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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소안도 항일운동사, 전설에서 역사로-뉴스메이커(0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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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소안도 항일운동사, 전설에서 역사로


 


‘좌익계열’ 이유로 핍박받아… 지워진 기억 되살리는 후손들
 
1909년 1월 어느 밤, 소안도 남쪽의 작은 섬 당사도에 장정 다섯이 탄 배가 닿았다. 당사도엔 개항을 요구하던 일제가 상선의 항해를 위해 설치한 등대가 있었다. 배에서 내린 장정들은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라 일본인 등대원 넷을 죽이고 시체는 바다에 던졌다. 이른바 ‘당사도 등대원 살해사건’이다.

소안도. 일제강점기 36년간 섬 주민이 투옥된 기간을 합하면 300년이 넘을 정도로 독립운동의 정신이 드높은 곳이다. 현재까지 20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소안면(소안도)이 일제강점기 당시 가장 작은 군이던 완도군에서도 가장 작은 면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등대원 살해사건은 불꽃처럼 타오른 소안도 항일운동의 강렬한 예고편이었다. 장정들은 소안인 출신 동학군 이준화와 해남의 의병들이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 김명석 부회장(60)은 “1894년,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소안도에 동학군을 이끌고 와 훈련을 했다”며 “훗날 불붙은 소안도 항일운동의 바탕에는 동학혁명군의 정신이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등대원을 죽인 후 등대 램프를 부숴버리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끝내 안 깨졌답디다. 독일제라 그런지 꿈쩍도 안 했대요. 결국 바다에 던졌는데 일제가 잠수부까지 파견해서 램프를 찾아다녔지만 결국은 못 찾았다네요.”(황영우·55) 예순을 바라보는 후손은 조부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마치 직접 겪은 일처럼 들려줬다.


섬주민 투옥기간 합하면 300년

등대원 살해사건이 예고편이었다면, 소안도 항일운동의 ‘본사’는 토지반환소송에서 시작한다. 1905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상당수 토지의 소유권을 친일파나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이민자 등에게 넘겼다. 수백만의 조선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당시 소안도 주민들도 소작농이 될 ‘뻔’ 했다. 일제가 소안도 토지의 소유권을 이기용 자작(사도세자의 5대손)에게 넘긴 것이다. 이기용은 그전까지는 수조권(국가 대신 조세를 받을 권리)만 갖고 있었고, 경작권은 주민에게 있었다. 주민들에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소안도 주민들은 대표(최성태, 김사홍, 신완희, 이한재)를 뽑아 소유권을 반환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무려 13년간 이어진 소송 끝에 주민들은 이겼다. 당시 신문은 “소안은 집요한 토지계쟁사건에 귀가 익은 곳이다. 13년 동안 다투어 얻은 토지는 이미 민유지로 해결됐다”(조선일보, 1927년 5월 17일자)고 보도했다.

“토지반환소송은 소중한 사건입니다. 그 일을 계기로 주민들의 뜻이 모였고 한마음으로 학교도 세울 수 있었죠.”(김명석 부회장)

소송에서 이긴 소안도 주민들은 이 일을 기념하며 돈을 모아 소안사립학교를 세웠다. 소안학교는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을 했고 면민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하나가 됐다. 

오른쪽 위_ 송내호 선생의 묘비. 오른쪽 아래_ 김병석 부회장이 항일운동가들의 은거장소로 추정되는 미라리 해안의 동굴을 가리키고 있다. <유성문 객원기자> 

“소안도엔 일본인들이 세운 공립학교가 따로 있었제. 하지만 일본군속 등 30여 명 정도밖에 다니지 않았어. 나머지 150명은 소안학교에 다녔지. 일본인들은 학교 가는 꼬마들이 예쁘다며 사탕을 주곤 했는데, 아이들은 학교에 오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버렸어. 우린 일본인들에겐 말도 안 걸었어.”

오두막에 앉아 땀을 식히던 황모 할아버지(85)는 소안학교 이야기가 나오자 반갑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일제는 소안학교가 국경일에 국기(일장기)를 달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학교폐쇄령을 내렸다. 소안도의 항일 청년조직 `배달청년회는 집회를 열어 반대했지만 줄줄이 검거돼 재판을 받았고 일부는 징역을 살았다.

소안 사람들은 주로 항일단체인 배달청년회와 농민·노동운동단체인 노농대성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간도나 일본 등으로 활동을 넓혀갔다. 여비는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았다.

일부는 훗날 ‘중앙무대’에서 활약했다. 신간회의 간사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송내호가 대표적인 예다. 소



                        소안독립운동기념회 사람들. 왼쪽부터 김명석 부회장, 황영우 부회장,
                        직원 황정혜씨, 김진침 회장, 정종래씨도 함께 포즈를 취했다. <유성문
                        객원기자>



안학교 설립 초기 교사였던 그는 완도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소안을 중심으로 전남지역을 아우르는 비밀결사조직 ‘수의위친계’와 ‘일심회’도 조직했다. 정남국은 주로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벌였다. 해방 후에는 완도에서 2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노동법 정비에 힘썼다.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의 이대욱 사무국장은 “우리 섬의 항일투쟁사를 잘 모르는 주민들도 송 선생과 정 선생의 이름은 다 알 정도”라며 “그만큼 존경을 받은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왜 소안도에서는 이토록 항일운동이 두드러졌을까. 박찬승 목포대 교수는 자신의 논문 ‘일제하 소안도의 항일민족운동’에서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진보적 의식에 일찍부터 눈떴던 지도자들’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송내호를 중심으로 한 훌륭한 지도력은 주민의 잠재적인 에너지를 하나로 결집시키는 자산”이었다는 것. 또 주민들 중 지주층·양반층이 별로 없고 대부분 평민 자작농으로 구성돼 대립 갈등 소지가 적었다는 점, 토지반환 소송 과정을 통해 주민단합이 강화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러나 빛나는 역사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해방 후 이념대립이 격화하면서 소안도에는 점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소안도의 독립운동가는 대부분 좌익계열이었다. 1950년 한국 정부는 “북한에 동조할 위험이 있는 이들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다. 이때 소안도 사람 중 270여 명이 바다에 던져졌다.

“당시 섬에는 700~800세대가 살고 있었죠. 죽은 270여 명은 대부분 남자였어요. 그때를 계기로 독립운동의 기억은 땅 밑으로 꺼져버렸어요. 모두 쉬쉬했죠.” 황영우 부회장의 말이다.

50~60대의 독립운동가 2, 3세들은 박정희정권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하필 한창 청년시절을 보낼 때였다. 할아버지·아버지가 좌익계열 운동가였던 정종래씨는 “세상은 저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아닌 빨갱이의 후손으로 보았다”고 회상했다.

“밖에서는 할아버지가 좌익계열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에 대해 일언반구도 해선 안 됐어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잡혀갈 수도 있으니까요. 제 친구의 할아버지가 저의 할아버지의 동료였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죠. 이곳 경찰서에서는 소안도를 모스크바라고 했다던데요. 조상들의 좌익전력 때문에 더욱 감시가 심했죠.”


주민모금으로 항일운동기념탑 세워


급기야 후손들은 부친이나 조부의 독립운동 자료를 없애기 시작했다. 기념사업회의 한 관계자는 “작은 종잇조각 하나도 소각했다”고 회상했다. 일부는 자녀들에게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고 아예 섬을 떠나기도 했다.

좌익계열 독립운동가를 부모로 둔 이들은, 자녀들의 ‘앞길’이 이미 막혔다는 생각에 교육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기념사업회의 한 관계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까지만 공부를 시킨 뒤, 양식이나 뱃일을 시키려던 부모들이 많았다”며 “교육열이 대단하던 소안도의 면학률은 1970~1980년대에 주변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고 말했다.

결국 기억은 지워졌고 전설만 남았다. 주민들에게 소안도의 항일투쟁사에 대해 물을라치면 “아무튼 대단했다”는 대답이 주로 돌아온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 관계자는 “사실 구체적으로 말할 만한 것이 잘 기억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나마 선조의 일을 간직하고자 하는 후손들은 이념의 잣대로 인해 기억을 지워버린 세월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소안도의 독립운동가들이 심취한 사상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회주의와 달라요. 결국은 해방과 독립을 위한 사상이었죠.” 좌익계열 독립운동가 정창남씨의 손자 정종래씨의 말이다.

기억 밖으로 밀려나 있던 소안의 항일운동이 알려지고 인정받은 것은 1990년에 이르러서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 김진택씨는 신문·재판기록과 증언을 수집했다. 조부의 항일활동이 정당한 평가를 받았으면 하는 소망 때문이었다. 이균영 전 동덕여대 교수는 처음으로 소안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후 학계의 연구가 이어졌고 몇 편의 논문도 발표됐다.



                                    소안사립학교 터 앞의 항일운동기념비. 주민들이 돈을
                                    모아 마련했다. <유성문 객원기자>
 


때를 맞춰 소안도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항일운동기념탑을 세웠다. 지금은 항일운동기념관도 운영 중이다. 정부의 지원으로 30억 원을 들여 건물도 짓고 정원도 꾸몄다.

하지만 깔끔하고 멋스럽게 지은 기념관과 마을 어귀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던 최모 노인이 대비된 것은 왜일까. 노인의 할아버지는 좌익계열 독립운동가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 제의에 “할말이 없다”고만 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사실 몇 번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자문을 구해봤지만 정말 조부의 일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지워진 기억을 되찾고 ‘기념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선열의 기억은 아직 우리와 ‘호흡’하고 있지 않다. 소안도는 광복 62돌을 맞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참고논문
이균영, ‘해방의 땅 소안도’, 1989. | 정병호, ‘항일운동의 성지, 소안도를 가다’, 1989.
박찬승, ‘일제하 소안도의 항일민족운동’,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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