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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에 남북이 안의사를 찾아 뵈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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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순국 100돌을 맞아 남북공동추모행사가 3월 25일부터 27일까지 중국 대련에서 진행됐다. 남측에서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와 우리 연구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모두 96명의 참가단을 꾸렸고 북측에서는 조선종교인협의회 장재언 회장(북측 적십자사 위원장)을 비롯한 6명이 참가했다. 최근의 남북 경색 국면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규모가 아닐 수 없으며 북측에서도 고위급 인사를 파견해 이 행사에 성의를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이 행사에 연구소는 모두 32명의 회원이 참가했다. (강종권 김기흥 김경년 김광진 김병현 김순흥 김옥남 김준혁 김호균 박건+최영숙 박동석 박미리 박용규 방학진 안영봉 여순주 윤천근 이기자 이성순 이윤 이진호 이희자 양유경+양석형+양아영 조룡상 최사묵 최병학 최천택 황상익+민경화) 아래 글은 이번 행사에 참가한 김병현 회원의 글이다. – 엮은이 주


김병현 서울서초 회원


3월25일 아침, 전철로 이동하며 안의사 유묵 서첩을 꺼내어 다시 읽으니 어느새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초면으로 다소 낯선 우리 일행들은 인천공항을 출발 1시간을 비행해 대련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일행은 대련역 바로 옆에 있는 호텔에서 여장을 풀게 되었습니다. 저와 같은 방을 쓰게 된 분은 창원시청 공무원으로 일하는 김호균 회원이었는데 연차를 내면서까지 참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 여순감옥 내 안의사 흉상 앞에서 남북 참가자들이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는 모습.


대련시는 550만의 대도시로, 여기 저기 건설공사를 많이 하고 있어 여기서도 중국의 빠른 성장 열기를 느껴졌습니다. 그러한 성장 속에서도 중국 내 소수민족의 말 못할 설움을 토로하는 재중 동포 가이드의 한마디는 두고두고 마음에 남습니다.


“한국 땅에서 태어나서 자란 여러분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재중 독립운동가 후손인 김파 시인(안중근의사의 의거를 도왔던 유동하의 여동생 유동선의 아들)을 통해 안중근의사의 의거에 얽힌 유동하, 유동선 두 분의 이야기와 함께 안중근 평전을 쓰신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김파 시인의 설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토 저격에 숨은 공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유승렬, 유동하, 김성백 선생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극비에 가까운 이토의 하얼린 방문 소식을 안의사에게 전달한 분들입니다. 이렇듯 안중근의사의 의거에 여러 동포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밤늦은 시각 연구소 회원들 일부는 김순흥 광주지부장님의 객실에 모여 서로 첫 인사를 나누며 간단한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그렇게 마쳤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아침. 이번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 중 하나인 ‘안중근의사 순국100주년 추모 남북공동미사’가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 5층에서 열렸습니다. 남북관계가 경색 중인 와중에 열리는 공동행사라 그런지 국내 취재진은 물론 정보기관에서 나온 듯한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우리 측 일행 전원과 대련 한인성당 신자 분들 그리고 북측에서 참가한 조선종교인협의회 장재언 회장님 등 북측 일행 여섯 명이 함께한 자리였습니다. 북측에서 더 많은 인원이 오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이날 미사는 역시 특별하였습니다. 미사 시작 성가는 함세웅 신부님이 기존 성가곡에 가사를 만든 ‘안중근의사 찬가’였습니다. 독서 부분에서는 성







▲ 여순감옥 내 안의사 흉상 앞에서 참가자들이 추모 기도를 드리는 모습.


경구절 대신 안중근의사가 두 동생에게 남긴 유언과 어머니께 드리는 유언, 부인 김아려(아네스)에게 남긴 유언을 읽었습니다. 그 중 두 동생(정근, 공근)에게 남긴 유언은 이렇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 쓸 것이다. 너희는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을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100년이 지나도록 안의사의 유언대로 유해를 고국에 모셔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함세웅 신부님의 강론에서는 “안의사의 유해발굴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유해발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의사의 뜻을 우리들 마음속에 모시며 그분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 말씀을 새기며 미사 마지막에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들은 모두 ‘우리의 소원’을 목 놓아 합창했습니다. 


추모 미사 후 안의사께서 순국하신 여순감옥으로 향했습니다. ‘旅順日俄監獄舊址’ 즉 ‘여순 일본-러시아 옛 감옥 터’라는 글씨가 쓰여진 회색 건물과 적갈색 벽돌의 감옥 건물들을 보니 약간의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거리기 시작했으며 어떤 분들은 마침내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감옥의 이곳저곳을 옮겨가니 드디어 안의사님이 순국하신 장소에 이르렀습니다. 교수형을 당하신 곳에는 의자 위에 사형 집행 5분 전에 찍으신 흰색 한복의 안의사 사진이 놓여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고개 숙여 묵념을 올립니다. 사형장 옆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순국 전까지 안의사







▲ 여순감옥 내 사형장. 이곳이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이다.


께서 남긴 유묵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죽음을 앞두고 모든 것을 담은 힘찬 필치와 명문장을 대하니 사람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됩니다. 


여순감옥 벽면 중간 중간에는 당시의 옥중 시들을 조각물로 전시하여 두었는데 잠깐 지나가며 읽은 몇몇 시구들이 가슴에 남습니다. 


自喜松靑是本色, 風霜會我見精神 (솔이 푸른 게 본디 색인 것 스스로 기뻐하노니 풍상이 나를 만나서 나의 정신을 보여주노라) 


但愿人民獲解放不因囹圄改信念 (다만 인민이 해방을 얻기를 원하노니 감옥생활로 인하여 신념을 고치지는 않겠도다) 


여순감옥을 떠나 일행은 여순법정을 방문합니다.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안의사가 재판을 받던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곳 한 켠에는 일제가 사용한 각종 고문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시신을 없애는 쇄신구, 물을 강제로 먹여 배를 누르는 압강상, 다리를 마비시키는 답강, 등뼈를 다치게 하는 조대괘, 난로에 몸을 밀착시키는 포화로, 살갗을 벗기는 박피구, 그 중에는 글로 표현하기 끔직한 사진도 있었습니다. 또한 안중근의사를 사형장으로 끌고 간 마차가 실물크기 복제되어 전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여순법정에서 있었던 안의사 재판장면을 잠깐 떠올리며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실마리를 잡아 보려 했습니다. 여순법정을 나오는 출구에서 접한 전시물에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고 사람들의 허다한 기억도 지나갈 터지만 그러나 백년 이래 국난과 항쟁의 역사는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각골명심하게 한다. 양심과 지식이 있는 각자라면 모두 그 역사를 결코 쉽게 잊을 수 없다’라는 말이 가슴에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이날 저녁에는 남북이 함께 안의사의 정신을 잇자는 내용의 ‘공동 결의문’을 발표했으며, 행사 말미에는 우리 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북측 대표단에 전달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출국







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연구소 이윤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왼쪽)이 북측 대표단장인 장재언 조선종교인협의회장(오른쪽)에게 전달하고 있다.


하기 위해 3일전 왔던 대련공항에 돌아와 출국시간을 기다리면서 ‘살아 있는 안중근정신’이 무엇인지, 대의에 헌신하는 열정과 자기 통제력을 갖춘 균형감각 있는 삶 그리고 자기 선택에 전적인 책임을 지는 삶에 대한 각오를 다져봅니다. 끝으로 우리 연구소 주최로 앞으로 독립투쟁의 현장을 찾아가는 해외답사를 연1회 정도 가지면 어떨까 제안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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