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문의 길]나눔의 집과 수요집회
우산을잃어버리다

강일출 할머니는 1943년 가을에 동원되어, 1944년 정초 목단강위안소에 도착, 이후 1945년 해방되기 얼마 전 탈출할 때까지 위안부로 생활했다.
할머니는 1928년 10월 26일 경북 상주군 화동면 의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아이를 모두 열둘을 낳았는데 일출은 그중 막내다. 일출이 태어났을 때 이미 위의 다섯 형제가 죽어 일곱이 남았다. 일출이 막내니 부모는 이미 많이 늙었고 농사를 지었다.
…그때 방으로 데리고 갔어. 그러다가 뭐 첨에 가고 거석하니까니, 나는 그때 그거 여자들보다 나이가 어
리고 작고 하니까니 애기 같지. 젖도 송긋 안 일어났으니까니. 그것도 안 왔어요. 여자들 오는 것도.
…하고 나서 그 담에는 또 거석하니까니 피도 나고 이러니까니 약이랑 넣어야 되잖아요. 그러니 딴 방에다 옮겼어요. 그래 가지고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쪼그만 하니까, 자꾸 바꿔서 부르니까, 그러고 나서 내가 그렇게 막 오줌 싸면 막 피가 나오고 이러니까, 그것들이 그 담에는 딴 방으로 날 옮겨주데요. 그래 가지고 병원에 가서 약도 넣고 했어요. 그 쪼그만한 걸. 그래 그렇게 해가지고, 또 내가 좀 있다가 내가 좀 앓았어. 막 그러니까, 요 아래가 헐고 하니까 또 열이 나요. 열이 나다 또 나쁜 병이 또 왔지. 그래 엎친 데다 뭐 덮치게 됐지.
여름이 되자 군인들은 일출의 병이 다른 사람들에게 옮는다고 차에 태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도착해보니 산기슭에 장작을 쌓아놓았다.
“불을 놓고 기름을 붓고 사람을 거기다 올려놓아 태워 죽이잖아.”
그때 산에서 한국인 남자들이 내려와 군인들과 격투를 벌이고 일출을 업고 도망했다.
“조선옷 입은 사람들이 내려와 가지고 나를 끌고 멀리멀리 갔어요. 산을 몇 개 몇 개 넘어 번갈아 나를 업고 갔어요.”
그 조선 사람들은 일출을 깊은 산 속에 있는 어느 조선 사람 집에 데려다주고 갔다. 거기서 한동안 조리를 하여 몸이 나은 일출은 다른 조선 사람을 따라 길림으로 나왔다. 그해 조선족인 노씨와 결혼했으나, 남편은 1946년도에 해방군으로 나가고, 1950년도 한국전쟁에 중국군으로 나가 죽었다.
일출이 열아홉 살 때 어린 딸도 죽었다. 일출은 그해에 해방군의 간호사로 나갔다. 스물서너 살에 제대하여 길림시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 혼자 살다가 서른 살이 넘어 중국인과 재혼했다. 남편은 바람을 피웠다. 1962년 무렵에 고향에 오려고 아이를 업고 평양까지 내려왔으나, 휴전선이 가로막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일로 중국에서는 한동안 스파이로 오인받기도 했다. 46살에 퇴직하여 이후 연금으로 생활해왔다. 슬하에 2남1녀가 있다. 남편이 계속 바람을 피워 한국으로 오기 10여 년 전에 이혼했다.
그동안 두세 차례 고국을 방문했으나, 국적 회복을 망설이다가 2000년, 드디어 국적을 되찾았다. 현재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 강일출 할머니의 증언

8월 12일(일), 오랜만에 나눔의 집이 북적거렸다. 일본군위안부역사관 개관 9주년 및 광복절 기념행사가 열리는 까닭이었다. 이 날은 마침 지난달 30일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결의안’이 통과된 뒤이기도 했고, 8월 5일부터 시작된 한·일 대학생 워크숍 ‘피스로드 캠프’를 마친 바로 다음 날이기도 했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그 전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가 열리던 날에도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했다. 피스로드에 참가한 한·일 대학생들과 초·중·고등학교 학생 50여 명 등만 할머니들의 시위를 성원할 뿐, 어찌 보면 쓸쓸하기조차 한 그날의 집회를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그곳에 있던 일본인 학생들이나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일본인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아니,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사회에 되묻고 싶었다. 어쩌면 가해 당사자들의 일원이기도 한 그 젊은이들이 그렇게나마 위안부 문제를 맞닥뜨리고 있을진대, 이승연이나 이영훈이나 지만원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어김없이 활화산과도 같은 분노를 표출하던 우리 사회가 그 열기가 사그라지고 난 뒤에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무엇을 했느냐고.
그런 물음을 안고 경기 광주의 나눔의 집을 찾은 나는 그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심사가 뒤틀려버리고 말았다. 아침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하나둘 모여든 사람들로 가뜩이나 어수선한 판에 가지고 간 우산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무실에 들러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음 급한 누군가가 현관에 세워놓은 내 우산을 들고 가버린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이 작은 일로 나는 필요 이상의, 공연히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는 마치 예견이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하루 종일 온갖 짜증으로 이어졌다. 미리 인터뷰 약속을 받아둔 일본인 자원봉사자 후루하시 아야는 피스로드 참가 중 갑작스레 맹장염을 일으킨 한 학생을 간병하기 위해 양평의 병원에 가 있다는 것이고, 그녀를 대신하기로 한 가라키 유이는 행사 진행을 핑계로 말붙이기조차 어려웠다. 그에 아랑곳없이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미국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원회 서옥자 위원장의 미국 결의안 발의부터 통과까지 경위 보고에 이어,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지역구 의원들과 함께 ‘어두운 구석’에 들러 바쁜 걸음으로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갔다.

나는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을 둘러보다 한 일본인 여대생을 주목했다. 그녀는 일본 오사카에서 온 교환학생으로 순수한 호기심에 이끌려 왔다고 했다. 나는 애초에 의례적인 답변만 들을지도 모를 이곳 관계자들보다는 그녀에게서 더 솔직한 답변을 들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녀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엉뚱한 곳에서 막히고 말았다. 처음에는 언어소통이 문제였다. 억지로 겨우겨우 말문을 튼 나는 나눔의 집 연구원으로 있는 일본인 무라야마 잇페이의 힘을 빌리려 했다. 그러나 웬걸! 나는 엉뚱하게도 이번에는 그의 검열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왜 인터뷰를 하려 하느냐, 동의는 충분히 받았느냐, 어디서 왜 사진을 찍으려 하느냐는 등 꼬치꼬치 캐물었고, 그녀와 빠른 일본말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겨우 동의를 얻어 받아낸 대답과 강일출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마저 취소해달라는 ‘통보’를 전달해왔다. 하긴 그 답이라고 해야 별다를 바 없는 의례적인 답변이기는 했지만. 여기서 강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차마 옮기지 않겠다. 다만 나는 내가 처음 취재하려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잠시 헷갈려 혼란스러웠다는 것만 밝힌다.
나중에 이를 다독이고자 하는 한국인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침해하기도, 다른 사람에게서 침해받기도 싫어하는 일본 사람들의 특성이고(일본 사람의 특성이 있으면 한국 사람의 특성도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특성이기도 하고(그렇다면 더더욱 그렇다), 피스로드 행사 진행으로 신경이 날카로운 탓이기도 하다는 것이며, 잇페이 본인의 설명에 따르자면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인터넷을 통해 본국에 알려질 수도 있으므로 상당히 조심스럽다는 것이며, 자기들 생각과는 배치된 기사가 나간 전례도 종종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좋다. 그 말을 다 이해할 수 있고, 생각도 알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내가 그들에게 답변(더더욱 본국에 돌아가 어려워질 수도 있는)을 강요라도 했으며, 그들에게 억지 참회하는 모습이라도 보여달라고 했다는 말인가.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결의안’이 통과되고 난 다음, 한국 사회가 보인 반응은 차치해놓고, 일본이 보인 반응은 이미 충분히 예견한 것처럼 치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강제’냐 ‘자발’이냐를 놓고 따지지만(이에 동조하는 한국인도 있다), 백 번 양보하더라도 그에 앞서 그 모든 것이 어디서 비롯했는가. 그 모든 원인인 침략과 전쟁을 벌인 원죄자로서, 사무라이처럼 할복은 못할지언정 ‘앗싸리’하게 사죄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사람에게 치욕을 안겨준 행동을 참회하지 않는다면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도용’이 아니라 인용해서 말하자면) ‘일본은 없다’. 차라리 이참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깨끗이 사죄하고, 그런 연후에 자국 의회에서 ‘인디언결의안’이라도 통과시켜라.
취재를 접고 원댕이골 나눔의 집을 빠져나오는데,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는 나는 속절없이 비를 맞을 뿐이었지만, 그 빗속에 길가의 무궁화꽃이 채 피지도 못한 채 ‘툭’ 하니 봉우리로 떨어져내렸다. 그런데, 그 우산은 어느 누가 가져간 것일까.
나눔의 집
나눔의 집(031-768-0064)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로부터 성적 희생을 강요당했던 생존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1992년 6월에 결성된 나눔의 집 건립추진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자는 취지로 불교계 및 사회 각계에 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2년 10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처음으로 나눔의 집 개소식을 했다.
이후로 명륜동·혜화동을 거쳐, 1995년 12월 한 독자가 기증한 경기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소재 2100여㎡의 대지에 600여㎡의 노인주거복지시설을 신축했다. 현재는 2800여㎡의 대지에 1998년 개관한 역사관을 포함 990여㎡건물이 있다.
수요집회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시위를 처음 시작한 것을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였다. 제774차 수요집회는 마침 62돌을 맞는 광복전 오전 12시부터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이날 일본대사관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서 동시에 일본에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다. 하나는 위안부할머니들의 수요집회였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회(HID)에서 벌인 광복 62주년 기념 태극기대회였다. 때가 때이니만큼 수요집회에는 대선주자를 포함한 정치인들이 많이 몰렸고, 태극기대회에는 사진기자들이 주로 몰렸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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