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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인도 판사, 일본에서는 여전히 영웅 취급-IHT(0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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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인도 판사, 일본에서는 여전히 영웅 취급
   


사망한지 4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조국 인도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갈수록 적어지지만, 일본에서는 여전히 큰 인물로 남아있다.


최근 몇 주간만 하더라도 공영방송인 NHK는 프라임타임의 55분간을 그의 삶을 보여주는데 할애했고, 한 학자는 그의 사상과 일본에 미친 영향을 탐구한 309쪽의 저서를 출간했다. 무엇보다도 아베 신조 총리는 최근 인도 방문 중 뉴델리 인도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그에 대한 찬사를 바쳤고 판사의 81세 아들을 만나기 위해 캘커타를 방문했다.


2년 전 일본의 전몰자들을 기리고 일본 민족주의자들의 집결지인 야스쿠니 신사에 세워진 그 판사의 공적비는 그가 갖는 의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11명의 연합군 판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내놓은 라드하비노드 팔이 장본인이다.


“팔 판사는 극동군사재판에서 그가 보여준 용기라는 고귀한 정신 때문에 오늘날에도 많은 일본인들에게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고 아베 총리는 인도 의회에서 말했다.


전후 일본의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사상가들은 오랫동안 팔 판사를 영웅으로 떠받들면서, 일본이 아시아에서 침략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자위와 자유를 위한 행동이었다는 도쿄 재판에서의 그가 밝힌 반대 견해를 이용하고 때로는 왜곡해왔다. 아베와 같은 민족주의 정치인들이 최근 몇 년간 권력을 얻고, 또한 유사한 생각을 하는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일본의 전쟁 역사에 대한 수정주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가운데, 팔 판사는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 와중에서 그는 도쿄재판을 둘러싼 문화 전쟁의 (culture wars) 시금석으로 계속 남아있다.


과거 도쿄재판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표명했던 아베 총리는 인도 의회에서 혹은 20분간에 걸친 팔 판사 아들 프라산타씨와의 만남에서 자신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그 만남 이면에 숨어있는 의미를 일부 일본 신문들은 놓치지 않았고, 그 신문들은 주변국들 사이에 일본의 나쁜 이미지를 회복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라고 경고했다. 


전쟁 후 B와 C급으로 분류된 통상적인 전쟁 범죄는 아시아 전역의 각 지역 재판소에서 처리됐다.


25명의 지도자들이 A급 전범 혐의로, 즉 전후 연합국들이 만든 카테고리 가운데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反평화 및 非인도적 범죄를 자행한 혐의로 도쿄에서 11개국 판사들에 의해서 재판을 받았다.


영국과 미국 당국자들이 캘커타 고등법원에 재직했으며 인도의 반식민투쟁에 강력하게 동감하고 있던 팔 판사를 선택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시아 민족주의자로서 그는 다른 판사들과 매우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를 식민지화한 것과 관련해서 일본은 서구 열강을 따라했을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反평화 및 非인도적 혐의를 소급 적용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자신의 반대 견해를 표명한 긴 글에서 그 같은 혐의는 “보복의 갈증을 채우기 위해 법적인 절차를 허위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썼다. 반면 그는 난징학살을 포함해 일본의 전쟁 당시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완전히 인정을 했지만, 그 혐의는 B와 C급 범죄에 포함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나는 피고인 누구나 기소된 모든 혐의에서 무죄이며 따라서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라고 팔 판사는 나머지 판사들이 유죄 결정을 내린 25명의 일본인 피고인들에 관한 자신의 반대견해 글에서 밝혔다.


팔 판사는 또한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에 대해서 나치 범죄에 비견할 만한 전쟁 최악의 잔혹한 행위라고 표현했다.


미군의 일본 점령은 52년에 끝이 났고 이후 도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을 하고 도쿄 재판의 판결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군 점령이 끝나면서 또한 팔 판사의 1235쪽의 반대 견해에 대한 출판 금지도 해제됐으며,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그 견해를 내세워서 도쿄 재판이 허위라는 자신들 주장의 근거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지난 7월에 ‘팔 판사’라는 저서를 출간한 홋카이도대학 공공정책 대학원의 나카지마 다케시 교수는 도쿄재판에 대한 일본인들의 비판은 팔 판사의 반대 견해 가운데서 선별적으로 취사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팔 판사는 미국에 대해서도 매우 엄중하게 언급했지만, 일본에 대해서 매우 가혹했다”고 나카지마 교수는 말했다. “모든 제국주의자들은 그에게는 한패에 불과했다.”


세밀한 차이점은 던져버리고, 전후 정치인들은 팔 판사를 일본에 몇 차례 초청해서 그에게 존경을 쏟아 부었다.


그의 강력한 지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1950년대 말 일본 총리를 역임했고 A급 전범 혐의를 받았지만 기소된 적이 없는 기시 노부스케다. 기시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이며 정치적 롤 모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팔 판사의 존재는 매우 감사한 것이다. 일본이 잘못을 한 유일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그토록 명확하게 밝힌 다른 외국인들은 없었다”라고 부분적으로는 팔 판사가 남긴 것을 기리기 위해 창설된 일-인도 친선협회의 카세 히데아키 회장이 말했다.


그러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카세는 난징학살 인정을 포함해서 팔 판사 결론의 일정 부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징학살에 대해 ‘완전한 거짓’이라고 말하는 카세는 팔 판사가 ‘중국과 연합국들의 프로퍼갠더’에 희생자가 됐다고 말했다.


여러 면에 있어서 팔 판사는 많은 인도 반식민주의자들이 일본에 가졌던 엇갈린 감정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 열강들과 경쟁하는 아시아의 국가로서 일본은 찬사를 불러일으켰지만 또한 아시아를 식민지화 한 행동은 경악을 초래했다고 하버드대 남아시아 역사학자인 수가타 보세가 말했다.


보세는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자신의 종조부인 수브하시 찬드라 보세가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난했지만 그 자신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제휴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남아시아와 및 동남아시아가 갖고 있던 복잡한 시각이다”라고 보세는 말했다.


“일본인들이 제공한 도움에 대해서 그러한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감사의 마음이 있다. 동시에 또한 일본에 대한 깊은 의혹이 있었다.”


그러나 수브하시 찬드라 보세와 인도 반식민주의자들이 창설한 많은 지지를 받았던 군대인 인도국민군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팔 판사는 인도인으로서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보세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견해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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