에 모여든 베트남 여인들


판랑을 지나니 흔히 보이던 길가에 민가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허허벌판이 계속된다. 작은 관목이 간간히 눈에 띠는 것이 사막임에 틀림없었다. 까나(Ca Na)로 들어서니 젓갈 냄새가 풍겨왔다. 마치 우리나라 충남의 강경 젓갈시장에 들어서면 나는 그 냄새와 비슷하다. 생선을 발효시킨 생선소스로 느억맘(nuoc mam)이라 한다.


끊임없이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해안가에 이르니 칵산(kach san, 호텔)이 나타났다. 이곳엔 여러 채의 방갈로가 해안가에 붙어있다. 통나무로 된 방갈로에는 침대가 둘 그리고 욕실이 있었다. 시설은 낡았으나 문만 열면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호텔서 운영하는 식당도 바닷가에 거의 붙어있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우리 전통피리를 꺼내 그동안 준비했던 우리의 아리랑처럼 많이 알려진 베트남의 민요를 불렀다. 식당서 일하던 여인들이 가까이 오며 따라 부르기도 하며 좋아한다.







▲ 피리 소리에 모여든 베트남 여인들


외국어 교육 대신 그림을 배우자


매번 숙소에 갈 때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전혀 영어를 하지 못하니 의사 전달하기 매우 어려웠다. 몸짓으로도 안 되자 다행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있어 그림으로 의사를 전달하니 알아듣는다. 세탁을 할 수 있냐는 것을 세탁기 그림을 그려서 보여 주었다. 식당에서 맥주를 마실 때 땅콩이 필요하면 땅콩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땅콩을 따뜻하게 볶아서 갖고 온다. 물론 추가 비용은 내야 한다.


베트남에선 맥주를 주문하면 대부분 차겁지 않은 그대로 가져온다. 대신 맥주에 얼음을 타서 먹는다. 처음은 이상했지만 여러 번 반복하니 그것도 괜찮았다. 냉장고는 북쪽으로 갈수록 거의 없고 남부에 가서나 볼 수 있었다. 이때는 찬 맥주를 내오는 경우도 많았다.


음식점에서 물수건을 내올 때, 주문도 하지 않은 땅콩 같은 것을 음식 나오기 전에 내올 때 그것을 먹으면 값을 치러야 한다. 야속하기도 했지만 음식 낭비를 하지 않으니 바람직하게 생각되었다.  


환상적인 조개구이 맛


이제는 완전히 남부에 접어들었다. 날씨도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다. 까나를 출발하니 어제처럼 사막이 이어진다. 가끔 도로는 소떼에 의해 점령되기도 한다. 23km 정도 가니 멀리 풍력발전기 5기가 돌아가는 것이 보인다. 완만하면서도 매우 지루한 언덕을 올라가니 바로 눈앞에 이 발전기가 보인다. 그 너머로 바다가 끝없이 펼쳐있다.


판티엣(Phan Thiet)에 도착하였다. 판티엣은 생선소스인 느억맘의 베트남 제일의 생산지이다. 저녁에는 산책하다 길가에서 조개구이를 먹었다. 베트남에서 먹었던 그 어느 음식보다 가장 맛있었다. 그러나 길에서 먹은 것치곤 가격이 비교적 비쌌다.


동쪽 해안을 따라가는 길은 끝나고 판티엣부터는 내륙으로 들어선다. 판티엣에서 롱칸(Long Khanh)으로 가는 길은 전체적으로 내리막이 이어져 자전거 타기가 쉬웠다. 해먹에 누워 쉬면서 흔들흔들 거리니 살살 잠이 오기도 하고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 해먹 위에서 휴식을 취하다.


저렴한 식대


롱칸에 들어서니 커다란 성당이 나타나 도시가 매우 커 보였다. 그러나 도심을 한 바퀴 둘러봐도 숙소가 보이질 않는다. 도심을 떠나 호치민 방향으로 가니 외곽 길가에 나응이(nha nghi, 민박집)가 보였다. 주인은 숙박비를 터무니없이 많이 불렀지만 우리는 또 반으로 깎았다.


혼자서 자전거 여행 중이던 태평양의 조그만 섬 바베이도스 출신의 사진작가가 우리와 같은 숙소에 묵었다. 그는 우리와 반대로 호치민에서 하노이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숙소 주변에 식당이 없어서 주인 딸에게 물어 택시를 불러 타고 나갔다. 그녀도 한국어를 조금하기에 물어보니 그도 역시 한국에 연수를 다녀왔다고 한다. 식당은 주변에서 아주 좋은 것이었다.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넷이서 맥주를 포함해 잘 먹었음에도 식대는 우리 돈으로 4만원 정도 나왔을 뿐이다.


1798km를 달려 호치민 통일궁에 도착하다.


이번 여행에서 자전거를 타는 마지막 날이다. 롱칸에서 호치민까지는 아주 완만하지만 거의 내리막이다. 도로는 호치민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복잡해져간다. 거대한 교통물결이 호치민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다.


당시 사이공이라 불렸던 호치민에는 주월한국군사령부와 해군수송전대인 백구부대 그리고 공군지원단인 은마부대가 한국군이 철수하는 1973년까지 주둔한 곳이다.


드디어 호치민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이고 사이공 강이 나타났다. 시내로 들어서니 탈것들이 모두 뒤엉켜복잡하게 돌아간다. 목적지인 통일궁(Reunification Conference Hall)의 이정표를 찾아야 하기에 도저히 한 눈 팔 사이가 없다. 호치민의 중심부로 들어서니 일방통행이 눈에 많이 띈다.


마침내 통일궁에 도착하였다. 통일궁은 남베트남 정권 시절인 1966년에 지은 대통령 관저이다. 1975년 4월 30일 해방군이 탱크를 몰고 들어옴으로서 베트남 전쟁은 끝났고 베트남은 통일되었다. 지금은 일반에 공개되어 그 탱크를 포함하여 당시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있다.


하노이부터 호치민까지 공식적인 1690km 거리를 중간 중간 도시를 들락날락하며 현재까지 16일간 총 1798km를 달렸다. 하루 최대 172km에서 최소 70km 그리고 매일 평균 112km씩 달리며 마침내 베트남 남북 종단을 이루었다.







▲ 통일궁 앞에서 1798km 베트남 남북 종주를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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